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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7부) - 프랑스의 침공

by uesgi2003 2018. 10. 3.


거듭해서 설명하듯이, 인명과 지명은 통일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일단 현지어 발음을 기준으로 삼았지만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면서 유럽의 국경을 쉴새없이 변경되었습니다. 어떤 지명은 폴란드, 독일, 스웨덴, 러시아와 영어가 다 다릅니다. 

최대한 신경쓰겠지만 전문편집자없이 모든 오류를 잡아내기 힘들기 때문에 지명과 인명이 이리 저리 혼용되어도 그냥 가볍게 넘기시기 바랍니다. 



러시아의 지형은 언제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대한 영토 안에는 온갖 지형이 이어지다가 프리피야트Pripet강으로 갈라진다. 프리피야트강은 그리 크지 않지만 유럽에서 가장 큰 습지가 있다. 늪, 숲과 호수 때문에 길이 없고 접근불가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프리피야트 북쪽에는 예전의 리투아니아Lithuania가 있었다. 울창한 숲과 습지대가 대부분이고 평원은 거의 없는 데다가 여러 개의 큰 강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서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네만Niemen, 빌리야Vilia, 베레지나Berezina, 드비나Dvina강을 건너야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 도로사정도 한 몫을 했다. 리투아니아를 관통하는 도로는 흙길 수준이었고 비가 오면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수렁으로 변해서 마차가 지나갈 수 없었다. 평상시에도 수천명이 한꺼번에 지나가면 엄청난 흙먼지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다. 



러시아원정은 지역을 어느 정도 머리에 담아두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각 국가와 주요 도시를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먼저 벨라루스(벨로루시)를 확인하시고 아래 프리피야트 강과 습지를 확인해두시면 됩니다. 



서유럽에서 진입하는 주 도로는 3개가 있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vsk를 거쳐 다시 키에프Kiev에서 남쪽의 프리피야트 습지대를 비켜가며 스몰렌스크Smolensk와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 프리피야트 북쪽 강변을 따라 그로드노Grodno(현재의 벨라루스 흐로드노)와 민스크Minsk를 거쳐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 코프노Kovno(현재의 리투아니아 카우나스Kaunas)에서 바로 스몰렌스크로 가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남쪽 도로는 오스트리아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공주와 정략결혼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관계였다. 보급과 교통로를 오스트리아에 그대로 노출시킬 수 없었다. 중앙도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바르샤바대공국에서 출발해 리투아니아를 관통하는 북쪽 경로가 가장 안전했다. 더구나 리투아니아는 프랑스를 해방군으로 반길 수 있었다. 



러시아군 주력이 프리피야트 북쪽에 집결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바클라이 드 톨리Barclay de Tolly는 리투아니아남부 슬로님Slonim에서 쿠를란트Courland 샤브릴Shavli까지 380km에 걸쳐 보병군단 개와 기병군단 3개를 배치해 두었다. 

바그라티온Bagration은 보병군단 2개와 상당한 기병전력을 슬로님 남쪽 루츠크Lutsk에서 프리피야트 남쪽까지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3가지로 대응할 것으로 예상했다. 먼저 프랑스와의 일전을 피하고 퇴각할 경우 강행군해서 중앙을 분리시킨 후에 각개격파하기로 했다. 빌나Vilna(현재의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를 포기하고 그로드노와 슬로님 사이에 다시 자리 잡을 경우 프리피야트쪽으로 밀어붙여 격멸하기로 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는 뛰어난 지휘관이 없다. 바그라티온만 빼고 라는 말을 했다고 하죠. 표트르 바그라티온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2차대전 후반, 러시아는 대대적인 반격작전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독일군 중앙집단군을 궤멸시켰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세번째 대응은 러시아군이 점차 퇴각하는 동안 바그라티온이 남쪽으로 올라와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대육군의 교통로를 끊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제롬Jerome에게 자신이 빌나를 점령할 때까지 바그라티온을 묶어 두라고 명령했다. 

