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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영국의 왕권이 결정된 타우턴 전투 (장미전쟁의 결정판)

by uesgi2003 2014. 1. 30.


오래간만에 전사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영국의 장미전쟁, 붉은 장미 문장의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 문장(그림 참조)의 요크 가문이 왕위를 놓고 벌여 결국 튜더 왕조를 열었던 내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타우턴Towton 전투입니다. 





어떤 나라 또는 시대의 역사를 통사형식으로 장편정리하면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겠지만 저도 지루하고 그 당시나 지역에 관심이 없는 방문객은 한동안 제 서재를 멀리하게 되는 단점이 있습니다. 꾸준하지 못하고 쉽게 싫증을 느끼는 제 성격이 무엇보다 문제입니다. 그래서 처음 제 서재를 공유하기로 했을 때부터 자유롭게 지역과 시대를 옮겨다니겠다고 양해를 구했었습니다. 


헨디 6세와 에드워드 4세의 군대는 1461년 3월 29일에 타우턴에서 대회전을 벌였고 한 가문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1453년 7월의 어느 더운 날, 더르도뉴Dordogne 강변에는 스루스버리Shrewsburry 공 존 탈보트Talbort (당시 70세), 아들과 수 천 명의 병사가 시체로 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까스티용에서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 영국의 장궁병이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대포가 불을 뿜으며 프랑스 용병이 영국 침략군을 전장에서 몰아내고 있었다. 프랑스 영토에서 울려퍼진 포성은 향후 30년 동안 계속된 영국내전의 전주곡이 되었다. 


나중에 윌리암 세익스피어가 장미전쟁이라고 로맨틱한 이름을 잘못 붙인 내전(그림 참조. 랭카스터 가문은 처음부터 붉은 장미 문장을 사용하지 않았고 요크 가문이 흰 장미 문장을 사용하자 대응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은 랭카스터Lancaster 공 헨리 볼링브로크Bolingbroke가 리차드 3세를 1402년에 몰아내고 헨리4세로 즉위하면서 불씨를 놓았다. 헨리 5세는 무자비하고 공격적인 군주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명성을 높였고 프랑스 왕좌에 올라서기 직전인 1422년에 이질로 급사했다. 그의 아들 헨리 6세는 경건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암투와 공작으로 얽힌 궁전생활에 어울리지 않았다. 섭정위원회가 1436년까지 헨리를 대신해서 통치했고 백년전쟁은 프랑스의 반격에 몰려 궁지에 몰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영국은 불충과 파벌이 일반적이었고 노포크Norfolk와 서포크Suffolk 가문이 공개적으로 분쟁을 일으켰다. 데본 Devon은 윌크셔Wiltshire 가문과 전쟁을 벌였고 퍼시스Percies는 네빌스Nevilles 가문과 충돌했다. 1450년, 켄트Kent에서는 잭 케이드Cade가 이끄는 반란군이 런던을 습격해서 왕정을 무너트렸다. 무정부 상태가 된 왕국을 구원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쫓겨가 있던 요크 공 리차드를 불어들여야 했다. 왕정의 프랑스 원정에 막대한 지분을 지출했는데도 보상을 받지 못했던 요크 가문은 이 기회를 노려 블랙히쓰Blackheath에서 왕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가 휴전을 맺으면서 본격적인 내전을 뒤로 미뤘다.



장미전쟁 당시의 두 가문의 가계도입니다. 에드워드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 헷갈립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1453년, 현실감각이 없는 헨리(그림 참조)는 요크의 리차드를 갑작스럽게 섭정으로 앉혔지만, 왕비였던 앙주의 마가렛이 소머셋 공 에드문드 뷰포트Beaufort(정부로 의심받던)와 함께 리차드에게 맞섰고 리차드는 런던탑에 뷰포트를 감금시켰다. 

1455년 초, 이성을 되찾은 헨리는 뷰포트를 탑에서 석방시켰다. 리차드는 지원군을 모으기 위해 런던을 떠났다. 5월 22일, 요크군은 성 알반스Albans 거리에서 왕당파와 전투를 벌였다. 이렇게 시작된 장비전쟁의 첫 번째 전투에서, 600명의 요크 병사가 마을 벽에 구멍을 내고 침입해 왕당파를 공격했고 뷰포트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리차드는 마을광장에서 헨리 6세를 포로로 잡았지만 충성을 다짐하며 런던으로 데리고 갔다. 


리차드가 실제로 영국을 통치하면서 반 년 동안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다. 꼭두각시가 된 왕은 리차드의 말을 따랐지만 왕비 마가렛은 아들 에드워드가 이어받을 왕위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요크 가문에 대항할 세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잃은 존 뷰포트 그리고 퍼시스 가문에 적대적인 네빌스 가문이 마가렛 진영에 합류했다. 

