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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저격수는 왜 미국출신이 많을까?

by uesgi2003 2013. 8. 5.


장마가 이번 주에 끝나면서 서울에서도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겠군요. 남해안의 적조 그리고 영남 지방의 녹조가 더욱 기승을 부릴텐데 더 이상의 피해가 없이 사라져주기를 바랍니다. 


설국열차에 대한 호불호 논란이 대단한데도 불구하고 흥행은 초특급 기관차 속도입니다. 봉준호감독과 송강호씨의 티켓파워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저도 사람들이 좀 내리면(?) 무임승차는 아니고 당당하게 표사고 올라 탈 생각입니다. 


저격수는 왜 미국출신이 많을까?


2002년 3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할 시기에 캐나다 저격수가 2,430미터 거리에서 알 카에다 병사를 저격하는 일이 있었다. 이 저격은 베트남전에서의 2,250미터 기록을 깬 것이다. 보안상의 이유로 캐나다 저격수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은 반면에, 베트남전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사진 참조)은 대단한 유명세를 누렸었다. 


해스콕은 북베트남 장성을 4일동안이나 노린 적이 있었다. 그는 뱀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적의 저격수와 맞대결을 벌인 적도 있었는데, 조준경이 반사되는 것을 노려 처치했다. 총구를 떠난 탄두는 정확하게 조준경을 관통해서 귀를 뚫었다(사진 참조). 조금만 망설였어도 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해스콕은 위장 모자에 흰 깃털을 꽂았었는데, 북베트남은 '흰 깃털'에게 30,000달러의 현상금을 걸기도 했다. 해병 저격수 중 일부는 해스콕을 보

호하고 존경을 표시하려고 모자에 흰 깃털을 꽂았다. 결국 현상금을 탄 사람은 없었지만 해스콕의 차가 지뢰를 밟으면서 부상을 당했다. 그는 동료를 차에서 끌어내면서 심한 화상을 입었고 귀국해서는 불멸의 전쟁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는 1999년에 다발성 경화증(뇌와 척수 주변의 질환)으로 사망했다. 


해스콕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격수 중의 한 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래도 그의 대중성은 이상한 일이다. 그의 용기와 사격술은 대단하지만 저격수는 영웅대접을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저격수가 노리는 상대와 주변의 동료 모두에게 대접을 받기 힘들다. 목표대상은 공포를 그리고 아군은 기피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해스콕이 "사냥과 사격을 좋아하지만 살인은 즐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듯이 저격수 자신도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극초기의 미국 저격수는 사냥꾼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장거리 사격이 일반화되지 않은 전장에서 대활약을 했다. 그 당시의 제식소총은 강선이 없어서 50m 유효사거리의 집중사격용 소총이었다. 미국의 황야, 그리고 인디언이나 맹수와 맞대결을 벌여야 하는 위험한 환경에서는 장거리 사격은 생존을 의미했다. 그래서 총기공장은 더 긴 총열에 홈을 파서 총알에게 회전력을 주어 200m까지 사거리를 늘렸다. 

펜실바니아 장총과 같은 무기는 전쟁의 향방을 바꿨고 저격수라는 신종 전사를 태어나게 해주었다. 그 당시 전투는 집체대열로 근거리까지 접근한 후에 일제사격을 하고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이어서 저격수는 상당히 여유있는 시간 동안 상대를 골라가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영국군은 저격수의 공격을 정의롭지 못하고 야만적인 행태로 비난했는데, 특히 미국 저격수가 주로 장교만을 골라 죽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저격수의 활약이 전투 자체를 결정지은 경우가 많았다. 1777년 10월 7일의 베미스 고지 전투에서는, 미 독립군의 저격수 팀 머피가 영국군 여단장 사이몬 프레이저를 저격해 말에서 떨어뜨렸다. 단 한 발의 총탄으로 영국군의 지휘체계는 붕괴되었고 전투는 미 독립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그림 참조). 

머피는 약 3~500m 거리에서 저격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 저격수가 머피인지 그리고 그 거리가 유효사거리 200m를 그렇게 많이 넘어설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총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영국 장군은 중상을 입었고 그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부터 저격수라는 특수병과가 자리를 잡았고 전쟁이 총동원과 집중포화 전술로 발전한 후에도 저격은 그 가치를 더해갔다. 


미국인의 사격술은 그 이후에도 명성을 이어갔다. 남북전쟁 중 양쪽은 모두 저격수를 배치시켰고, 한 명의 저격수가 포대 하나를 침묵시키는 대활약도 자주 일어났다. 

전쟁기간 중에 상당히 많은 저격전과가 기록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전과는 1864년 5월, 스포트실바니아 전투에서 북군 장군 존 세지윅 저격이었다. 그는 저격을 당할 당시에 500m 밖에 있는 남군의 사격이 두려워 숨어있는 북군 병사들을 꾸짖고 있었다. "이 거리에서는 꼬끼리도 못 맞춰"라며 병사들에게 숨지말라고 야단을 쳤지만 남군은 당시에 조준경까지 장착하고 있었고 그의 왼쪽 눈 아래를 맞췄다. 그의 죽음을 목격한 북군 군단 전체는 "무릎이 덜덜 떨리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북군은 더 이상의 전진을 멈추고 저격수가 숨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대포를 총동원했다. 저격을 당한 후에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반격이었다. 


