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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6부)

by uesgi2003 2020. 12. 26.

 

아편전쟁의 기원

1700년대 초반만 해도 영국에서는 차를 마시지 않았다. 1700년대 말이 되자 모든 사람이 차를 마셨다. 영국인은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 수입하는 모든 차를 다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전국민이 그랬다.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은 유럽물건에 관심이 없었고 1800년대 초반이 되자 영국은 중국에 매년 10억 달러를 지불해야 할 판이었다. 은과 금이 그대로 중국으로 유출되어서 국제수지적자가 심각해졌다. 

해결책은? 영국정부와 결탁한 동인도회사는 세계최대 마약거래상이 되기로 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막대한 양의 아편을 생산해서 중국으로 밀수해 차와 바꿨다. 아편수출량은 250배까지 늘어났다. 1839년에는 중국에 아편중독이 퍼져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중국황제는 나라를 무너트리는 아편거래를 막으려고 했고 정부관리는 광저우의 아편을 불태우고 영국인을 추방했다. 영국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차이상의 것을 원했다.

영국은 아편거래를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돌입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낙승을 거둬 중국에게서 70년간의 무역보장을 받아냈다. 
수 백만명의 중국인이 아편에 중독되어 영국의 차값을 내주었다. 

 


아편전쟁 배상으로 홍콩을 받아냈고 1999년까지 통치했다. 
신선한 차는 고가로 거래되었기 때문에 쾌속선Clipper이 대거 투입되었다. 쾌속선은 첫번째 차 수확을 대양을 건너 런던으로 빠르게 수송했다. 가장 유명한 쾌속선 중 하나가 커티 사크Cutty Sark로 453톤의 차를 싣고 중국에서 런던까지 100일만에 항해할 수 있었다. 

 




최초의 공중폭격

폭격기편대가 하늘에서 엄청난 폭탄을 떨어트리는 장면은 이상할 것이 없지만 1849년 3월만 해도 오스트리아 포병장교의 미친 생각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독립전쟁 중에 베니스Venice를 포위하고 있었다. 섬도시 주변의 습지대때문에 베니스의 저항을 무너트릴 중포를 배치하기 힘들었다. 우하티우스Uchatius중위는 전쟁의 역사를 바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트리면?

오스트리아군은 공중폭뢰편대Aerial Torpedo Squadron를 조직했다. 무인열기구 100개에 폭탄 100개를 장착하고 예정된 시간에 터지도록 도화선을 연결했다. 실험용 소형열기구를 띄워 속도와 방향을 측정해서 출발점과 도화선 길이를 미리 결정해두었다. 

 



몇 개월의 준비를 마치고 7월에 공격을 시작했다. 열기구 일부는 베니스 앞바다의 전함에서 띄웠는데 역사상 첫번째 항모역할이었다. 

역시나 시대를 너무 앞선 시도였다. 폭탄은 베니스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고 바람방향이 바뀌어 거꾸로 오스트리아진영으로 날아왔다. 공중폭격은 영원히 중단되었다. 

열기구폭격이 실패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중포를 견인해와 전통적인 방식으로 베니스를 포격했다. 베니스는 곧바로 항복했다. 

러시아군은 1812년에 처음으로 유인열기구 공중폭격을 시도했다. 알렉산드르Alexander 1세는 사람과 폭탄을 실을 수 있는 대형 열기구 제조를 명령했다. 나폴레옹 사령부 위에 띄워 폭격하려고 했다. 열기구 조종을 위해 지느러미를 달았지만 동작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포기했다. 

베니스 열기구는 원래 긴 구리선으로 조종하려고 했다. 전기배터리로 폭탄을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기술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미국의 낙타기병대

서부시대를 생각해보자. 기병이 말을 달려 구원에 나서는데… 말이 아니라 낙타를 탔다면? 미군이 실제로 테스트했었는데 결과가 좋았다면 아마 영화에 그런 장면이 등장했을 것 같다. 