외젠공은 본대와 함께 나란히 진격하면서 측면의 기습공격을 막도록 했다. 제롬은 12일 정도 후에 천천히 러시아군을 유인하며 올라오다가 외젠과 다부와 합류하면 400,000명의 대군으로 바그라티온을 끝장내기로 했다. 


나폴레옹의 모든 계획은 개전 20일 이내에 러시아군을 결전에 끌어들여 완승을 거둔다는 목표였고 대육군은 네만강을 건널 때에 겨우 24일치 보급품만 지참했다. 

러시아군 주력만 격파하면 짜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대단했지만 러시아의 방대한 지형과 도로사정은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원정에서 나폴레옹은 휘하 지휘관과 쉽게 통신할 수 있었다. 거리가 비교적 가까웠고 도로도 쓸 만했다. 

나폴레옹은 일선 지휘관에게 세밀한 명령을 내리고 협력해서, 필요한 시점에 병력을 집결시켜 상대적으로 전력이 부족한 적을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본대와의 밀접한 통신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나폴레옹도 일선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실수와 오판을 거듭했다. 


러시아군의 초반 방어전략은 침공로에 요새를 구축하고 프랑스군을 고사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의 전력이 크게 쇠약해지면 러시아군이 공세로 나서 독일국경 너머로 되돌린다는 계획이었다. 

거점으로 서드비나강의 드리사Drissa(현재의 벨라루스 베르흐냐드즈빈스크Verkhnyadzvinsk)를 선택했다. 드비나강의 U자 형태 지점으로 방어에 최적이었다. 

프로이센출신 풀Phull장군이 직접 공사를 지휘할 생각이었다. 전면은 3중 참호로 보강하고 동쪽으로는 다리 7개로 교통로를 연결했지만 서쪽에는 제대로 된 방어시설이 없어서 프랑스군이 도강할 경우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빌나에서 모스크바, 빌나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어지는 도로 사이에 있으면서도 어느 도로도 장악하지 못했다. 비테브스크Vitebsk(현재의 벨라루스 비쳅스크)를 통하는 길이 훨씬 빨랐다. 

다른 지휘관은 풀의 계획에 반대하며 짜르에게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설득했다. 빌나에서 결전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클라우제비츠Clausewitz는 드리사 거점의 상태를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현지의 러시아병사와 지휘관의 노골적인 반감을 받아가며 검사한 그는 7개 다리 중 하나도 놓이지 않았고 현지 지휘관은 그럴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풀의 계획과 달리, 왼쪽 강변은 숲과 습지여서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관측할 수 없었다. 

클라우제비츠가 짜르에게 돌아가 보고한 내용은 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짜르는 다른 지휘관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클라우제비츠보다 훨씬 강력하게 반대했다.  


바로 이 순간에 러시아의 방대한 영토를 활용하자는 계획이 나왔다. 베를린에서 나온 이 생각은 샤른호스트를 거쳐 짜르에게 전달되었다. 스몰렌스크 이전까지 어떤 전투도 벌이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풀에게 이 생각을 전했지만 풀은 자신의 원 계획에 집착하느라 받아들이지 못했다. 프랑스의 침공이 시작되자 풀의 계획은 거의 무시되었다. 

바그라티온과 바클라이 드 톨리의 병력은 너무 벌어져 있었고 디바부르크와 보리소프(현재의 벨라루스 베리사우) 요새건설도 이제 막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프랑스군을 방대한 러시아 스텝으로 끌어들이자는 계획을 채택했다. 바클라이도 이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정하지 못했고 결전을 벌이라는 압력이 계속되었다. 


