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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워털루전투 (1부)

by uesgi2003 2018. 4. 29.


원래는 2차대전 극초반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유투브에서 워털루전투 동영상을 본 김에 짧은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1부에서는 전체 상황을, 2부에서는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우구몽농장 전투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워털루전투는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나폴레옹의 계획대로 대승을 거두고 화려하게 부활했을 더 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렇지만 모사는 재인이고 성사는 재천이라고 하죠. 

하필이면 하루 전에 폭우가 쏟아져서 전투가 2~3시간 지연되어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블뤼허를 추격하라고 보낸 그루시원수는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되돌아가지 않는 오판을 했습니다. 그루시에게 전령을 보내 되돌아오라고 명령했는데 참모장이었던 술트원수는 전령을 한 명만 보내는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단 한 명의 전령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는 그루시를 찾는 것은 고사하고 적으로 가득 찬 그 일대를 누비고 다닐 수 없었죠. 


워털루전투에 대한 상세한 전황은 기존에 워낙 많은 자료가 있기 때문에 다른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워털루전투는 양측 20만명 이상이 충돌했던 거대한 전투이기 때문에 많은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 워털루전투 (1부)


1800년대 초반 나폴레옹 보나파르테Napoleon Bonaparte는 유럽전체를 휩쓸면서 프랑스제국을 세우고 바다에서는 영국의 해양력에 도전했다. 1804년~1814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야심을 막기 위해 협력하면서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이 일어났다.

1814년, 나폴레옹이 폐위되고 엘바Elba섬으로 유배되면서 연합국은 목표를 달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에서는 보르봉Bourbon왕가의 루이Louis 18세가 왕위에 올랐다. 


1815년 2월 말, 유럽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지칠줄 모르는 야심가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해 프랑스로 향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탈출 그리고 프랑스 입국은 프랑스제국의 부활과 피비린내 나는 엄청난 전쟁을 의미했다. 

1815년 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은 병력을 집결시키기 시작했고 나폴레옹도 동원령을 내렸다. 양쪽 모두 마지막 결전을 피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상대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인 웰링턴Wellington공작이었다. 두 사람은 19세기 초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1769년 코르시카Corsica섬에서 태어난 나폴레옹은 지식과 출세를 추구하는 젊은 병사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급진사상을 지지했고 프랑스육군에서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영국의 인도항로를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798년에는 이집트를 침공했다. 

1799년이 되자 프랑스는 유럽 대부분의 국가와 전쟁을 벌였고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돌아와 쿠데타를 일으키고 1800년 2월에 제1 집정관First Consul에 올랐다.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그는 1804년 황제에 즉위했다. 

프랑스제국은 영국의 해양력에 도전했다가 1805년 트라팔가Trafalgar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영국침공의 꿈을 포기했지만 독일과 폴란드까지 합병하며 절정에 올랐다. 스페인 대부분을 점령하고 포르투갈을 침공해 영국과의 교역을 봉쇄했다.


웰링턴공작은 이베리아Iberia반도에서 처음으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아일랜드출신의 웰링턴은 인도에서 군경험을 쌓은 후에 1809년 포르투갈로 건너가 나폴레옹의 침공에 저항하는 게릴라전을 지원했다. 

웰링턴은 초반의 실패를 극복하고 1811년에는 포르투갈에서, 1813년에는 스페인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나폴레옹의 유럽통일의 꿈을 저지했다. 

프랑스의 대육군Grand Army는 러시아침공에서 궤멸당했고 연합군이 사방에서 프랑스를 침공했다. 1814년 4월, 나폴레옹은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유배되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즐겼다. 심지어 무장경비병까지 데리고 있었다. 본토의 상황을 계속 보고받았기 때문에 1815년 초에 귀국을 단행할 수 있었다. 


3월 20일, 나폴레옹은 파리에 도착했고 시민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평화를 선언했지만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믿지 않았고 결국에는 연합군으로 전쟁선포로 대답했다.  


나폴레옹은 지원군을 모아 대응하려고 했지만 충분한 병력을 모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무서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전경험이 많은 고참병들이 존재했고 일선 지휘관은 애국심과 충성심에 불탔다. 

영국,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와 프로이센 연합군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국경에 분산되어 있었다. 영국군사령관 웰링턴공작은 평소대로 공세에 나서기 보다는 프랑스군이 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나폴레옹은 확신을 가지고 결전을 준비했다. 교전을 피하자는 조언은 흘려보내고 1815년 6월 12일에 파리를 떠나 벨기에에 있는 병력과 합류했다. 영국군과 블뤼허Blucher의 프로이센군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6월 14일, 나폴레옹은 ‘조국의 명예와 안녕이 위험에 처해있다. 프랑스국민이여, 굴종하던지 아니면 죽음을 선택할 때가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6월 16일, 캬트흐 브하Quatre-Bras와 리니Ligny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뒀지만 연합군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6월 17일, 폭우로 땅은 진흙탕으로 변했고 프랑스군은 흠뻑 젖었다. 진흙탕으로 변한 전장과 도로는 결국 나폴레옹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캬트흐 브하 지도입니다. 네원수가 이끄는 20,000명과 웰링턴의 연합군 8,000명이 전투를 벌여 초반에는 프랑스군이 유리했지만 36,000명까지 불어난 연합군에 밀려 결국에는 캬트흐 브하를 떠나게됩니다. 

