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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5부) - 프랑스군의 보급체계

by uesgi2003 2018. 8. 28.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확장판이 나와서 요즘 몇시간씩 즐기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정예하나 잡으려면 하루 종일 때리지 않아도 되고, 적진영과의 분쟁도 없어서 무척 쉽게 레벨업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처음 할 때의 재미나 두려움은 없군요. 첫번째 인던인 탄광들어갈 때에는 공포감이 대단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5부) - 프랑스군의 보급체계


17세기와 18세기에는 군을 따라다니는 민간업자에게 군수품을 구입해서 탄약창과 요새에 모아두는 보급체계가 있었다. 이 방식은 부대가 탄약창에서 멀어지면 보급이 끊기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행동에 나서기 몇 개월 전부터 치밀하게 보급계획을 세워야 했다. 

전쟁이 시작되면 보급이 발목을 잡았다. 전격전은 생각도 못할 시기로, 부대는 수백 km를 천천히 걸어가야 했고 적진 깊숙이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은 적국에 강력한 거점을 마련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 주변을 황폐화시켜 적을 불리한 조건으로 끌어냈다. 적이 다가오지 않으면 새 지역으로 이동해서 똑같은 전술을 사용했다. 서로 밀고 당기면서 국경지대가 초토화되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혁신을 감행했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무너져서 기존 병참조직과 보급체계로는 혁명군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었고 프랑스군은 굶주렸고 맨발에 누더기를 입었다. 

굶주린 병사들이 주변을 약탈하다가 점차 특정 지역에 보급품을 쌓아 두기 시작했다. 중대별로 8~10명을 따로 떼어내 정기적으로 보급품과 탄약을 조달했다. 보급조달분대가 돌아와서 본대에 보급품을 나누어 주었다. 

프랑스군의 자급자족은 적과 패잔병의 약탈이나 습격과는 달랐다. 이들은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는 농민을 협박해 물품을 빼앗은 반면에 프랑스군은 정부의 계약이나 약속을 제시했다. 농민은 금이나 약속증서를 받고 물품을 내주었다. 금은 가치가 있었지만, 종이 아시냐Assignat인 혁명채무증서IOU(I Owe yoU 채무)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프랑스군은 담보를 제시했기 때문에 약탈은 아니었다.



프랑스혁명기에 바닥난 재정을 채우기 위해 발행한 정부채권 아시냐입니다. 몰수한 교회토지를 담보로 발행했는데 프랑스정부의 재정이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종이에 불과했습니다. 

스위스의 작은 마을 부르 상 피에르는 무려 180년 후에 채무증서를 제시해 프랑스정부의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기적으로 조직된 프랑스군은 그만큼 낭비가 적었다. 프랑스군은 다른 나라와 달리, 군을 지원하고 보급품을 조달하는데 전문가가 되었다. 덕분에 프랑스군은 병력을 대대적으로 동원하고도 1800, 1805, 1806, 1809년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보통 모든 부대 뒤에는 보급마차가 기어가는 속도로 늘어졌고 진격속도는 병사들의 발걸음이 아니라 우마차의 속도로 결정되었다. 프랑스군은 보급마차가 상대적으로 적었고 보급을 (보급조달분대로) 유기적으로 조직했기 때문에 병사들의 발걸음이 실제 행군속도였다. 

보급조달분대가 선봉대 뒤를 따르며 사방으로 퍼져 보급품을 모았고 본대로 돌아와 모은 보급품을 나누어 주었다. 


본대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보급조달부대나 탈영병이 주변을 거덜 낸 상태인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보급조달부대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1812년 러시아원정에서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은 단기작전의 경우 하루에 80km를 행군할 수 있었고 장기작전의 경우 하루에 50km 정도를 행군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원정에서 보급을 너무 낙관적으로 기대했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현실을 외면한 보급때문에 세계역사상 최대의 패전을 초래했다는 비난인데, 관련문서와 자료를 조사하면 비난과 거리가 멀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 농촌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는 분명히 카를Charles 12세의 러시아원정에 대해 읽었다. 프랑스에는 이미 러시아를 황무지로 설명한 자료도 있었다. 

1811년, 프랑스 전사기록고Depot de Guerre는 러시아와 카를 12세의 러시아원정에 대한 모든 정보를 자세하게 수집하고 검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연히 러시아의 초토화작전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811년 4월, 슈테틴Stettin과 쿠슈트린Kustrin에 엄청난 보급품을 모았다. 그리고 보급부대를 대대적으로 증편했다. 



스웨덴의 전사왕 카를 12세 그리고 스웨덴원정군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제 서재에 소년 전사왕 카를 12세에 대해 이미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조금만 정치와 경제를 알고 여유를 즐겼다면 스웨덴, 그리고 러시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겠죠. 하필이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표트르대제와 같은 시대 그리고 독일과 폴란드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어서 결국에는 몰락하게 됩니다. 

