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기병은 중기병과 경기병이 있었다. 1812년, 중기병은 기병총Carabinier연대 2개, 흉갑Cuirassier연대 14개, 용기병Dragoon연대 13개로 구성되었고 돌격Shock기병 역할을 했다. 대육군의 전열병과 마찬가지로 중기병은 적의 전열을 강습해서 분열시켰다. 용기병은 원래 말을 탄 보병이었기 때문에 정찰, 호송, 대게릴라작전 등의 추가 역할도 했다.
경기병은 후사르Hussar연대 11개, 엽기병chasseur à che vai연대 31개, 창기병chevauléger lancier연대 9개가 있었다. 경기병은 정찰이나 추격에 주로 투입되었고 치열한 전투에서는 주력기병 역할도 했다.
프랑스군의 모든 전열기병연대는 4개의 대대 (각 대대는 2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1개 중대는 보통 125기였기 때문에 1개 연대는 1,100기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 앞서 최대한 900기를 채우려 했지만 원정 기간 중에는 500기 이하로 줄어들었다.
위는 러시아 흉갑기병과 전투를 벌이는 프랑스 흉갑기병이고 아래는 프랑스 흉갑기병의 검입니다.
후사르는 뭐라 번역할 용어가 없어서 난감하군요. 아래는 후사르의 검입니다.
이 당시 용기병은 정체성이 무척 모호해졌습니다. 원래 말을 타고 승부처로 빠르게 이동하는 기동타격대 형식의 보병이었는데 기병의 한 종류로 자리잡았습니다.
기병은 기수와 군마 모두 키 제한이 있었다. 예를 들어 기병총과 흉갑기병은 최소한 175cm 이상이어야 했지만 용기병은 그 이하도 허용되었다. 군마는 5~8세로 기병총과 흉갑기병의 경우 키가 155cm 전후였다. 당연히 기병총기병과 흉갑기병 군마가 가장 비쌌다.
군마가 전투소음에 익숙해지도록 훈련시켜야 했다. 처음에는 군마가 마구간으로 가거나 마초를 먹을 때에 권총을 점차 자주 쏘아 총성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는 병사들이 무장을 갖추고 서 있다가 총을 발사하면 군마를 그 대열로 몰았다. 대열 앞까지 제대로 접근하면 먹이로 보상을 주었다.
첫번째 열의 기병은 돌격할 때에 검을 눈 높이의 1/3정도로, 날은 오른쪽으로 뽑아 들었고 두번째 열은 머리 바로 아래 높이로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장 중요한 훈련은 돌격이 실패했을 때에 바로 집결하는 것이었다. 대열이 흐트러진 기병은 무기력했기 때문에 바로 집결해야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용기병은 보병훈련도 받았다. 프랑스 용기병은 지형이 기병에 불리할 경우에 말에서 내려 보병역할을 했다. 1805년에는 군마가 부족했기 때문에 용기병 연대가 보병에 속하기도 했다.
행군 중에는 그 지역에서 마초를 구했고 부족한 양만 배급받았다.
1812년 당시 창기병을 제외한 나머지 기병은 사브르Saber검, 권총 두자루와 총신이 짧은 수석총으로 무장했다. 중기병은 경기병보다 총신이 더 짧았다. 경기병의 검은 반쯤 굽은 반면에 후사르의 검은 완전히 굽었고 중기병의 검은 직선이었다.
창기병은 검, 권총 한 자루와 긴 창으로 무장했고 하사관과 고참병은 창대신에 권총 두 자루와 수석총을 가졌다. 연대의 경우 228명이 창을 갖지 않았다.
흉갑기병과 기병총기병연대는 모두 흉갑을 갖췄다. 흉갑은 7kg이나 나갔기 때문에 말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흉갑부터 벗었다. 전투 중에는 검이나 총검은 물론이고 45보 밖에서는 총탄도 막았다. 기병총기병의 흉갑은 구리 재질로 방어력과 내구성이 많이 떨어졌다.
기병은 보병과 달리 연대별로 독특한 군복을 착용했고 입는 법도 서로 달랐다. 안장 양쪽에 가방을 매달았고 의료용품부터 말의 건초까지 다양하게 가지고 다녔다.
1812년 원정에 나설 때에, 프랑스포병은 보병포연대 9개(총 198개 중대), 기마포연대 6개(총 41개 중대), 수송대대 27개(총 162개 중대), 정비중대 18개, 부교Pontoon대대 4개, 대장장이중대 5개 등으로 구성되었다. 보병포중대는 장교 4명과 병사 110명이었고 기마포중대는 장교 4명에 96명이었다.
포중대는 포와 포수만 있었기 때문에 수송중대가 견인해주어야 했다. 수송중대는 장교 1명과 병사 140명이 있었다. 평상시 수송대대는 원대대만 유지하다가 전시가 되면 절반으로 나누어 대대를 늘리고 나머지 절반을 징집병으로 채웠다.
평시 포병은 요새에 주둔했고 포는 병기창에 보관했다. 12파운드포는 탄약마차가 3대였고 6파운드포는 2대였다. 나폴레옹은 1812년 원정에 나서면서 모든 포에 탄 200발을 준비시켰다.