프랑스군은 웰링턴군이 프로이센군과 합류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우선이었기때문에 무승부에 가까웠습니다. 

양측 모두 4,000~4,800명을 잃었습니다. 



프랑스군 60,800명이 프로이센군 84,000명과 전투를 벌여 캬트흐 브하보다 훨씬 큰 규모였던 리니전투입니다. 

아래는 병사들의 환호를 받고있는 나폴레옹입니다. 




블뤼허는 패색이 짙어지자 72세의 나이를 무릅쓰고 기병을 직접 지휘하다가 말이 쓰러지는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프로이센군은 리니전투에서 16,000명을 잃고 600명이 포로가 되었고 야포 21문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후 퇴각에서 9,000~12,000명이 탈영하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만약 중간의 장 밥티스트 드루에Jean-Baptiste Drouet, Comte d'Erlon(프랑스 1군단)가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프로이센군을 훨씬 큰 피해를 입었을겁니다. 그는 어느 쪽 전투에도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군은 11,500명을 잃었지만 프로이센군을 궤멸시키지도 못했고 밤새 퇴각하는 프로이센군을 놓쳐서 워털루전투에서 패전하게 됩니다.  


6월 18일,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웰링턴과 나폴레옹은 전열을 정비했다. 웰링턴은 브뤼셀Brussels과 이어진 몽셍장Mont-Saint-Jean에 사령부를 차렸고 68,000명을 4km 길이의 등선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파펠로트Papelotte, 라 에이 셍트La Haye Sainte와 우구몽Hougoumont 농장이 나란히 서 있었다.

웰링턴은 블뤼허 병력 50,000명이 합류해야 하기 때문에 수비전술을 고수하기로 했다. 블뤼허는 리니전투 후에 워털루에서 몇 km 떨어진 우아브르Wavre로 후퇴한 상태였다. 

나폴레옹의 사령부는 메종 두 루아Maison du Roi 마을에 있었다. 프랑스군은 72,000명 정도였기 때문에 프로이센군이 합류하기 전에 영국군을 최대한 빨리 격파해야했다. 나폴레옹은 승리를 자신했다. 그는 ‘웰링턴은 나쁜 장군이다. 영국군도 그렇고 이 전투는 아침먹는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16일 두 전투부터 18일 워털루전투까지의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자신감과는 달리 진흙탕과 아침안개 때문에 원하는 시간에 공격할 수 없었다. 일부 역사가는 만약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 몇 시간 만에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을 격파하고 프로이센군을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결국 전투는 오전 11시를 넘겨서야 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은 언제나 그랬듯이 선공에 나섰는데 연합군이 요새로 만든 라 에이 셍트와 우구몽 농장에 집중했다. 프랑스군은 엄청난 병력손실은 물론이고 귀중한 시간까지 흘려보냈다. 

다른 곳의 프랑스군은 연합군보병에 공격을 퍼부었다. 기병돌격은 연합군 전열을 무너트렸고 프랑스군의 포화는 하루 종일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역전의 프랑스보병은 연합군 전열에 점차 큰 구멍을 냈고 웰링턴의 일부 장교는 패전했다고 믿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의 모든 공격은 전선을 무너트리지는 못했다. 영국보병은 프랑스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놀라운 분전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상당한 피해를 입었는데 이니스킬링Inniskilling연대의 경우 45분 만에 60%가 넘는 병력을 잃었다. 



워털루의 세 농장의 위치입니다. 프랑스군은 우구몽농장을 반드시 점령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만약 무시하고 그대로 직진했다면 웰링턴을 훨씬 빨리 위기를 겪었을 겁니다. 중간의 4자리 숫자는 당시 시간대입니다. 


우구몽농장 전투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Jerome 사단이 우구몽을 포위했다. 오전 11시~오후 4시, 프랑스군은 세 번이나 우구몽농장을 공격했다. 연합군은 정예병력 2,000명을 농장과 주변에 배치해두었다. 농장을 요새로 만든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모든 공격을 물리쳤다. 