1812년 3월 18일, 대육군은 단치히와 바르샤바 사이에 비스와강변을 따라 집결했다. 6월 23일, 말 여섯 마리가 끄는 대형마차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나폴레옹이 내렸다. 폴란드 경기병연대 소령 한 명에게 연대장을 부르라고 하자 연대장이 아직 기상하지 않는 것을 숨기고 자신이 임시지휘관이라고 대답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군복으로 갈아입고 국경으로 향했다. 나폴레옹이 정찰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토끼나 나타나 말을 놀라게 했고 나폴레옹이 낙마했다. 불길한 징조였다. 동행했던 베르티에 Berthier원수는 ‘네만강을 건너지 말았어야 했다. 불길한 징조다.’라고 기록했다, 


오후 10시, 3개 중대가 네만강을 건너 공병의 부교설치를 엄호했다. 폴란드 경기병 무리가 이 장면을 보고 러시아영토에 선두로 진입하는 명예를 얻으려고 달려나갔지만 강물이 워낙 거세서 쓸려 내려갔다. 

러시아경기병중대가 프랑스선봉대를 발견하고 교전을 벌이다가 후퇴했다. 날이 밝자 모랑Morand사단이 3개의 부교를 통해 도강했고 무라와 가병대가 그 뒤를 따랐다. 6월 24~25일, 대육군은 자유롭게 강을 건너 러시아 영토에 들어섰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의 방해가 없자 불안감을 느끼고 네Ney에게 본대의 도강지점으로 와서 도강하라고 명령을 바꿨다. 24일 오후 코브노Kovno를 검령했다. 




이쯤 되면 무라의 제1과 2 예비기병군단이 바클라이 병력과 조우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사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도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바클라이는 25일에나 도강할 것으로 예상하고 기병대에게 그로드노 부근에 집결헸다가 대육군의 우익을 공격하라고 명령해 두었다. 

바클라이는 빌나 근처나 스벤코이니Svencoiny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바그라티온은 기병대공격을 지원했다가 바클라이쪽으로 이동하려고 했다. 

대육군이 하루 먼저 도강하자, 바클라이는 후퇴해서 스벤티시아니Sventisiani 근처에 집결했다. 나폴레옹은 바클라이의 후퇴에 놀라고 바그라티온이 바르샤바로 진격하지 않아 또 놀랐다. 러시아군이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간 움직임을 보였다. 


바그라티온이 합류하려고 이동 중인 것을 모르는 바클라이는 드리사로 다시 이동했고 두 군대의 합류는 계속 지연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젠을 제롬의 병력과 합쳐 바그라티온을 공격해 러시아군을 단절시키려고 했다.

대육군에게는 아쉽게도 외젠군이 2일이나 뒤처졌고 나폴레옹은 측면을 노출시킨 상태에서 전진시킬 수 없었다. 제롬의 진격속도도 느려서 바그라티온을 잡지 못했다. 초전부터 나폴레옹의 원대한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이 빌나로 계속 진격하는 동안 바그라티온은 짜르에게 폴란드로 진격할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다. 


제롬군은 계속 전진했고 6월 7일에 플라토프Platov의 기병후위대와 마주쳤다. 플라토프는 프랑스군 선봉대에게서 미르Mir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6월 8일, 바르샤바대공군이 코렐리치Korelitchi를 점령했고 플라토프군은 대부분 미르 남쪽의 숲에 포진해 있었다. 제4 경기병사단의 2여단이 미르방면으로 전진했고 제3 울란연대가 러시아군 코사크기병의 반격을 받고 거의 전멸했다. 

투르노Turno가 여단의 나머지 병력으로 플라토프의 반격을 막다가 물러섰고 356명을 잃었다. 투르노는 제28 경기병여단의 증원을 받았고 플라토프도 바실치코프Vasiltchikov장군의 증원을 받았다. 양쪽 모두 더 이상의 전투를 벌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6월 10일, 플라토프는 후위를 불러들여 도로에 배치하고 코사크기병은 폴란드기병의 전진에 대비해 매복시켜두었다. 다시 양쪽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러시아군이 폴란드군을 밀어내며 미르로 들어섰지만 폴란드여단과 포대를 발견하고 뒤로 돌아섰다. 폴란드군은 600명 정도를 잃었고 러시아군은 그보다 훨씬 적은 피해를 입었다. 




어랏? 러시아군이 초반에는 잘 싸웠네? 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병력이 3배가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