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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믿거나 말거나 토막전사 (8부)

by uesgi2003 2020. 12. 27.

 

 

링컨암살을 불러온 나비효과

1864년, 링컨대통령은 버지니아 리치몬드에 대한 과감한 기병습격을 직접 승인했다. 공식목표는 리치몬드 리비수용소에 갇힌 북군포로를 석방하고 대통령의 사면선언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4,000명의 북군기병은 강력한 저항을 만났고 리치몬드 근처도 가지 못했다. 그럴듯한 임무는 완전히 실패했다. 
대신에 참사를 불러왔다. 

 


후퇴하던 중에 우익을 맡던 율릭 달그렌Ulric Dahlgren이 남군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주머니에는 비공식 명령서가 있었는데, 남부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를 살해하고 리치몬드를 잿더미로 만들라는 명령이었다. 

북군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남부는 분노에 들끓었다. 리치몬드신문은 “악마무리의 마지막 습격”이라고 보도했다. 남군은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남부는 북부에서 비밀작전을 개시했다. 분노한 사람들이 다양한 음모를 시도했는데 남부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도 있고 개인적인 것도 있었다. 링컨대통령을 납치해서 몸값을 받아내려는 음모도 있었다. 존 윌크스 부스John Wilkes Booth라는 배우는 계획에 실패하자 4월 14일에 포드 극장에서 다른 음모를 시도했다. 

리치몬드 습격이 대통령의 암살을 불러왔다. 

 


달그렌 전사 후에 발견한 명령서가 실제인지 아니면 조작인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는데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문서가 실제이면 전쟁상 에드윈 스탠튼Edwin Stanton이 제퍼슨대통령 살해를 명령했지만 링컨은 그 사실을 몰랐다는 증거도 있다. 스탠튼은 남부지도자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리치몬드 습격을 지휘했던 저드슨 킬패트릭Judson Kilpatrick대령은 무모한 지휘 때문에 “죽음기병대”로 불렸다. 그는 대통령과 전쟁상의 명령을 직접 받았다. 

 

 




아일랜드인의 캐나다침공

18661년 6월 1일, 아일랜드-미국 국수주의자인 페니언Fenians군이 영국폭정에서 아일랜드를 해방시키겠다며 국경을 넘었다.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였다. 
아일랜드독립을 캐나다에서???

 


영국령의 주요 도시를 점령한 후에 영국과의 협상테이블에 아일랜드독립을 올릴 생각이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너무 터무니없는 목표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들은 미국쪽에서 캐나다를 침공하면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고 영국군이 아일랜드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다고 기대했다. 

남북전쟁 참전용사 800명이 버펄로Buffalo를 건너 온타리오Ontario를 공격했다. 제13 테네시 페니언연대, 제7 뉴욕연대, 제18 오하이오연대 출신이었다. 그들은 페니언깃발을 세우고 희망을 가졌다. 

캐나다자원병연대가 바로 대응에 나서 릿지웨이Ridgeway전투가 벌어졌다. 사기가 높았던 페니언이 총검을 앞세우고 돌격해 캐나다자원병을 격퇴했다. 첫번째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캐나다지원군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페니언은 미국국경으로 밀려났다가 미국정부에 바로 체포되었다. 버몬트Vermont에서 퀘벡Quebec으로 침공했던 다른 페니언군도 성공하지 못했다. 

 


뜬금없는 침공은 아일랜드가 아니라 캐나다를 뒤흔들었다. 캐나다 국수주의를 불러와서 지역정부를 통합했고 지금의 캐나다 연방국가가 탄생했다. 
아일랜드 독립은 50년을 더 기다려야했다. 

릿지웨이전투에서, 캐나다군은 10명 전사, 38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고 페니언군은 몇 명만 잃었다. 침공을 주도한 남북전쟁 기병출신 존 오닐John O’Neil대령은 1870년과 1871년 두 차례에 걸쳐 캐나다를 침공했다. 두번째는 더 참담하게 실패했다. 

