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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0부) - 나폴레옹의 오판

by uesgi2003 2018. 12. 11.


지난 이야기부터 상세한 전투보다는 굵직한 상황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속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원정 (10부) - 나폴레옹의 오판


바클라이와 바그라티온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알고는 스몰렌스크로 발을 돌렸지만 나폴레옹은 놀랍게도 24시간 동안 진격을 멈췄다. 바클라이는 바그라티온에게 드니에페르강 남쪽으로 이동하라고 제안했고 그는 스몰렌스크가 위험하다고 항의했다. 남쪽 강변으로 도강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바클라이는 무척 신중에 신중을 기했고 스몰렌스크시장에게는 주요 물품을 반출하라고 명령했다. 무라는 기병대를 넓게 분산시켜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대신에 집결시키며 전투에 대비했다. 주노는 길을 잃고 무작정 헤매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이 북쪽 강변에서 내려올 것으로 확신하고 대부분의 병력을 그 방향으로 배치했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은 남쪽 강변으로 접근했다. 러시아군은 급히 방향을 돌렸고 짜르 알렉산드르는 지휘권을 바클라이에게 넘겨주고 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이 지도로 다시 한 번 상황을 이해하시길. 


바그라티온이 스몰렌스크를 지원하기 위해 먼저 보낸 라에프스키Raevsky의 병력은 15,000명까지 불어났고 그는 병력을 넓게 펼치고 72문의 포를 방벽 뒤에 배치했다. 병력을 너무 넓게 배치한 탓에 프랑스군은 쉽게 외곽 방어선을 돌파했다. 

네이Ney는 성채 방어가 허술한 것을 알고는 보병연대를 보내 기어오르게 했다. 라에프스키는 급히 예비대를 투입해 프랑스군의 침투를 막아냈다. 

스몰렌스크는 강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쪽 강변에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싼 구도심Old City이 있었다. 북쪽 강변에는 상페테르부르크 교외가 있었고 다리 하나로 구도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도시를 관통하는 수심은 깊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8월 16일 하루를 도시를 정찰하며 보냈다. 네이는 왼쪽에, 다부는 중앙에,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는 가장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고 무라는 근위대와 외젠의 4군단과 함께 예비대로 남았다. 주노는 여전히 길을 헤매면서 도착하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200,000명과 포 180문으로 늘어났고 프랑스군은 183,000명과 포 300문을 집결시켰다. 8월 17일 오전 8시 구도심에서 나온 러시아군이 외곽의 프랑스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강 건너편 멀리 있는 바클라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스몰렌스크는 역사가 깊은 주 수도였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으로 확신했다. 


프랑스군의 격렬한 공격은 스몰렌스크 성벽에 막혔다. 나폴레옹은 근위대 포병과 36문의 12파운드포를 하나의 포대로 모아 성벽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그렇지만 12파운드 포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다시 러시아보병에게 포문을 돌렸다. 급히 각 중대에서 곡사포를 끌어 모아 러시아군 머리 위로 포탄을 쏟아 부었다. 

오후 5시, 주노가 드디어 스몰렌스크에 도착했고 프랑스군은 점차 러시아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네이만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전투는 참혹했다. 포탄 한 발이 소대를 꿰뚫고 지나가 21명이 전사하는 일도 있었다. 후방 고지 위에 있던 예비대는 포탄과 총탄을 뒤집어쓰고 전진하는 아군에게 박수로 응원했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최전방까지 들렸다. 

나폴레옹은 피해가 너무 커서 공격을 중단시키려 했는데 로바우Lobau가 간신히 설득했다. 



어둠이 내리자 나폴레옹은 텐트로 돌아갔고 로바우는 곡사포로 엄호하게 했다. 곡사포탄이 도시 안으로 들어가면서 거대한 화재가 발생했다. 전투가 끝났는데도 불타오르는 도시 때문에 주변은 대낮처럼 환했다. 

새벽 2시, 네이는 전방의 러시아 수비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도시에 들어섰고 뒤이어 프랑스군이 하루 종일 격전을 벌였던 말라코프Malakov성문으로 진입했다. 

바클라이는 4,000명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6,000명 이상을 잃었고 나폴레옹은 약 4,000명을 잃었다고 주장했지만 마찬가지로 최소한 6,000명 이상을 잃었다.



스몰렌스크 함락과 함께, 바클라이와 바그라티온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바그라티온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솔로비에보Solovievo로 떠나면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교통거점에 겨우 코사크 4개 중대만 배치했다. 니폴레옹이 스몰렌스크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서둘러 바클라이를 추격했다면 최소한 바클라이는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전 4시, 네는 드니에페르강을 건너 러시아군의 방향을 찾았다. 러시아군 후위는 곳곳에서 네의 전진을 방해했지만 결국 외곽방어선을 돌파했고 상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로 갈라지는 교통로에 도착했다. 

바클라이는 모스크바행 도로 대신에 상페테르부크행 도로를 선택했다. 드니에페르강에서 급격하게 멀어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정찰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모스크바도로보다 많이 우회했고 도로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무거운 포와 수송마차가 이동하기 힘들었다. 


결국 네의 추격대가 따라붙었고 바클라이는 고르부노보Gorbunovo 고지에서 프랑스군의 접근을 지켜보다가 나머지 병력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연전을 펴기로 했다. 그렇지만 수송대는 여전히 빠져나가지 못했고 전투 중에 두번째 다리를 놓아야 할 판이었다. 러시아수송대는 초인적인 힘과 의지로 단 한문의 포도 단 한대의 마차도 잃지 않았다. 

