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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4부) - 러시아군의 편성

by uesgi2003 2018. 8. 22.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4부) - 러시아군의 편성


1812년 이전의 러시아전열보병은 척탄병, 엽병Jager, 보병연대가 있었다. 척탄병연대는 수석총대대 2개와 척탄병대대 1개로, 보병연대는 보병대대 2개와 척탄병대대 1개로, 엽병연대는 엽병대대 2개와 기병총대대 1개로 편성되었다. 

1804~1812년 당시, 각 연대는 출신지역의 이름이 붙었고 연대가 최대 편성이었다. 1806년, 대부분의 연대가 해체되고 13개 사단으로 재편되면서 러시아군 역사상 처음으로 사단편제가 시작되었다. 1812년, 전열보병연대 4개와 엽병연대 2개가 1개 사단이었다. 

코카서스Caucasus, 오렌부르크Orenburg, 시베리아Siberia지역이 첫번째 변경에서 제외되었다가 19~25사단으로 재편되었다. 



러시아 일반보병과 엽병입니다. 



1812년 초, 연대편성이 변경되었다. 척탄병, 엽병과 보병연대는 그대로 존재했지만 척탄병연대는 척탄병대대로만 편성되었다. 대신에 보병연대의 각 대대에는 척탄병중대 1개씩을 그대로 두었다.

각 보병연대는 총 2,033명(중대원 총 159명, 대대원 총 646명)이었고 연대군악대말고도 동방정교신부와 복사단(사제 보조) 등 꽤 많은 비전투인원이 있었다. 각 연대는 장교 1명과 마부 41명으로 구성된 수송대가 있었다. 161마리의 말과 41대의 마차가 연대지원을 책임졌다. 


1~3대대 중 제2 대대는 예비대대로 지역에 주둔하면서 신병을 양성했다. 프랑스가 침공하자, 예비연대에서 척탄병중대를 빼내 예비사단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예비사단은 전력이 너무 약해서 별 의미가 없었다. 

러시아중대는 프로이센군과 상당히 흡사했다. 중대는 3열 대형이었고 각 열의 간격은 35cm 정도였다. 


러시아군의 사격방식은 다른 국가와 비슷했다. 중대는 소대별 또는 대열별로 사격했고 세번째 열은 앞의 두 열의 소총을 장전해주었다. 

러시아군은 분당 60~70보, 110~110보, 140~160보 3가지 속도로 행군했다. 러시아군의 전술대형은 상당히 다양했다. 프로이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군의 대형을 모두 사용했다. 

전초전(적의 행군이나 대열을 교란시키는 전투) 전술은 놀라울 정도로 구식이었다. 러시아군은 엽병을 마치 또 하나의 전열보병처럼 투입하는 실수를 계속 고집했다. 전초전 전술을 자주 사용하면서도 단순무식 그 자체였다. 심지어 전열보병이나 민병대도 전초전에 투입했다. 


엽병은 대대단위로, 전열보병은 연대단위로 전초전을 벌인 차이 정도만 있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교리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연대장이 알아서 판단해야 했다. 평소에 전초전 훈련을 아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작 전투에서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1812년 당시에도 전초전이 중요한 전술 중 하나였지만 제대로 된 문서증거가 남지 않았고 1820년대 말에 1개 대대 당 104명의 전초전 병사가 편성되었다는 자료가 남아 있다. 드럼신호로 투입하고 복귀시켰고 나팔로 방향을 지시했다. 


러시아장교는 상류층이나 외국인의 자리였다. 원래는 진급하며 경험을 쌓아야 했지만 실제로 그런 장교는 거의 없었다. 배경이 좋은 청소년은 귀족사관학교Noble Land Cadet Corps 등에서 군사와 일반교육을 받았고 20세 정도에 졸업하면 장교로 임관했다. 

러시아는 프랑스처럼 병사를 징집했다. 1812년에는 100명 당 5명 꼴로 3차례 징집했다. 징집병의 복무기간은 최소 25년에서 최대 평생이었다. 신병은 연대예비대로 보내 훈련을 시켰고 늘 5~60,000명이 훈련을 받고 있었다. 


