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으로 47대의 전폭기가 오자와의 항모에서 발진했지만 이번에도 신참조종사의 미숙으로 절반 이상이 방향을 잃고 스프루언스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나머지가 항모 3척에 공격을 감행했는데 피해는 거의 입히지 못하고 7기를 잃었다.
낙심한 오자와는 사진과 오진이 앞의 실수를 만회하기만을 빌었지만 갑자기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마지막 82대의 전폭기 중에 50기가 미함대를 찾지 못하고 괌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하필이면 헬캣이 괌 비행장을 공습 중이었고 30기가 착륙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소수의 일본기가 와스프에게 덤벼들었다. 스프레이그Sprague함장은 폭탄을 피해 급선회를 거듭했고 사소한 피해 정도만 입었다.
아침출격에 나섰던 374기 중에 100기 정도만이 항모로 귀환했다. 스프루언스의 조종사는 일본해군의 귀중한 전력에 큰 손실을 입혔고 일본해군은 이 전력을 다시는 복구하지 못했다. 항모는 함재기 없이 귀국길에 올랐고 이후에는 해전에서 보조역할만 했다.
미함대는 22기와 60명을 잃어서 일본함대에 비해 매우 가벼운 손실이었다.
1945년 6월, 재개장한 후에 갑판에서 한가롭게 배구를 즐기고 있는 와스프 수병들입니다.
2차대전사에 대해 좀 아시는 분은, 와스프는 침몰했는데? 하실텐데 와스프(CV-7)는 1942년 9월에 과달카날에서 일본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침몰했습니다.
1943년에 11월에 취역한 와스프는 CV-18번 함으로 예정된 오리스커니Oriskany 대신에 와스프라는 이름을 이어받았습니다. 에섹스급으로 100기의 전폭기를 실을 수 있는 대형항모였습니다.
오자와의 참담한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항모 다이호가 자살방어 덕분에 알바코어의 어뢰 한 발은 피했지만 연이어 발사한 5발의 어뢰 중 하나가 오전 9시 15분에 다이호의 오른쪽 선수 부분을 뚫었다.
거대한 항모는 어뢰 한 발 정도는 큰 피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폭기를 계속 발진시키면서 선수에 있는 기름을 퍼냈는데 장교 한 명이 연기와 기화된 가솔린을 빼내려고 환기구멍을 열면서 위험한 기화 가솔린이 배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오후 3시 32분에 불똥이 터지며 대폭발이 일어나서 동체에 큰 구멍을 내고 갑판을 망가트렸다.
오자와와 참모는 재빨리 구축함으로 옮겨 탔지만 1,500명의 수병이 다이호와 함께 수장되었다.
카바야Cavalla가 11시 52분에 쇼카쿠Shokaku를 포착하고 6발을 연이어 발사했다. 2발은 빗나갔지만 나머지 4발이 진주만의 복수를 했다. 4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며 항모를 구하려고 했지만 연쇄폭발이 일어나며 1,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이호가 어뢰를 맞는 장면입니다. 클릭하면 무척 커집니다.
성공적으로 방어를 마친 조종사들은 이제 일본함대를 궤멸시킬 차례라고 생각했다. 스프루언스는 일본함대의 사이판기습이 염려되었고 격전을 치른 조종사들을 다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본군이 아닌 사이판을 향해 계속 동진했다.
6월 19일 저녁 10시, 사이판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스프루언스는 반전해서 오자와를 찾아 나섰다. 6월 20일 오후 4시,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한 정찰기가 440km 멀리 있는 일본함대를 찾아냈다.
배위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자와는 미전폭기의 최대 작전반경에 있었고 3시간 후면 날이 완전히 저물 시간이었다. 3시간 안에 발진해서 공격하고 귀환해야 하며 자칫하면 연료부족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미처는 일본해군 주력을 궤멸시킬 기회와 전폭기를 잃을 위험을 두고 고민하다가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오후 4시 10분에 발진명령이 떨어졌고 20분 만에 200대의 전폭기가 오자와에게로 향했다.
엔터프라이즈 폭격편대 10의 편대장 제임스 라미지는 비행 중에 뭔가 타는 냄새를 맡았고 포수에게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다. 순식간에 조종석은 감은 연기로 가득 찼지만 모처럼 맞이하는 항모사냥을 놓치기 싫어서 그대로 비행했다. 다행히 유출된 윤활유 연소였던지 연기는 5분 만에 사라졌다.
총발진하고 나서야 오자와의 항모가 실제로는 100km 더 멀리 있다는 수정보고가 들어왔다. 조종사들은 계속 연료눈금을 보며 아무리 기름을 아낀다고 해도 제대로 갑판에 귀환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염려는 그대로 적중했다. 연료눈금이 계속 내려가는데도 일본함대는 보이지 않았고 수평선 너머로 마지막 햇빛이 보일 뿐이었다. 오자와를 20분 내에 찾지 못한다면 도박은 참담한 재앙으로 끝날 판이었다.
하나 둘 씩 좌절하기 시작할 때에 오자와의 함대가 보였다. 요격기가 떠올랐지만 대부분의 조종사가 아예 무시하고 전함과 항모에게 달려들었다. 회피기동은 죽음을 부르는 사치였다. 라미지도 요격기는 호위기에 맡기고 총탄세례를 뚫으며 급강하했다. 뒷좌석의 기관총이 요란하게 터지더니 바로 옆을 제로기가 지나갔다.
라미지는 급강하하는 동안 함모의 선수부분에 기수 기관총탄을 퍼부었고 450m 상공에서 어뢰를 투하한 후에 100m에서 기수를 올렸고 그 뒤를 전함, 순양함, 구축함의 대공포탄이 뒤쫓았다. 어뢰가 제대로 명중했다고 포수가 환호성을 지르며 알려주었다.