1456년 1월, 헨리 왕은 리차드를 해임시킨 후에 의회에서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밝혔다. 요크와 솔즈베리Salisbury 가문은 영지로 물러났고 워윅 가문은 프랑스 칼레로 달아났다. 



우유부단한 헨리 6세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왕당파를 이끌었던 앙주의 마가렛 왕비입니다. 결국 요크 가문에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다가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도움으로 고향에 귀국합니다. 백년전쟁 직후라 프랑스에는 아직 영국의 귀족영지가 많았습니다.


1459년 9월 29일, 왕당군이 솔즈베리군을 기습했지만 불리한 상태에서도 요크당 군은 승리를 거뒀고 2,000명의 왕당군을 죽였다. 그렇지만 이후에 로드로우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요크당 군 일부가 왕당군으로 변절하면서 리차드는 아일랜드로 달아났고 솔즈베리, 워윅 가문과 리차드의 맏아들 에드워드는 프랑스 칼레로 물러났다. 

요크당이 와해되었다고 해도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워익 가문은 영국해협 건너에서 계속 위협을 했고 1460년 6월이 되자 샌드위치Sandwich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병력을 늘린 워익과 솔즈베리 가문은 수도를 향해 진군했고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한 헨리는 남쪽으로 달아나다가 요크당에게 다시 포로로 붙잡혔다. 


영국으로 귀환한 리차드는 10월 10일에 다시 통치를 시작했고 왕위계승법Act of Settlement를 만들어서 웨일스 공 에드워드(헨리의 아들로, 리차드의 아들도 공교롭게 에드워드)는 왕위계승에서 제외시키고 요크 가문이 헨리의 왕위를 물려받게 했다. 왕비 마가렛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북쪽으로 달아난 그녀는 다시 지원세력을 모았다. 요크당 군이 그녀를 추격하다가 웨이크필드 부근의 샌들Sandal 성에서 크리스마스 휴식을 취했다. 12월 30일, 공격을 받은 리차드는 성을 나섰다가 전사했고 솔즈베리 공도 포로로 잡혔다. 로버트 아스폴Aspall이 명령을 받고 리차드의 어린 아들 에드먼드를 피신시켰지만 존 클릭포드가 추격에 나서 이들을 포로로 잡았다. 클리포드는 두 사람을 죽이면서 "너희가 그랬듯이 나도 너희와 가문을 모두 죽일테다"라고 말했다. 

리차드, 솔즈베리, 에드먼드의 머리는 성벽 위에 효수되었고 마가렛은 (아직 잡히지 않은) 마치March와 워윅 공의 머리를 효수할 방을 비워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마치 공, 에드워드(그림 참조)는 아버지의 전사소식을 솔즈베리 영지에서 들었다. 아직 10대였던 그는 위대한 지휘관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윌트셔와 펨브로크 공이 웨일즈를 지나 접근 중이라는 정보를 받은 그는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1461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에서 왕당군을 격파하고 3,000명을 죽였다. 

마가렛은 남진해서 2월 16일에는 던스터블에 도착했다. 남부에서 병력을 모은 워윅 공은 이전에 승리를 거뒀던 세인트 알반스에서 왕비의 군대와 결전을 치루기로 했다. 그렇지만 그의 희망과 달리, 세인트 알반스 2차전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았다. 왕당 군은 요크당 군이 미처 전열을 갖추기 전에 배후에서 공격했고 포로신세의 헨리 왕을 구출해냈다. 



에드워드는 사촌의 실패에 크게 실망했다. 반면에 마가렛은 24살의 유능한 존 뷰포트 그리고 베테랑 트롤로프Trollope가 있었다. 런던 의회는 헨리 6세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성문을 열지 않았고 시종일관 우유부단했던 왕은 무력입성을 포기해서 왕당파의 상황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마가렛이 입성하기 위해 협상을 벌이던 도중에 에드워드가 옥스포드 근처에서 워윅과 합류했고 런던으로 진군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2월 26일, 왕당 군은 에르Aire 강 북쪽에 방어선을 펼치고 북쪽에서 증원군을 받을 생각으로 후퇴를 했다. 


워윅은 군 지휘관으로는 부족했지만 정치와 외교에는 능숙했고 엄청난 부자인데다가 대중적인 인기도 높았다. 요크당을 배후에서 지원하던 그는 이제 에드워드와 함께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이제는 헨리 왕을 악의 무리에게서 구출하겠다는 허울도 벗어던졌다. 

3월 4일, 에드워드는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로 가서 에드워드 4세로 왕위를 주장했다. 워윅은 킹 메이커로 불렸다. 