1855년, 미전쟁상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는 의회를 설득해서 3만 달러로 군용낙타를 수입했다. 그는 미국 서부의 거친 사막과 황무지에서는 말과 노새보다는 낙타가 훨씬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다. 

중동에서 텍사스로 78마리의 낙타를 들여왔고 충분한 가치를 증명했다. 낙타부대는 등에 453kg의 짐을 싣고 물이 없어도 몇 주 동안 말보다 빨리 이동했고 다른 동물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거친 사막식물을 먹었다. 물론 단점도 상당했다. 너무 심한 냄새 때문에 말과 노새가 달아났고 침을 뱉고 물어뜯어서 병사들이 도저히 다루지 못했다. 

그렇지만 1858년에 신임전쟁상 존 플로이드John Floyd도 낙타를 1,000마리로 늘리자고 의회에 요청했는데 낙타부대로 인디안을 몰아낼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그렇지만 의회는 생각이 달랐다. 남과 북의 긴장으로 낙타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은 낙타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낙타기병대는 첫번째 혹을 넘어서지 못했다. 

낙타 혹은 물을 흡수해 저장하는 기름조직이다. 낙타는 보통 3일마다 물을 마시는데 한 번에 최대 110리터를 마신다. 물을 마시지 않고 10개월이나 버틴 낙타도 있었다고 한다. 

남북전쟁 후에, 남은 낙타는 매각했다. 결국 애리조나, 텍사스와 네바다에 방목했는데 야생낙타가 되었다. 야생낙타는 1905년 애리조나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전쟁상 제퍼슨 데이비스는 나중에 미국남부연맹 대통령이 되었는데, 낙타에 얼마나 심취했던지 프랑스어 책자를 영어로 번역했다. 

 

 




총알을 물다

150년 동안, 영국동인도회사는 영국군장교가 지휘하는 원주민병사(세포이Sepoy)로 인도를 지배했다. 1850년대, 영국군은 병사들에게 최신총기인 엔필드Enfield 소총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기대와 달리 역풍을 맞았다. 

 



구식 화승총대신에 지급된 엔필드는 원추형 미니Minie 총탄을 사용해서 사거리와 정확도가 크게 개선되었다. 총탄과 화약은 종이 카트리지에 포장했고 화약이 습기를 먹지 않도록 기름을 두텁게 발랐다. 소총에 장전하려면 이빨로 기름칠한 카트리지 끝을 뜯어내고 화약을 부어야 했다. 
이게 문제였다. 

세포이군 사이에 돼지와 소기름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카트리지를 물어 뜯으면 힌두교와 이슬람교 모두에게 불경스러운 짓이 되었다. 1857년 5월, 메에루트Meerut마을의 세포이군 85명이 신형소총을 거부했다. 그들은 중노동 10년형을 받았다. 종교박해로 받아들인 세포이군은 영국군장교를 죽이고 동료를 구출했다. 

그렇지 않아도 인도는 영국군에 대한 불만으로 들끓고 있었고 세포이군의 반란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인도군주와 농민이 혁명에 동참했다. 양쪽에서 수 천명이 죽었다. 

결국 영국정부는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인도를 직접 통치했다. 그렇지만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 세포이군의 반란은 100년 후에 인도독립의 씨앗을 심었다. 

세포이군은 Cawnpore칸푸르에서 영국군이 항복했는데도 가족까지 모조리 죽였다. 영국군은 도시를 탈환한 후에 바닥의 핏자국을 핥게 하고 목매달았다. 

영국군은 잔인하게 복수했다. 포로를 포구에 묶고 포를 쏘아 신체를 산산조각냈다. 악마의 바람Devil’s Wind라는 처형으로 사후세계 자체를 부인하는 잔인한 처형이었다. 

 



역사 속의 문화충돌이 그렇듯이, 세포이반란은 무지와 불신에서 일어났다. 영국군은 최신형 소총을 지급해 신뢰를 보였다고 믿었지만 세포이군은 기름칠한 카트리지로 기독교개종을 강요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