독립전쟁 중에는 저격수는 보통 생포하지 않았다. 다시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거나 항복을 하면 저녁에 초대할 정도로 상당히 여유가 있을 때였지만 저격수는 그런 관용을 베풀 대상이 아니었다. 양쪽 병사들 모두 저격수를 무서워하고 증오했다. 심지어 집안끼리도 전투를 벌인 남북전쟁에서도 저격수만큼은 예외였다. 게티스버그 전투의 데빌스 덴에서 잡힌 남군 저격수들은 자신이 교수형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저격수를 혐오하고 중오했는데 아군 저격수를 바라보는 눈이 부드러울 리가 없었다. 

전투가 살인을 하는 것이지만 어떤 목표물을 정해두고 노리는 것은 상당히 얹짢은 일이다. 특히 자신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거리에서 무방비 상태의 대상을 노리고 있는 것은 비겁한 행동으로도 비춰진다. 목표대상은 자신이 왜 죽는 지도 모르고 동료들도 적의 총탄이 어디에서 날아왔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보복할 방법도 없다. 

적의 총탄이 다시 날아들면 당황스러운 만큼 분노도 쌓여간다. 그리고 다시 총탄이 날아들면서 동료가 쓰러지고 지휘관이 쓰러진다면? 아마 다음은 내 차례일텐데 그것만큼 공포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전쟁이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저격수를 잡는다면... 


수 만 명의 병사가 참호로 틀어박혀 몇 개월씩 대치하던 1차대전에서도 저격수는 맹활약했다. 안전하게 몸을 숨긴 저격수는 부주의하게 머리를 올리거나 정찰을 하려는 병사를 어김없이 참호속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1차대전은 기관총, 고폭탄, 가스로 대량살상을 하는 동시에 야전삽으로 육박전을 벌이던 근대와 현대가 만나는 전쟁이었지만 근대의 저격수만큼은 현대식 전투기 조종사처럼 마치 살인전문가처럼 고독한 전투를 벌였다. 

저격은 하나의 전술로 자리잡았고 양쪽의 저격병이 서로를 끊임없이 노렸다. 그리고 조준경이 달린 저격전용 총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극소수의 해병만이 저격총을 사용했지만 수 많은 미국 병사들이 영국군의 저격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았다. 


미국의 거친 황야는 사라진 지 오래 되었지만 미국인의 마음 속에서는 사냥과 사격에 대한 동경심이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저격수 후보를 만날 수 있었다. 

1차대전 당시 가장 뛰어난 미국 저격수는 알빈 요크로 1941년에 게리 쿠퍼 주연의 요크 하사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요크는 신형 조준경을 달지도 않았다. 그는 가늠자만 사용해서 사격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1918년 10월 8일, 요크는 300m 거리에서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무력화시키면서 25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포로로 잡았다. 


허먼 데이브스라는 시골청년은 1918년 10월 10일 그러니까 요크 하사의 전설적인 전과 2일 후에 베르덩 근처에서 독일군이 기관총 진지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왜 저들을 막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너무 거리가 멀어서 라는 대답을 들었다.

"왜요? 저 정도면 상당히 가까운데"라는 말과 함께 그는 900m 밖에 있는 독일군 4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를 쫓아보냈다. 그는 제식소총인 1903년식 스프링필드를 조준경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데비이스는 뛰어난 사격술 외에도 은신술의 대가였다. 그는 기관총 진지 근처 45m까지 조용히 기어가서 모르는 외국어가 들리자 독일군이라고 판단하고 4명을 죽였다. 

앞에서 소개했던 해스콕도 시골 알칸사스 출신으로 자신이 직접 사냥해서 저녁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먹고 살기 위해 뛰어난 사격술을 익힌 것이다.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 그리고 그 이후의 분쟁에서는 지원을 받을 명사수나 사냥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저격수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6~10주의 훈련과정은 사격술뿐만 아니라 독도법(독도의 법령이 아니라 지도 읽는 법), GPS 사용법, 은신과 위장, 관측과 정찰 등의 다양한 기술을 교육하고 있다. 사격술은 전체 교육과정의 10%에 불과하다. 

2차대전 당시에는 저격병을 '10센트짜리 살인자'라고 불렀는데 총탄 하나의 가격을 말한다. 지금의 저격수 무장비용은 훨씬 높아졌다. 이제 더 이상 가늠자를 사용하지 않으며 제식소총도 사용하지 않는다. 해병 중위 존 조지가 1943년에 과달카날에 상륙하면서 가지고 갔던 윈체스터 모델 70과 같은 개인무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베트남전에서 해스콕은 래밍톤 볼트작동식 사냥소총을 사용했는데 브라우닝 M2 기관총(사진참조)에 조준경을 달아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사거리는 무려 2,2km 정도였다. 

현대식 저격총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정교해졌다. 이제 50 구경은 저격수의 견착용 표준이 되었다. 캐나다 저격수도 이 무기를 사용했는데 대인은 물론이고 차량이나 화기까지도 저격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의 저격수는 일종의 포병 역할까지 겸하면서 더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와 교육과정은 바뀌었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저격수는 단독작전을 펼치며 외로운 임무를 맡는다. 그는 원거리에서 적을 사살하는 동시에 목표대상을 자신이 선택하고 죽는 모습까지 지켜봐야 한다. 저격수는 가죽옷을 입고 펜실바니아 장총을 들고 숲속을 뛰어다니며 레드코트를 사살하던 조상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바로 미국식 전통이다. 


미국 저격총의 역사입니다.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