1810년, 정예중대가 창설되자 키가 큰 병사는 척탄병으로, 작은 병사는 엽병으로 보냈다. 러시아 전쟁상 바클라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는 정예중대는 능력과 자질로 선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사들에 대한 원시적인 체벌도 금지시켰는데, 장교와 부사관은 들고 다니는 지팡이로 병사들을 때리는 일이 많았다. 

바클라이는 러시아군을 대대적으로 개혁시켰다. 러시아보병은 무릎을 굽히지 않는 발걸음이 특징이었는데 바클라이는 실질적인 훈련에 집중했다. 그리고 수바로프Suvarov원수가 총탄대신에 총검에 의지하라는 교리를 내세웠지만 바클라이는 1810년 9월에 반드시 모든 병사는 사격이 우선이라고 지시했다. 


1812년 당시, 러시아군은 무려 28가지 구경의 보병총과 11가지 구경의 단총을 사용했다. 부사관에게는 12가지 소총이 지급되었고 엽병중대에게 가장 좋은 소총을 지급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이 16,000정의 수석총을 원조해서 혼란이 더욱 심해졌다. 

바클라이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수바로프의 교리와 총검에 집착했다. 

러시아는 1811년 11월 22일, 전쟁을 앞두고 모든 연대에 4번째 대대인 예비대대를 증편했다. 그리고 1812년 3월에는 각 연대의 2와 4대대를 빼내 30~47사단을 신설했다. 원래 예비사단은 주요전선 후방에서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지만 프랑스와 전투를 벌이면서 피해가 너무 커지자 신설사단을 해체해 1과 3대대의 결원을 보충했다. 


러시아는 흉갑기병연대 6개를 보유하고 있었고 각 연대는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가 1812년 말에 7개 증대로 증편되었다. 전쟁 중에 프슈코프Pskof와 스타로로우브Starodoub용기병연대를 흉갑기병대로 변형시켜 총 8개 연대로 늘렸다. 

후사르연대는 11개가 있었고 각 연대는 10개 중대와 예비중대 총 11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1812년에 민병대를 합쳐 1개의 후사르연대를 증편했다. 

울란Uhlan연대는 5개가 있었고 편성은 후사르연대와 같았지만 1812년 전쟁 중에 6개 중대로 줄였다. 1812년 말에 용기병연대 7개를 울란연대로 변형시켜서 울란연대의 병력은 비슷한 수준으로 남았다. 

1803년, 용기병연대는 30개였고 5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쟁 중에 21개 연대로 줄였다가 1812년 말에 6중대를 새로 증편했다. 



러시아 흉갑기병과 울란기병입니다. 울란은 기병강국 폴란드에서 유래된 창경기병입니다. 폴란드에서는 우완, 다른 국가에서는 울란이라고 불렀습니다.  





러시아기병의 무장은 몇가지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와 비슷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후사르연대의 제1 중대의 제1 열은 창을 들었다. 그리고 전쟁물자 부족 때문에 기병총을 모두 걷어 들여 측면을 엄호하는 기병들에게만 지급했다. 

흉갑기병연대는 총 864명, 용기병연대는 총 897명, 후사르와 울란연대는 총 1,669명이었다. 러시아기병은 주로 프로이센의 교리를 따랐고 콘스탄틴Constatntine대공 등의 수정교리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기병연대는 병과를 가리지 않고 모두 측면엄호기병Flanker이 있었고 주로 전초전과 정찰에 투입되었다. 용기병과 흉갑기병은 프랑스용기병처럼 보병전술훈련을 받았고 각 소대의 끝열에 16명의 측면엄호기병이 자리잡았다. 

후사르와 울란연대는 측면엄호기병의 숫자가 크게 불어났고 심지어 후사르연대는 전초전보병 훈련도 받았다. 


러시아육군은 포병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가장 좋은 장비를 먼저 지급받았고 전력이 가장 좋았다. 1757년에 개발된 리꼬흔licorne(유니콘의 프랑스어)은 장포신 곡사포로 다른 유럽국가의 곡사포보다 사정거리가 길고 정확했다. 