 

 

 

 

씹는 검의 탄생

안또니오 로뻬스 데 산따 안나Antonio Lopez de Santa Anna는 서부의 나폴레옹이 되고 싶었다. 1836년에 알라모를 공격하고 수비대를 모두 죽인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멕시코 최고통치자로 4번이나 올랐다가 결국에는 추방당했다. 
그렇게 산따 안나는 뉴욕시민이 되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1869년, 75세의 독재자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살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에서 또 다시 집권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으고 있었고 사뽀디야Sapodilla나무에서 추출한 진액을 팔려고 했다. 토마스 아담스Thomas Adams라는 발명가를 만나, 진액을 저가의 고무대체재로 만들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득했고 아담스는 한 번 해보겠다고 동의했다. 

부자가 되려던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아담스는 진액으로 1년동안 실험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산따 안나는 멕시코로 돌아갔고 아담스는 가치가 없는 진액만 잔뜩 떠안았다. 이스트East강에 버리려고 하다가 근처 약국에 들렀고 한 소녀가 파라핀왁스로 만든 검을 사는 것을 보았다. 멕시코인들이 진액을 씹는 것이 기억난 그는 진액을 검으로 만들면 곤란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씹는 진액은 왁스보다 훨씬 뛰어났다. “아담스 뉴욕검 1호Adams New York Gum Number 1”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최초의 현대식 검이었고 지금 가판대 위에 올려진 모든 검의 원형이었다. 그리고 씹는 검 열풍을 몰아왔다. 
이렇게 해서 “알라모를 기억하라”는 모토가 사람들의 입안에 자리잡았다. 

 


마야원주민은 2천년 전에 진액을 씹기 시작했고 멕시코인은 그때부터 계속 진액을 씹었다. 산따 안나도 진액을 씹었었는데, 그래서 아담스가 아마도 진액을 고무대체재가 아니라 검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담스는 감초맛을 입힌 블랙잭Balckjack 등을 계속 내놓았고 그 중에 한 제품은 여전히 판매되고 있다. 치클렛Chiclets이다. 

 

 




더 일찍 시작될 뻔한 1차대전

1889년, 태평양 사모아Samoa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독일은 한 파벌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병해 상륙시켰다. 미국은 독일의 태평양진출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사모아에 3척의 전함을 급파해 먼저 가 있던 독일전함 3척을 감시했다. 양쪽의 긴장이 계속 고조되었다. 워싱턴과 베를린은 위협적인 메시지를 주고 받았는데, 미국은 분노했고 독일은 완강했다.

독일군이 사모아의 미국시민을 학대하고 미국기를 찢었다는 소식에 미국여론이 들끓었다. 샌프란시스코신문은 독일군이 미전함을 격침시켰다는 가짜뉴스를 보도했고 전쟁직전까지 치달었다. 사모아 상공에도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진짜 먹구름이었다. 

3월 19일, 강력한 태풍이 갑자기 섬을 덮쳤다. 엄청난 바람과 파도는 미국과 독일전함 6척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미군 50명과 독일군 95명이 죽었다. 나머지는 간신히 해변에 올라 피신했다. 

그렇지만 새옹지마라고 결정적인 순간에 닥친 자연재해로 미군과 독일군은 적대감을 내려놓고 구원과 복구에 매달렸다. 양국은 사모아를 공동보호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전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25년 후의 일이었다. 

전투를 벌일 뻔한 양쪽 장교들은 서로의 장례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독일전함 아들러Adler는 완전히 좌초했다가 회수하는데 성공했다. 다른 독일전함 에버Eber는 승무원이 대부분 죽었기 때문에 분해했다. 미국전함 반달리아Vandalia와 트렌튼Trenton은 전복해 침몰했다. 

 

 




도대체 내가 어느 편이야? 

아바나Havana항에서 전함 메인Maine이 침몰하자, 미국은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유명인이 고위장교로 참전하겠다고 나섰는데 해군차관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도 있었다. 그리고 영향력이 큰 의원 조 휠러Joe Wheeler도 있었다. 맥킨리McKinley대통령은 그를 자원병소장으로 임명했다. 휠러는 남북전쟁 당시에 장군으로 복무했었기 때문에 당연한 임명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미국을 상대로 싸웠었다. 