“대장, 뒤를 보세요. 저 놈 뒤에서 앞까지 온통 불덩이입니다.!” 라미지는 대공포를 피하는데 급급해서 뒤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대전과를 올렸다는 것보다 어두워지는 하늘이 더 걱정이었다.
렉싱턴의 톰 브론중위는 주위에 작렬하는 대공포탄을 뚫고 760m 상공에서 폭탄 4개를 투하한 후에 대공포화를 피해 급선회했다.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3개는 항모갑판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미공습대는 일본기 65대를 격추시키고 경함모 히요Hiyo와 다른 전투함 3척을 침몰시켰다. 대신에 18기를 잃었지만 이제 오자와는 430기 중에 겨우 35기만 하늘에 띄울 수 있을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었다. 전투기야 다시 만들면 되지만 아무리 신참조종사라고 해도 이렇게 많은 손실을 절대로 복구할 수 없었다.
원래는 고급여객선으로 취항했다가 급하게 항모로 개장된 히요입니다. 220m의 길이, 24,000톤의 배수량, 그리고 나중에는 53기 이상의 함재기를 실었기 때문에 경함모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소화실험 중입니다.
대공포망을 벗어난 미공습대는 이제 생존을 위한 비행을 하고 있었다. 항모는 400km 밖에 있었고 어둠 속에 잡은 항로가 틀리지 않기만을 기도했다. 그렇지 않아도 격렬한 전투와 공포에 지쳐있었고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어둠에서 단조로운 엔진음만 2시간 동안 듣다가 잠에 빠져 이탈하는 경우도 있었다. 연료가 바닥나서 점차 고도가 낮아지며 천천히 추락하는 비행기도 하나 둘 씩 늘어갔다.
종군기자 부치는 미처와 함께 초조한 마음으로 영웅들의 귀환을 기다렸다. “4시간 동안, 그들이 이륙하고 돌아오기 까지, 전투직전보다 더 초조한 심정이었습니다.”
미처는 조종사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다시 한 번 도박을 감행했다. 바다에 불시착하는 조종사를 찾기 위해 함대를 사방으로 흩어 놓았고 모든 선박에게 불을 환하게 밝히고 구축함과 순양함은 계속 조명탄을 하늘 높이 쏘게 했다. 만약 일본 잠수함이 숨어 있었다면 항모와 전함을 구분해서 노릴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마치 쪽발이Japs에게 우리를 잡으라고 초대하는 것 같았죠. 모든 선박에서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우리를 노리는 쪽발이와 함께 죽는 겁니다. 조종사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2시간 동안 비행기가 덜덜덜거리며 눈에 보이는 항모에 착륙했다. 연료가 충분하지 않으면 최대한 근처에 불시착해서 구축함의 구조를 받았다. 일부 조종사는 공포에 질려 착륙하는 동료의 진로를 끼어들거나 항모 유도병사의 신호를 무시하기도 했다. 절반 정도가 다른 항모에 착륙했다.
라미지도 눈부시게 불을 밝힌 엔터프라이즈에 접근하던 중에 갑판사고로 다른 항모로 가라는 신호를 받았다. 다행히 3km 밖에 안 떨어진 다른 항모에 내려 앉을 수 있었다.
부치의 눈에 너무 높게 다가오는 비행기 한 대가 보였다. 제동선을 놓치더니 한쪽에 몰려있던 비행기들과 충돌했다. 갑판에 있던 수병과 겨우 살아 돌아온 포수가 목숨을 잃었다. 요크타운에 안착한 토미중위는 조종석을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갑판에 무리한 착륙을 하던 다른 비행기가 몇 번을 튕긴 후에 덮쳤고 그대로 즉사했다.
모두 80대의 비행기가 제대로 착륙하지 못했고 50명의 조종사가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스프루언스는 이후 3일 동안 필리핀해전을 마무리지었다. 6월 21일, 리의 전함과 순양함을 파견해 후퇴하는 오자와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이판 상륙부대를 위협하는 일본함대가 없자 스프루언스는 2일 후에 대부분의 선박을 귀항시켰다.
스프루언스가 오자와와 일전을 치르지 않고 사이판을 고수한 것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다. 미처는 전투일지에 “적이 도망쳤다. 사정권 내에 있을 때에 단 한 번의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함대는 그대로였다”고 기록하며 조종사들의 의견을 그대로 전했다.
스프루언스를 옹호하는 의견도 대등했다. 오자와는 스프루언스 함대를 궤멸시키겠다며 타위타위를 출발했지만 3척의 항모와 귀중한 항공전력 모두를 잃었기 때문에 미국함대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스프루언스는 사이판에서 오자와의 공격을 일부러 기다렸고 결과를 보면 그의 결정이 옳았다.
부치도 “일본함대는 이제 전투함대라고 부를 수 없으며 남태평양에 다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에 맥아더장군은 안전해졌다”고 자서전에 기록해 스프루언스와 뜻을 같이했다.
40년 후, 역사가 존 코스테요John Costello는 필리핀해전은 태평양전쟁 중에서 가장 완벽한 승리였다며 다시 한 번 스프루언스가 옳았음을 주장했다.
스프루언스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했고 다른 사람의 비난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상관인 어네스트 킹Ernest King은 7월에 사이판을 방문하면서 스프루언스에게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소. 다른 사람의 말과 상관없이 귀관이 사이판 부근을 고수하고 오자와를 쫓지 않은 것은 옳았소”라고 말하며 마지막 방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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