1805년, 러시아는 프랑스의 그리보발체계와 맞춰 대대적인 변혁을 시도했다. 알렉세이 아라크체예프Alexei Arakcheyev는 6과 12파운드 대포와 3, 10, 20파운드 리꼬흔으로 단순화시켰다. 당시 최고의 조준기를 갖췄고 스크류를 돌려 높낮이를 조절해 다른 국가의 포보다 훨씬 정확했다. 

1812년, 러시아포병은 거치포, 경포, 기마포중대가 있었고 모두 12문의 포를 보유했다. 거치포중대는 20파운드 리꼬흔 4문, 12파운드 중포신과 단포신 각각 4문씩을, 경포와 기마포중대는 10파운드 곡사포 4문과 6파운드 대포 8문을 보유했다. 

이밖에 요새포중대와 근위포병여단이 있었고 러시아군은 거치포중대 45개, 경포중대 58개, 기마포중대 22개를 보유했다. 



러시아는 다른 국가에 비해 전통적으로 포병을 중시했는데, 표트르대제가 그 출발이었습니다. 표트르대제는 어린 시절부터 포에 큰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자신을 일반 포병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포병전술을 추종한 쿠티소프Kutisov장군은 야전에서의 포병교리를 출판했다. 그는 포대를 집중시켜 적의 전열을 무너트리거나 접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대응포격을 퍼부어 적의 포대를 침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전장에는 최대한 늦게 투입해서 포대의 위치를 숨기고, 400m 거리에서의 포격은 살인적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포격하라고 가르쳤다. 안타깝게도 그는 보로디노Borodino전투 이전에 죽어서 자신의 교리를 실전에 적용할 기회가 없었다. 


1803년 당시, 전열보병 외에 해병연대 4개와 대대 3개가 있었다가 1811년에 보병에 통합되었다. 러시아군은 전통적으로 야전요새를 건설하는데 능숙했고 공병연대 2개를 보유했다. 

러시아근위대는 1683년에 표트르대제Peter the Great가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genski와 세멘노프스키Semenovski연대를 창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730년에 이스마일로프Ismailov연대가 추가되었다. 

파벨Paul 1세가 근위엽병대대를 창설했고 1806년에 연대로 증편되었다. 같은 해에 황제령의 농부를 모아 황실민병대대를 창설했다가 이듬해에 증편시켜 핀란드근위보병연대를 만들었다. 근위대에 배속시켰던 포병중대는 근위포병여단으로 증편했다. 이후 리투아니아근위보병연대와 근위공병대대 등이 창설되었다. 

기병과 포병도 근위대가 병과 별로 창설되었다. 



은둔의 왕국 러시아를 제국으로 일으킨 표트르대제입니다. 표트르대제에 대해서는 제 서재에 이미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프레오브라젠스키와 세멘노프스키연대는 엉뚱하게도 표트르대제의 놀이군대에서 출발해 러시아 최정예연대가 되었습니다.  


러시아군은 비정규군도 편성했다. 가장 유명한 비정규군은 코사크Cossack로 러시아제국의 국경수비대 역할을 했다. 평소에도 동부 원주민이나 투르크와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훌륭한 전력이었다. 

규모는 지역마다 달랐는데 플라토프Platov족장Ataman의 돈 코사크Don Cossack는 코사크연대 여러 개와 코사크포병중대 2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밖에 흑해 코사크연대 10개, 크림 타타르연대 4개, 오렌부르크 코사크연대 1개, 우랄 코사크연대 10개, 시베리아 코사크연대 10개, 기마포중대 2개, 부크 코사크연대 3개, 우크라이나 코사크연대 4개, 바슈키르Bashkir와 칼무크Kalmuck연대 2개씩이 더 있었다. 

순수 민병대도 1807년에 32개 대대가 편성되었다가 일주일 후에 2/3을 해체하고 황실민병대대대만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근위대로 편성했다. 민병대는 조직이나 무장이 허술해서 심지어 창과 도끼로 무장한 병사도 있었다. 대도시 출신의 민병대는 정규군으로 편성되기도 했다. 



황실코사크근위기병대입니다. 
아래 그림 중 왼쪽이 바슈키르기병입니다. 오른쪽 우랄 코사크는 정규군으로 편성된 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