위가 보병포대, 아래가 기마포대입니다.
1812년 프랑스포는 6년체계System of the Year XI에 따라 생산되었다. 마르몽Marmont이 제안한 이 체계는 혁명전의 그리보발Gribeauval체계를 대체했다. 그리보발체계는 4, 8, 12파운드 대포와 6, 8인치 곡사포를 사용했다.
6년체계는 6, 12파운드와 5.5인치 곡사포로 대체했다. 탄약생산과 사용을 단순화시키고 4와 8파운드 포의 역할을 6파운드 포(사진 참조)에게 맡겼다. 4파운드는 화력이 부족했고 8파운드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6파운드로 충분했다. 그리고 노획한 6파운드 탄약을 활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5.5인치 곡사포는 6, 8인치를 대체하기에 부족했지만 6인치의 탄약마차가 50발을 가지고 다닌 반면에 5.5인치는 75발을 운반할 수 있었다.
탄으로는 알탄Ball, 산탄Cannister, 폭탄Explosive shell을 사용했다. 산탄은 포 구경에 딱 맞는 금속깡통에 많은 금속탄을 집어 넣고 100보 이내의 보병에게 쏘았다. 50보 이내에서 발사하면 기병조차도 살아남지 못했다.
알탄은 볼링공처럼 전장을 튕겨 나가는 큰 금속제 공이었다. 최대 유효사거리는 1.2km였다.
폭탄은 알탄처럼 튕겨 나가다가 터지면서 파편을 사방에 날렸다. 불을 내기 때문에 공성전에서도 효과가 있었다.
50년 후인 미국남북전쟁 당시의 산탄과 그 효과입니다.
1812년 당시, 나폴레옹은 보병연대에 연대포 2문을 지급했고 각 사단은 말 한 마리와 6파운드 보병포를 받았다. 군단은 12파운드 보병포 2문을 받았다. 경기병사단은 기마포 1문을, 중기병사단은 2문을 받았다.
대육군의 프랑스와 이탈리아군은 12파운드 60문, 6파운드 214문, 곡사포 106문을 보유했고, 황제근위대까지 합치면 총 730문을 동원했다.
신병이 많은 연대는 사기를 올리기 위해 3파운드와 4파운드포를 지급했다. 포성은 아군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었고 부족한 화력을 보충했다. 그렇지만 흔한 오해와 달리, 프랑스군은 계획과 달리 연대포 전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포병을 지원하는 공병부대가 있었다. 대육군은 1812년 당시에 부교공병Pontoonier (그림 참조) 13개 중대가 있었고 중대원은 장교를 포함해 100명 정도였다. 각 중대는 개별적으로 육군 전체에 분산되어 있었다.
전투공병Sapper는 상당히 귀중한 존재였다. 총탄을 무릅쓰고 장애물을 제거하고 시가전에서 선두에 서서 전투를 벌였다. 사기와 존재감은 황제근위대의 척탄병 이상이었다. 자존심이 너무 과해서 대대뱃지와 곰가죽모자를 반납하라는 명령을 받아도 거부했다.
그리고 노역대대 몇 개가 있었다. 전투공병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주로 프랑스 징벌연대와 스페인 포로에서 편성되었다. 무기조차 제대로 주지 않아서 삽이 유일한 무장이었다.
공병부대는 자체 수송부대가 없었고 별도의 공병수송대대가 지원했다. 공병수송대대는 공성과 다른 공병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운반했다. 너무 다양한 물품을 운반했기 때문에 대대가 온갖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전투부대에 보급품을 수송하는 수송부대가 있었다. 특정 부대가 아니라 군전체의 보급체계를 조직한 지휘관은 나폴레옹이 처음이었다. 그는 2,016대의 마차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소형 말마차와 대형 소마차 수송대대를 별도로 편성했다.
러시아원정의 실패는 절대로 보급체계때문이 아니었다. 군단위가 자체보급한 경우는 2차대전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육군의 보급체계는 거의 말에 의존했는데 마차와 도로상태에 따라 보급여력이 달라졌다.
이제 황제근위대를 설명할 차례다. 혁명기에 나폴레옹의 개인경호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병력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백명이었다가 1814년에는 보병연대 30개, 기병연대 14개, 포병연대 2개, 기타 지원여단으로 크게 불어났다.
1812년 당시 황제근위대의 명성은 이후 200년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러시아원정에서도 위기를 돌파하는 정예군단 역할을 했다.
주로 프랑스인으로 편성되었지만 네덜란드(척탄병과 창기병), 이집트(맘루크 기병), 폴란드(창기병)출신 부대도 있었다.
이집트 원정 당시에 맘루크기병을 인상깊게 본 나폴레옹은 맘루크기병을 프랑스군에 편성했습니다. 처음과 달리 나중에는 프랑스인이 맘루크복장과 무장을 하는 것으로 변형되었습니다.
5년 이상 복무하고 전투에 2번 이상 참전해야 근위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당연히 특권도 누렸는데 근위대 척탄병은 일반전열부대 하사급여를, 하사는 상사급여를 받았다. 그리고 가장 좋은 장비를 가장 먼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