형 나폴레옹과 완전히 다른 성격의 제롬 보나파트르입니다. 해군출신으로 미국에 자주 갔었고 결혼도 마음대로 해서 나폴레옹의 분노를 샀습니다. 강제이혼 후에 정략결혼과 프랑스 괴뢰왕정인 베스트팔렌왕이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의 능력에 대해 일체 인정하지 않았는데 워털루전투에서도 귀중한 병력을 데리고 우구몽농장에 집착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형과 달리 패전 후에도 살아남았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그의 자손은 주요 국가의 요직에서 활동했습니다.  


나폴레옹과 비슷한 자세인데도 너무나 다르죠?




전투초반, 약 40명의 프랑스군이 농장까지 진입했지만 영국군이 모두 죽였다. 프랑스군은 농장에 포화를 집중시키고 마굿간 등에 불을 질렀다. 그 안에 있던 부상병은 모두 불에 타죽었다. 

농장 주변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헨리 레인Henry Lane중령은 경기병Hussar돌격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음에 프랑스보병 방진을 공격했는데 방진에서 불과 몇 미터 앞까지 다가섰다. 우리는 돌파하지 못했고 당연히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병 2개 대대가 거의 전멸했다,’


연합군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우구몽을 끝까지 사수했고 워털루전투의 향방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영국군 프라이Frye소령은 6월 22일에 이렇게 회고했다.

‘과수원의 모든 나무가 총탄투성이였다. 곳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고 농원에서는 수천구의 시체를 태워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대학살현장이었다.’




라 에이 셍트농장 전투

라 에이 셍트농장은 높은 벽 안에 3개의 건물이 있고 양측면에 채소농장과 과수원이 있었다. 영국군은 문을 크게 보강했고 나무를 쓰러트려 장애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정확한 바커Baker소총을 무장했다. 

프랑스군이 돌파하지 못하자 네Ney원수가 직접 여단을 이끌고 공격해 농장의 마지막 방어선에 구멍을 냈다. 영국과 독일혼성부대에서 참전했던 조지 베어링George Baring소령이 농장의 방어를 지휘했다. 그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들은 우리를 거의 포위했고 이전의 어떤 프랑스부대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용기로 우리르 공격해왔다. 워낙 밀지대형으로 공격해왔기 때문에 우리 총탄은 거의 빗나가지 않았고 심지어 여러 명을 맞추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멈출 수 없었고 벽에 매달려서 우리 병사의 손에 들린 소총을 잡아 빼앗으려고 했다...

문을 둘러싼 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프랑스병사 17명이 쓰러져있었는데 그 뒤에 난입한 프랑스병사의 엄폐물이 되었을 정도였다.‘




베어링은 남은 병력을 살리기 위해 후퇴명령을 내렸다. 

‘같은 상황에 있어본 사람만이 후퇴명령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후퇴명령은 무질서한 도망으로 변했고 많은 병사들이 프랑스군의 총검에 쓰러지거나 포로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라 에이 셍트 디오라마 세트입니다. 


웰링턴도 ‘어둠 아니면 프로이센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며 거의 포기할 뻔 했다. 오후 4시,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이 플랑스누아Plancenoit와 파펠로트에서 프랑스군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웰링턴의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 오후 6시에 라 에이 셍트 농장이 함락되었다. 한 시간 후에 연합군은 황제근위대Imperial Guard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았다. 황제근위대는 나폴레옹이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는 최정예병력이었다.

나폴레옹은 근위대로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판단착오였다. 그는 이미 근위대 연대 여러 개를 프로이센군쪽으로 투입했었다. 그 병력이 있었다면 웰링턴을 밀어낼 수도 있었다. 황제근위대가 돌격하자 연합군의 포화가 쏟아졌고 근위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워털루전투를 시간대 별로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군은 뿔뿔이 흩어져 후퇴했다. 장 로슈 쿠아네Jean Roch Coignet대위는 이렇게 기록했다. ‘병사들을 진정시킬 방법이 없었다. 공포가 이미 지배하고 있었다.’ 

저녁 8시 15분, 나폴레옹은 총퇴각을 명령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 파리로 돌아가 6월 22일에 아들에게 권좌를 내주었다. 

워털루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웰링턴은 약 15,000명을 잃었고 블뤼허는 8,000명 정도를 잃었다. 나폴레옹은 거의 25,000명을 잃고 9,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웰링턴은 끔찍한 피해에 놀라 마지막 전투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 달 후에 나폴레옹은 대서양 한복판에 있는 세인트 헬레나St. Helena 섬으로 유배되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워털루전투에서 포탄에 가슴이 뚫린 프랑스 기병의 흉갑입니다. 프랑스 육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독일어 버전이기는 하지만 워털루 영화를 가장 좋은 화질로 즐길 수 있습니다. 중간부터의 전투장면만 즐겨도 됩니다. 




영어자막과 고화질은 

에서 보실 수 있는데 공유할 수 없어서 링크를 클릭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