 

 

전함 메인이 아바나항에서 폭발해 침몰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는 내폭이었고 스페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노쇠한 제국 스페인입장에서는 미국의 탐욕이 이런 그림처럼 보였을겁니다. 

스페인은 당연히 상대가 안되었고 쿠바를 포기하고, 필리핀, 괌, 투에르토리코를 미국에 내주었습니다.

 


“싸움꾼 조Fighting Joe” 휠러는 남군기병으로 소장까지 진급했었다. 이제 그는 오래된 회색군복을 새로운 청색군복으로 바꿔 입고 한때 원수였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휠러는 작은 체구의 싸움꾼이었다. 루즈벨트는 그를 “전형적인 싸움닭”이라고 불렀다. 뼛속까지 호전적인 그는 “양키… 제길, 스페인놈들”을 가장 먼저 상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마치 남북전쟁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산후안San Juan힐전투에서는 병사들에게 “얘들아. 돌격이다!”라고 외쳤다. “양키놈들을 다시 달아나게 만들자.”

 


휠러를 임명해서 남북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시켰고 나라가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휠러는 26세에 남군장군이 되었고 다시 61세에 미군장군으로 복귀했다. 그가 쿠바에서 지휘한 부대 중 하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러프 라이더스Rough Riders였다. 

휠러는 전후에도 군에 남았다. 1902년, 남부장군 출신의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가 웨스트 포인트를 방문했을 때에 정복차림의 휠러를 비꼬았다. 그는 주발 얼리Jubal Early를 떠올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보다 나 먼저 데려가셨으면 하오. 그래야 지옥문 앞에 있는 주발 얼리가 청색군복의 당신을 저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깐”이라고 말했다. 
휠러는 1906년에 죽었고 알링컨국립묘지에 매장되었다. 그곳에 묻힌 남군장성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마커스 조셉 라이트Marcus Joseph Wright인데 입장이 좀 다른 것이, 알링턴에서 남군묘역에 묻혔습니다. 알링턴 국립묘지는 당시 반란군이었던 남군을 매장할 수 없다고 합니다. 

 




두 장군 이야기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군복은 입은 사람 중에서 가장 재능있고,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의 뛰어난 성과로 역대 최고의 지휘관으로 인정받았다.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력을 가진 장군이 한 명 더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처럼, 그는 태평양에서 명성을 쌓았다. 더글러스 맥아더처럼, 필리핀에서 전공을 세워 미국을 흥분시켰다. 그리고 더글러스 맥아더처럼, 대통령이 명령불복종으로 해임시켜 귀국시켰고 논란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의회가 명예훈장 대상으로 인정했지만 10년 후에야 받을 수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력과 이 전쟁영웅의 경력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니? 우연의 일치였을까?
절대로 아니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인 아더 맥아더였다.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유산과 명성을 좆았다. 

 


“아더 맥아더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이기주의자였다. 아들인 더글라스 맥아더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아더 맥아더의 부관, 이노크 크로우더Enoch Crowder대령

두 사람의 자아는 절대로 민간인 상관에 복종하지 않았다. 맥킨리대통령이 필리핀총독을 임명하자, 당시 군총독이었던 아더 맥아더는 “비합법적인 개입”이라고 반발했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대통령의 해임결정에 미국역사상 가장 “추한 음모”중 하나라고 비난했다. 

아더 맥아더는 남북전쟁, 인디언전쟁, 스페인-미국전쟁에 참전했고 아들 더글라스는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두 사람을 합치면 미전사 100년이 된다. 

1944년 필리핀탈환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가 상륙할 때에 상륙정을 묶어 두지 않아서 새로 세탁하고 다린 군복을 적셔야 했다. 맥아더는 화가 났지만 찍힌 사진을 보고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느꼈다. 이튿날 그는 홍보영화를 위해 다시 한 번 상륙장면을 재현했다. 

 

두 사진의 장소와 시기는 다르지만, 어쨌든 이런 장면을 무척 즐긴 것으로 보입니다.

사진홍보를 무척 즐겼던 쌍벽 중 다른 한명은 사막의 여우 롬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