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증거자료가 되는 마티즈가 사망 하루 후에 폐차 의뢰되었고 그 상대도 타이어가게 사장이라는군요. 나중에 정권이 바뀌어야 몇 가지 굵직한 의혹과 함께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지금과 같다면 정권이 바뀔 일도 없고 이런 저런 일은 그냥 잊혀져가겠죠.
스탈린의 좌절, 이지움 포켓(1942) - 2부
1,000,000명과 2,000대의 전차가 집결하고 있는데도 양쪽의 정보망은 황당할 정도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고 어느 쪽도 상대의 준비를 알아채지 못했다. 소련군 입장에서는 독일군의 수송문제덕분에 선공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5월 12일, 고로드냔스키와 봅킨집단군은 하이츠의 8군군단을 맹렬한 기세로 덮쳤다. 포탄이 적진을 두들긴 후에 보병이 전진했다. 독일과 헝가리 병사는 참호 안에 엎드려 있다가 소련군의 끔찍한 ‘우라Urra!’ 고함을 들었다. 주요 방어거점에 병력을 배치하기도 전에 소련군이 밀려 들어왔다.
다행히 첫 번째 공격을 막아냈다고 해도 소련군 전차와 보병의 이차 공격을 받았다. 랴비셉의 28군도 북쪽에서 볼찬스크 돌출부에서 홀리트의 17군군단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파울루스 사령부는 공황상태 그 자체였다. 전방부대에서 쉴 새 없이 적의 전차와 보병공격보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몇 개월 전에 소련군의 공격에 속절없이 밀려났던 상황이 다시 반복되었다. 일부는 고립된 상태로 필사적인 저항을 했고 일부는 전투후퇴를 하며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고 있었지만 조금만 옆을 노출시키면 소련군이 사냥개처럼 달려들 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파울루스의 지도에는 큰 구멍이 생겨났다. 티모센코의 전진을 알리는 화살표는 하르코프를 움켜쥐려는 해골의 손처럼 보였다. 파울루스와 폰 보크는 협의 끝에 조급한 반격을 자제하고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비와 먹구름 때문에 항공정찰을 할 수 없었고 폰 보크는 예비전력을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하고 싶었다.
파울루스는 망설였지만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하르코프를 절대로 내줄 수 없었기 때문에 후방에서 병력을 긁어 모아 하르코프 앞에 배치시켰다. 후퇴하는 부대에게도 방어거점을 만들고 앞으로 내달리는 적의 옆구리와 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최고사령부에서도 적의 공격보고를 받았지만 소련군의 대대적인 반격이 아닌 국지전이라고 판단했다. 할더는 일기에 “적이 이지움과 볼찬스크에 100대씩의 전차를 동원해 초반에 성공하고 있다”라고 기록했다. 크림반도의 공군이 하르코프 방면으로 이동하고 23기갑사단도 재정비를 중단하고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거의 모든 참모가 이지움 돌출부에만 신경쓰고 볼찬스크 돌출부의 공격은 교란작전으로 생각했는데 294보병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하르코프 북부가 그대로 뚫릴 판이었다. 294사단의 왼쪽에 있던 79사단은 “적이 T-34와 KV-1으로 우익을 공격했는데 우리의 대전차무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보고했다.
공격 첫날 28군은 26km를 전진했다.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데 동부전선에서 실제로는 소련군의 전차전력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전쟁초반 KV-1은 물론이고 T-34를 막을 대전차무기가 변변치 않았는데 그 중 믿을만한 50mm Pak 38조차도 1km 밖에서 40mm의 관통력밖에 안되어서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철갑탄을 쓰고도 말입니다.
폰 보크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듯이 공군의 지원없이 반격하지 말라며 주의를 당부했었다. 폴타바 사령부로 전방의 보고가 계속 들어오자 6군이 아예 궤멸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련군의 이지움과 볼찬스크 방면 공격이 방어선 후방 깊숙이까지 침투했고 이제 남부전선 전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6군의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반면에 파울루스의 무경험과 무능력은 점점 더 두드러졌다. 참모였을 때에는 상황의 위기와 기회를 분석하고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제시해서 지휘관의 판단을 돕는 역할이었지만 자신이 결정하는 자리에서는 우유부단했다.
참모의 조언에 따라 일단 반격으로 적의 진격속도를 늦추기로 한 다음에는 분명한 결정이 없었다. 어떤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하르코프를 방어할 것인지, 제2 전선으로 전면적인 후퇴를 해서 포위망에서 벗어날 것인지에 대해 고민만 하고 있었다.
파울루스만 비난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빴다. 기존의 방어선을 고수하면 하르코프 부근에서 포위되어 전멸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후퇴를 하면 하르코프를 잃어 스탈린그라드 공격계획이 모두 원점으로 돌아갔다. 파울루스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소련군도 우유부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티모센코는 초반의 성공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13일에 독일군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예비전력을 모두 투입하지 않고 머뭇거리다가 흘려 보냈다. 독일군 16개 대대가 사라졌는데도 소련 첩보부대는 적이 남서전선의 남쪽 측면에 전차와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고 보고했다.