에드워드 4세는 19살의 나이답게 평소에는 나태하다가도 전장에서는 대단한 무용을 자랑했다. 그는 위기에 몰려도 냉정했고 지휘관으로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 


스스로 만들었든 아니면 왕당 군이 내주었든, 주도권을 갖게 된 에드워드는 워윅의 병력과 합류한 후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노포크 공 존 모우브리Mowbry를 동부지역에 보내 지원군을 모집했고 워익은 미들랜드Midlands로 보내 병력을 모았다. 3월 11일, 삼촌인 포콘버그Fauconberg가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먼저 북진했고 에드워드는 이틀 후에 그 뒤를 따랐다. 

왕비 마가렛, 에드워드 왕자와 뷰포트는 헨리 왕과 떨어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트롤로프를 포함한 왕당파의 유력인사 그리고 약 40,000명의 왕당 군이 에르 강 뒤편의 타우턴과 색스턴 마을 중간의 완만한 평원에 집결했다.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는 병력을 이끌고 바로 트렌트를 건넜지만 노포크의 동부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노포크 공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에드워드는 돈 강을 건넜고 춥고 눈발이 강하게 날리는 3월 27일에 페리브릿지로 접근했다. 에르 강을 건너려면 다리를 확보해야 했고 에드워드가 보낸 피츠왈터Fitzwalter는 왕당 군이 부순 다리를 하루 만에 보수했다. 

그는 다리를 확보했고 적의 동태가 조용한 것에 안심해서 북쪽 강변에 숙영지를 마련했다. 왕당 군의 클리포드는 500명의 병사와 함께 새벽에 기습을 했고 피츠왈터와 워윅의 이복형제 리차드 제니가 전사했다. 



오른쪽이 기습을 하는 왕당 군입니다. 가장 오른쪽은 클리포드 경으로 와이번 문장을 사용했습니다. 왼쪽의 궁수는 보통 기병의 말을 함께 타고 다니다가 전투에서 지원사격을 합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워윅은 다리에 부상을 입고 돌아와 에드워드에게 패배를 알렸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당황하지 않고 워윅을 페리브릿지로 보내 반격하게 했다. 워윅이 클리포드를 붙잡아두자, 포콘버그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에르 강 상류로 몰래 도강한 후에 클리포드의 측면을 공격했다. 왕당 군의 주력부대는 전방의 상황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클리포드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다. 

클리포드는 전투를 벌이며 조금씩 뒤로 물러나다가 목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의 7살 먹은 아들은 살아남아서 50년 후에 플로든 전투에 참가했다. 

뷰포트는 클리포드를 구원하지 않은데다가 요크 군의 늘어진 행군대열을 공격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다리를 다시 확보한 것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전투를 벌이지 않을 생각으로 주력을 상류로 돌려 삼촌의 병력과 합류할 생각이었다.



타우턴 전투 이전까지 양 진영의 장군 멍군 전황입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어둠이 내리자 요크 군의 선봉은 섹스턴Saxton까지 올라갔지만 나머지는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수송마차는 페리브리지에 남겨두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식사도 못하고 엄폐물도 없었다. 들판에 있던 양 진영은 얼어붙는 눈보라 속에서 잠시도 긴장을 풀지 못했는데 두 진영의 거리는 1km 밖에 안되었다. 


(자세한 지형설명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양쪽 진영이 강 옆의 언덕에 대치했다는 정도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전장의 사진은 아래와 같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치했을 겁니다. 



에드워드는 성급하게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그의 군대는 아직 대열을 갖추지 못했고 노포크의 병력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력이 크게 모자랐다. 

결전이 벌어진 날은 종려주일Palm Sunday여서 양쪽에서는 목회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신앙심과 미신이 병사들의 마음을 휘어잡던 시기라 신의 응원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종교에 의지했다. 

포콘버그가 중앙에, 워윅과 에드워드가 우익과 좌익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당 군(랭카스터파)에서는 뷰포트와 엑세터Exeter 공이 우익을, 국왕기를 들었던 노텀버랜드Nothrumberland와 트롤로프가 중앙을, 데이크리Dacre가 좌익을 맡았다. 

오전 10시, 요크 군이 산등성이를 따라 전투를 시작하면서 눈발이 왕당 군의 얼굴로 강하게 몰아쳤다. 


전투경험이 많은 포콘버그는 자연이 선물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양 옆에 있던 궁수들을 훨씬 앞으로 전진시켰다. 궁병은 바람에 화살을 실어 날려보냈고 왕당 군의 측면에 있던 병사들이 쓰러졌다. 왕당 군 궁수도 지지않고 사격을 해댔지만 맞바람때문에 화살은 요크 군 진영까지 날아가지 못했다. 지휘관이 사격을 중단시켜야 했지만 지휘체계의 문제였는지 아니면 미처 신경쓰지 못했는지 사격을 중지시키지 않았고 왕당 군의 궁병부대는 무의미하게 화살을 바닥냈다. 