카를 12세는 보급부대의 판단착오로 무리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단 한 번의 패배로 표트르대제의 목 앞까지 들이 밀었던 칼을 거두게 됩니다. 


폴란드에서는 1811년 말까지 매우 공격적으로 보급체계를 만들어갔다. 프로이센과 조약을 맺어 강력한 보급거점을 만들었다. 만약 나폴레옹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러시아의 공격범위 내에 보급기지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와 국경이 맞닿은 비스툴라Vistula(비스와)강 부근에도 보급기지를 만들었다.  

1812년 1월, 단치히Danzig에 전쟁보급기지를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월까지 400,000명과 50,000마리의 말을 50일 동안 지원할 수 있는 보급품이 확보되었다. 오데르Oder강을 따라 여분의 보급품이 쌓였다. 프랑스 수송부대는 26개 중대로 늘어났다. 



나폴레옹은 1811년에 수송부대를 증편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열악한 도로사정에도 불구하고 대형마차에 집중했다. 그 이전까지 수송마차는 말 4마리가 총 2톤 정도를 끌었는데 나폴레옹은 말을 6마리로 늘리고 총 중량도 3톤 정도로 늘려 수송마차 3대당 한대를 더 증편해서 수송능력을 30% 늘리려고 했다. 

문제는 러시아도로 상황이었다. 침공 첫 주에 러시아령 리투라니아Lithuania를 통과했는데 폭우가 쏟아져서 도로는 수렁으로 변했다. 대부분의 마차가 주저 앉아 꼼짝하지 않아서 처음부터 보급에 큰 차질이 생겼다. 

나폴레옹은 일부 수송부대를 말 한 마리의 경마차로 편성했지만 과적 때문에 이름만 가볍고 빠를 뿐이었다. 


포병과 탄약보급은 차원이 다른 수송문제여서 마그데부르크Magdeburg가 주요 보급창이 되었고 엘베Elbe강을 따라 동프로이센에 보급품을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이 1812년 당시에 집결시킨 탄약은 1차대전과 비교해도 적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말이 효과적인 수송체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말은 자신이 수송하는 보급품을 소비했다. 네만Niemen강에서 모스크바까지 200,000명을 보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의 보급체계만으로 원정군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폴레옹은 국경부근에서 러시아군과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려고 했다. 적이 후퇴한다면 스몰렌스크Smolensk정도까지만 추격할 생각이었다. 스몰렌스크에서 일단 보급기지를 만들고 이듬해 봄에 다시 공세에 나선다는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변수 때문에 나폴레옹은 계획을 바꿔 모스크바로 향했다. 

프랑스군이 스몰렌스크에 일단 거점을 마련하고 보급체계를 갖추고 주변에서 예전처럼 유기적으로 보급품을 조달했다면 결과는 상당히 달라졌을 수 있다.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북쪽 끝의 군단도 나중에 모스크바에서 빠져나온 본대보다 훨씬 좋은 상태였다. 

별동부대는 나중에 베레지나Berezina와 스몰렌스크 중간에서 본대와 합류하는데 실제로 누더기 상태의 본대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상태였다. 



모스크바와 중간 지점에 있는 스몰렌스크입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모두 모스크바를 최종목표로 생각했는데, 실제 러시아는 그 너머가 있었습니다. 

물론 상당부분이 불모지입니다만 모스크바를 비우고 초토화작전으로 보급조달을 끊어버린다면 침략군은 스스로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정군은 24일치의 보급품만 가지고 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병사가 4일치를 등에 짊어지고 20일치는 수송부대가 운반했다. 나폴레옹이 초기에 기대했던 계획대로라면 충분한 물량이었다. 

병사의 식량은 충분할 수 있었지만 250,000만 마리의 군마는 당시의 어떤 보급체계로도 유지할 수 없었다. 행군 중에 전투피해보다 훨씬 많은 군마가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병원수인 뮈라Murat의 무리한 기동도 상당한 손실을 자초했지만 러시아군을 전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기병전에서는 상대할 적이 없었던 조아킴 뮈라원수입니다. 나폴레옹이 가장 확실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반면에 저돌적인 돌격으로 늘 피해가 컸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몰락시기에는 배신까지 합니다. 


러시아군은 당연히 보급 우선으로 방어전략을 수립했다. 러시아에 복무 중이던 프로이센장군 풀Phull은 드리사Drissa에 요새거점을 만들기로 했었다. 토레스 베드라스Torres Vedras상황을 재현해서 프랑스군을 보급로가 끊긴 지역으로 유도해 굶주리게 만들기로 했다. 