티모센코는 예비전력뿐만 아니라 남부전선에서 빌리기로 한 기동전력까지도 있지도 않는 독일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고로드냔스키와 봅킨은 티모센코가 예비군을 투입해 지원할 것으로 기대하고 병력을 마구 전진시켰다. 겨울전투에서와 같이 독일군의 방어거점을 그대로 통과해 계획된 목표지점으로 달려갔다. 랴비셉도 만신창이가 된 294사단을 하르코프쪽으로 밀어내며 계속 전진했다.
5월 13일, 할더도 6군이 남과 북동쪽에서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다며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폰 보크 사령부에서도 6군의 운명이 우선이기 때문에 계획한 프리데리쿠스 작전을 취소했다. 14일 오후 폰 보크는 히틀러에게 전화해서 “6군의 우익 상황이 안 좋습니다. 볼찬스크 방면은 공군덕분에 상황이 호전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며 3전차군단과 1전차군을 북쪽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히틀러는 이지움 방향으로 공격해 적을 차단하라고 승인했고 이지움 돌출부의 목을 끊고 소련군을 자루 안에 넣는 프리데리쿠스 작전의 수정안이 만들어졌다.
5월 15일, 소련군은 독일군의 미미한 저항을 뚫고 크라노스그라드Kranosgrad와 타란놉카Taranovka를 탈환했다. 28군의 선봉대는 하르코프를 20km 앞두고 3과 23전차사단 선봉대의 반격을 받아 멈췄다. 16일에는 정찰병력이 폴타바에 있는 폰 보크 사령부 40km 앞까지 진출했다.
티모센코는 믿을 수 없게도 기동예비전력을 제자리에 두고 있었다. 만약 독일지휘관이었다면 13일에 만든 거대한 구멍으로 예비군을 투입해 전체전선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티모센코는 하루를 더 지켜 본 후에 모든 예비병력을 투입할 생각이었지만 그 때는 이미 상황이 반전된 후였다.
티모센코가 망설이는 동안, 폰 클라이스von Kleist의 병력이 북쪽으로 급히 이동했다. 16과 14기갑사단이 선봉에 섰고 60기계화보병사단, 1산악사단과 100경보병사단이 그 뒤를 따랐다. 16일 저녁이 되자 기갑사단이 17군의 좌익에 합류했고 클라이스트는 기갑사단 2개, 보병사단 8개, 기계화사단 1개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17일 새벽, 독일군이 소련의 돌출부 남쪽 측면을 공격했다. 16전차사단이 앞장서서 소련의 9와 57군 보병을 밀어내고 소련군 전차부대를 찾아 전진했다. 후방에 있던 전차 대부분은 경전차였고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방어력과 공격력이 우수한 T-34나 KV-1을 만나더라도 거리를 좁혀 대등한 상태로 상대했다.
독일군은 다른 장점이 있었다. 소련군은 지휘전차만 무전기를 갖추고 교신할 수 있었고 다른 전차는 수신호나 깃발로 명령을 전달받아야 했는데 교전 중에는 그것도 아예 불가능했다. 독일군은 지휘전차부터 부순 후에 어쩔 줄 모르는 나머지 전차를 무리 지어 사냥했다.
독일전차가 소련군 전차부대를 궤멸시키는 동안 보병도 소련군 전선을 돌파했다. 중화기가 부족했던 보병부대는 20mm 대공포(사진 참조)를 소대 별로 배치해서 소련군을 제압했고 필요할 때마다 포병과 공군의 응원이 이어졌다.
소련군은 이전과 달리 용감하게 싸웠지만 잘 준비된 독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녁이 되자 독일군 선봉대가 도네츠 강변에 이르렀는데 반격 첫 날에 40km를 돌파했다. 하르코프 북쪽의 3과 27전차사단 병력이 증원되면서 28군을 밀어내고 포위망에 갇힌 소련군은 보병과 함께 청소했다.
티모센코는 이제 위기를 직감했다. 기동전력을 이제야 투입하기 시작했지만 개별부대가 차례로 전장에 들어섰기 때문에 독일군에게는 더없이 좋은 상대가 되었고 독일전차는 소련군 후방을 마음껏 유린했다.
티모센코는 모스크바로 간곡히 증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절대로 후퇴하지 말라는 명령만 받았다.
5월 18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독일군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크림반도에서 이제 막 도착한 수투카Stuka 급강하폭격기와 고고도폭격기가 소련군 후방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티모센코는 21과 23전차군단을 투입했지만 전선에 도착하기도 전에 공습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늘에서 소련군 전투기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전폭기에게는 더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57과 9군은 뒤로 계속 밀려났고 독일전차와 기계화부대의 추격을 받았다. 폰 후베의 16전차사단 중 일부가 떨어져 나와 달아나는 소련군 사이를 뚫고 도네츠키Donetskiy에 이르렀다. 이곳은 도네츠강을 도강할 수 있는 요충지였고 몇 시간 뒤에는 나머지 부대가 이지움 외곽을 공격했다.