그래함 터너Graham Turner라는 분의 타우턴 전투 그림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사용된 정교한 그림은 모두 그 분의 작품입니다. 


포콘버그는 다시 한 번 궁수를 전진시켜서 일제사격을 퍼부었고 대단한 효과를 냈다. 많은 왕당 군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고 뷰포트는 전진할 수 밖에 없었다. "헨리 왕을 위해!"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왕당 군이 달려나갔고 요크 군의 화살은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숫자가 많았던 왕당 군은 화살세례를 맞아가며 요크 군의 대열에 달려들었고 포콘버그는 그제서야 궁수를 뒤로 돌려 활을 칼이나 도끼로 바꾸게 하고 예비병력을 활용했다. 그리고 그의 부대가 격전의 장소가 되었다. 

에드워드는 말에서 내리며 병사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외쳤다. 

캐슬 숲에 숨어 있던 왕당 군이 갑자기 공격해왔고 대열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에드워드는 예비병력을 투입시켜 막았다. 


타우턴 전투의 전황지도입니다. 클릭하면 커지니까 자세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왕당 군은 조금씩 압력을 높였고 에드워드의 부대는 거의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그렇지만 에드워드는 병사들 틈을 누비며 대열이 무너지지 않게 막았고 그의 큰 키는 쉽게 눈에 띄였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난전에 뛰어들었던 에드워드는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웰시맨Welshman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고, 전투 후에 그를 기수로 임명하고 영지를 하사했다.  웰시맨의 문장에는 이렇게 타우턴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었다. 


전사자가 늘어가고 날씨는 더욱 험악해졌다. 양쪽은 잠시 휴전하기로 합의하고 전장에서 시체와 부상자를 치운 후에 다시 전투를 재개하기로 했다. 왕당 군의 좌익을 지휘하던 데이크리 경은 물을 마시려고 투구를 벗었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그렇지만 정오까지, 숫자가 크게 부족했던 요크 군은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고 노덤벌랜드가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역사는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승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하던 순간, 눈발 사이로 희미하게 노포크의 부대기가 보였다. 그는 3월 28일 저녁에 병에 걸려 쓰러졌지만 29일에 에르 강을 건넜고 결정적인 순간에 요크 군의 우익에 나타났다 (그는 11월에 병사했습니다.) 좌익이 위협을 받자, 뷰포트는 중앙과 우익에서 병력을 빼내야 했고 에드워드는 결정적인 붕괴직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달려오느라 지치기는 했어도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노포크의 부대가 밀어붙이자 왕당 군의 대열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타우턴 부근에서 중앙과 좌익의 진형이 무너졌고 깃발을 중심으로 소규모 부대로 쪼개졌다. 사기가 떨어진 왕당 군은 칵Cock 강을 향해 달아났고 요크 군은 놓치지 않으려고 추격했다. 블러디 메도우와 그 부근은 학살의 처형장이 되었다. 살아남아 강물에 뛰어든 병사들은 갑옷이나 두터운 솜옷때문에 익사하고 말았다(그림 참조). 



전사자로 강에는 다리가 만들어졌고 왕당 군은 강을 건너 태드캐스터Tadcaster까지 달아났지만 요크 군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요크York의 성벽까지 병사들의 시체가 이어졌다(그림 참조). 헨리, 왕비와 얼마 안되는 귀족은 노덤벌랜드로 달아났다가 왕비만 프랑스 왕의 도움을 바라며 프랑스로 건너갔다. 헨리는 에드워드 왕의 포로로 여생을 보냈다. 

뷰포트와 엑세터는 무사히 달아났지만 나머지 귀족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클리포드, 데이크리와 노덤벌랜드 공이 목숨을 잃었고 포로로 잡힌 귀족의 목이 에드워드의 아버지 목 대신에 효수되었다. 



타우턴에서 죽은 병사의 숫자는 정확하지 않지만 20,000~37,000명으로 기록되어 왔는데 아마도 왕당 군이 12,000~15,000명 전사 그리고 요크 군은 5,000명 정도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타우턴 전투 후에 에드워드의 왕좌는 확실해졌지만, 노덤벌랜드의 저항이 계속되어 그 이후에도 3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다. 



1671년 5월 4일에 벌어진 투크스베리Tewksbury 전투입니다. 이 전투로 내전은 끝나고 왕당 군의 에드워드(헨리의 아들)이 죽으면서 에드워드 4세의 왕권이 확정됩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렇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에드워드 4세가 젊은 나이에 1483년 병사를 하자 왕위계승 다툼이 재연되었고 리차드 3세가 즉위했지만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가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 요크와 결혼한 후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리차드를 몰아냈고 1483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헨리 7세로 튜더왕조를 열었다.

결국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두 왕족은 '수지어사 사마소(誰知止於司馬昭)'의 중국 역사를 따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타우턴 전투를 재미있게 재현한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