프랑스군의 전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병력을 이끌고 나가 프랑스군을 괴롭힌다는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뮈라는 드리사를 점령한 후에 러시아가 알고 있던 황무지가 아니라 꽤 괜찮은 초원이어서 부족하나마 보급을 조달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웰링턴의 영국원정군이 프랑스군에게 심각하게 밀리자, 포르투갈의 토레스 베드라스 일대를 요새로 만들고 프랑스군의 보급문제를 괴롭힐 생각이었습니다. 

34,000명을 동원해 2년이 넘게 지은 이 요새라인은 정작 프랑스군을 상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에는 이미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밀려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국경을 넘으면서 바로 보급문제가 발생했다. 비가 내린 데다가 수송부대의 수준이 원인이었다. 원정에 앞서 급하게 증편되었기 때문에 전쟁에 열의가 없는 지원병과 징집병으로 채워졌다. 훈련과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상황변화에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전투부대도 신병으로 대거 채워졌기 때문에 현지에서 보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원정에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본국에서 보급을 조달할 수 있었던 반면에 러시아는 완전히 달랐다. 

보급이 끊기자 규율과 통제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역주민을 배려하지 않고 무차별로 약탈했다. 장교들은 약탈에 동참하지 않았고 그만큼 고통이 더 심했다. 지역주민은 프랑스군을 보면 달아나거나 식량을 숨겼다. 프랑스군이 한 번 지나간 곳은 더 이상 보급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원정군 중 상당수는 외국군이었고 프랑스식 보급조달체계가 없었다. 보급조달부대는 식량을 발견하면 자신들이 먹어 치웠고 본대를 굶주리게 만들었다. 


보급품 분배도 문제였다. 한 군단이 지나간 곳은 황폐화되어서 다음 군단은 굶주린 채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지역에서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더라도 다른 군단과 공유하지 않았다. 후속부대일수록 급격하게 전력이 약화되었다. 

다행히도 리투아니아와 벨로루시Belorussia를 통과하자 비교적 풍요로운 지역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원정군은 계속 진격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상당히 풍요로운 스몰렌스크와 모스크바에서 병사들을 제대로 먹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러시아군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러시아군은 원정군의 진격로에 있는 탄약창과 군수품창고에 불을 지르고 농부의 식량을 빼앗았다. 


리투아니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폴란드왕국에서 러시아제국에 합병된 지 오래지 않았고 러시아군의 단호한 초토화작전에 농부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식량을 숨겼다. 프랑스와 폴란드군이 나타나자 바르샤바대공국Grand Duchy of Warsaw합류를 희망하며 독립을 원했다. 

리투아니아는 보병연대 5개, 경보병연대 1개, 기병연대 4개를 모아 원정군을 지원했다. 만약 나폴레옹이 스몰렌스크에 머물렀다면 러시아에 강제로 합병된 지역의 저하이 시작되고 병력과 군수품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프랑스군은 리투아니아를 벗어나면서 초토화작전의 효과를 겪었다. 스몰렌스크 동부지역은 동방정교 신부가 저항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프랑스군을 악마의 군대라고 설교하면서 동방정교 수호를 외쳤다. 러시아농노는 러시아군의 지시에 따라 식량을 옮겼고 심지어 원정군의 보급조달부대나 탈영병을 공격하는 게릴라활동까지 벌였다. 

러시아농노가 군의 명령을 전적으로 복종하며 모든 식량을 옮기거나 파기하지는 않았다. 노예신분인 이들은 극빈층이었기 때문에 모든 식량을 없애면 가족이 겨울을 버틸 수 없었다. 군의 명령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양만 내놓고 나머지를 숨겼다. 원정군이 조달할 수 있는 식량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11세기 동서교회분열로 가톨릭을 파문하고 독립한 동방정교회 신부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습은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로마가톨릭과 마찬가지로 한때는 대단한 정치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육군Grande Armee는 왜 굶주렸을까? 앞에서 설명했듯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병사들이 보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했다. 농노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고 그나마도 본대와 공유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원래 계획을 변경해서 보급선 이상으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러시아 특유의 열악한 도로는 대형마차가 다닐 수 없었고 신병이 절대다수인 수송부대는 장비나 군마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수송부대를 대대적으로 증편했지만 모조리 헛수고였다. 


나폴레옹이 참담한 후퇴를 결정하면서, 보급체계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규율이 무너졌고 한계선에 다다른 부대는 잡병무리로 변해 다른 부대의 규율까지 무너트렸다. 베레지나Berezina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느 부대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만의 안전과 생존을 위해, 그리고 일분이라도 먼저 빠져나가기 위해 서로를 밀치다가 절망과 죽음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