소련군 돌출부의 남쪽 측면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티모센코는 5기병군단과 보병사단에게 반격을 명령했지만 다시 한 번 포격과 공습에 학살당했다. 반격은 거의 소용이 없었다. 저녁이 되자 17군의 101경보병사단과 257보병사단이 도네츠강으로 접근했고 선봉대는 이미 동쪽 강변에 교두보를 마련한 상태였다.
독일군 155mm 포의 포격장면입니다.
티모센코의 반응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흐루시쳅과 바그라먄이 스탈린에게 전화해서 작전을 중단하고 총퇴각할 것을 요청했다는 러시아의 기록이 있다. 스탈린은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국방위원회의 중재를 받아들여 현 상태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전방과 모스크바 최고사령부는 이미 지나간 일을 협의하고 있었다. 28군은 독일 3과 23전차사단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고 있었고 일부는 이미 볼찬스크 돌출부로 다시 들어가 있었다. 랴비쉡 공격도 두 전차사단과 294보병사단 패잔병이 전선을 정비해 막아냈으며 79와 297보병사단이 28군의 측면을 위협하고 있었다.
19일 오후, 스탈린은 결국 작전중단을 결정했다. 독일군 공세도 그렇고 주변에서도 더 이상의 작전은 피해만 키운다고 설득했다. 봅킨 집단군과 6군은 되돌아 도네츠강으로 향했지만 이미 퇴로가 막혔고 250,000명이 돌출부 내에 갇히게 되었다.
17전차사단이 이지움을 점령했고 257과 101사단이 도네츠 동쪽강변을 차례로 장악하고 있었다. 57군 대부분이 갇혔고 9군은 완전히 궤멸해서 살아남은 병력도 부대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폰 클라이스트는 14전차사단을 투입해서 이지움 서쪽 32km 지점의 페트롭스코예Petrovskoye를 점령했다.
이제 이지움 돌출부의 목 부분을 완전히 닫아서 강으로 달아나는 소련군을 가둘 차례였다. 5월 20일, 14전차사단은 다시 16km 북쪽의 도강지점을 점령했고 이제 홀리트의 51군군단 사이에는 겨우 15km의 공간만 열렸다.
14와 16전차사단도 소련군 돌출부 내에 비수를 박아 후퇴하는 소련군의 퇴로를 막았지만 아무래도 보병의 도움 없이는 봉쇄가 완벽할 수 없었다.
랴비셉의 28군이 총퇴각을 하자, 폰 보크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6군을 퇴로봉쇄에 동원하기로 했다. 파울루스에게 3과 23전차사단을 발라클레야Balakleya의 44보병사단에게 보내 남쪽으로 협공하라고 명령했다. 전차사단이 이동하는 동안 보병부대를 재편성해 포위된 소련군을 전차사단과 함께 공격했다.
5월 22일, 14전차사단이 23전차와 44보병사단 선봉대와 연결되면서 소련군 2개 군과 기계화 집단이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이제 폰 클라이스트는 나머지 보병부대를 투입할 차례가 되었다.
23일, 독일보병이 전차와 함께 포켓 안으로 밀고 들어가며 포켓을 더욱 좁혔다. 14, 16전차사단과 257, 101보병사단이 테모센코의 구원군을 막았고 파울루스는 이제 공세로 전환해서 포켓을 서쪽에서 밀고 들어갔다. 소련군은 앞뒤로 압박하는 독일군에게 미친 듯이 저항하며 퇴로를 찾아 나섰다.
이후 며칠 동안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은 독일군 포위망을 향해 거듭해서 달려들다가 먼지처럼 사라져갔다. 소련군이 돌파를 위해 병력을 집결시킬 때마다 독일공군이 나타나 폭탄과 기총소사를 퍼부었다. 독일 포위망 앞에는 시체가 쌓여갔지만 지휘관과 정치위원의 협박을 받은 보병은 계속 달려들었다.
60기계화와 389보병사단의 포위망에 구멍이 났고 활로를 찾은 소련군이 몰려나갔지만 그 다음에는 그런 상황에 대비한 1산악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학살이 벌어졌다.
5월 28일, 고로드냔스키, 봅킨, 포들라스와 남서전선군 부사령관 코첸코Kostenko가 전사했다. 포켓에 갇힌 250,000명 중에서 겨우 10%만이 탈출했다. 7개 기병사단, 27개 보병사단, 14개 기계화와 전차여단이 사라졌고 200,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은 20,000명의 피해로 1,200대의 전차와 2,000문의 포를 파괴하거나 노획했다.
제1 산악사단의 모습입니다. 1산악사단은 후방으로 전출되어 점령지의 저항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고 그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사라진 수 많은 사단과 달리 종전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게 항복하는 비교적 운이 좋은 부대였습니다.
소련군은 전후분석에서 남서전선과 남부전선군의 협조가 부족했다고 비난했고 특히 지휘능력 때문에 작전에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흐루시쳅은 1956년에 모든 책임을 스탈린에게 돌렸다.
그렇지만 독일군에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후속결과를 가져왔다. 파울루스는 만천하에 드러난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기사훈장을 받으며 독일언론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제 자리를 지킨 파울루스는 정예 6군을 스탈린그라드 포켓 안으로 밀어 넣어 이지움에서 소련군이 당했던 그대로를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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