오후 5시, 프랑스 3군단이 전장에 도착했고 저녁 7시에는 러시아군 제2 보병군단이 증원되면서 전투는 저녁 9시 너머까지 이어졌다. 주노는 이번에도 제때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네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주노가 배후를 찔렀다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무라는 직접 주노의 사령부로 달려가 분통을 터트렸고 주노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무라의 질책을 받은 주노는 병력을 뒤늦게 투입했지만 러시아군의 반격을 받고 성공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은 포위될 위기를 벗어났다. 


나폴레옹은 주노의 실책을 보고받고 장 랩Jean Rapp에게 지휘권을 넘겨받으라고 명령했다. 랩은 오랜 친구를 옹호하며 나폴레옹을 진정시켰다.

프랑스군 50,000명 중 37,000명이 전투에 투입되었고 러시아군은 나중에 30,000명까지 투입되었다. 프랑스군은 약 8,500명을 잃었고 러시아군은 약 5,500명을 잃었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를 앞두고 15일 하루를 허비했을 뿐만 아니라 스몰렌스크를 우회해 모스크바로 향하지 않고 성벽을 무리하게 공격했다. 스몰렌스크를 공격하면 러시아군이 전면전으로 대응할 줄 알았는데 바클라이는 그러지 않았다. 

프랑스구이 발로우티나-로우비노Valoutina-Loibino전투의 피해를 수습하는 동안 바클라이는 최대한 멀리 달아났다. 

스몰렌스크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몇 가지 대안을 고민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동프로이센의 거점에서 상당히 멀어진 데다가 행군, 전투와 거점방어 때문에 병력이 계속 줄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여전히 대회전을 기피하고 있다. 원래 계획했던 초반 20일 이내의 결전은 완전히 빗나갔다. 

모스크바는 약 450km를 더 가야했다. 모스크바까지 가더라도 러시아군이 대회전을 벌인다는 보장이 없었고 러시아군이 퇴각하면서 초토화시켰기 때문에 보급문제가 무척 심각했다. 대육군의 보급체계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나폴레옹은 스몰렌스크 일대를 완전히 정리하고 점령한 리투아니아를 폴란드에 합병하고 보급과 증원을 받아 봄에 다시 원정을 나설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2년에 걸친 원정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군과의 결전없이 스몰렌스크에 머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영국의 교역을 하루빨리 끊고 싶었다. 그리고 6개월을 지체한다면 러시아는 스웨덴과 터키전선에서 돌린 핀란드와 다뉴브군을 보강하게 된다. 신병을 모으고 훈련시켜 더 많은 사단을 만들 수 있다. 

나폴레옹이 폴란드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더라도 러시아군의 새 병력과 영국의 무기가 합쳐지면 유리할 점이 하나도 없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합병 그리고 대대적인 폴란드군 모병은 반대로 대육군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동맹을 자극시킬 수 있었다. 두 나라는 폴란드 분할의 주역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의 보복을 두려워했다. 


8월 20일 오후 4시, 나폴레옹은 모든 대안을 내려놓고 무라와 다부에게 전진명령을 내렸다. 맥도날드에게는 리가Riga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대육군은 3열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보병 124,000명, 기병 32,000명 그리고 포 587문의 전력이었다. 

날씨는 건조했고 러시아군이 진로의 모든 개울과 우물을 더럽혔기 때문에 고통이 심했다. 다행히 측면의 외젠 등이 충분한 보급품과 마을을 발견했다. 무라는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했는데 병력을 분산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보급문제가 심각했다. 마초가 부족해지자 군마가 계속 쓰러졌다. 

다부는 최대한 전력을 유지한 반면에 무라는 코사크가 나타날 때마다 달려들었다. 무라의 무분별한 결정 때문에 프랑스기병의 전력은 계속 누수가 생겼다. 나폴레옹은 거꾸로 다부에게 너무 조심한다며 무라의 편을 들었다. 


러시아군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러시아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탈영과 질병이 급증했다. 러시아장군은 바클라이를 스코틀랜드 혈통으로 진정한 러시아인이 아니라고 비난했다. 차르는 바클라이의 회피기동을 더 이상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7월 24일, 공개적으로 모든 러시아인은 무기를 들라고 호소했다. 모스크바에서만 80,000명의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러시아동방정교 교회는 농노에게 성전을 부추겼다. 

바그라티온의 압박을 못이긴 바클라이는 우스비야톄Usvyatye 부근에서 프랑스군과 일전을 계획했지만 이번에는 바그라티온이 거부했고 러시아군은 계속 퇴각했다. 비아즈마Viazma강 부근의 도시에 화재가 발생했고 프랑스군은 정찰대를 보내 러시아군의 행동을 지켜보게 했다. 러시아군이 초토화작전을 벌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비아즈마강을 건너자 러시아군이 물러서지 않고 프랑스군과 맞섰다. 무라는 보병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마음대로 다부의 사단 하나를 지휘해서 전투에 투입했다. 다부는 급히 달려와 사단을 가로 막았고 무라는 나폴레옹에게 달려갔다. 

나폴레옹은 다부의 5사단을 무라에게 주었지만 그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났다. 무라는 몹시 화를 내며 칼을 뽑아 들고 다부를 공격할 뻔했다. 


차르는 러시아 귀족의 압박으로 바클라이를 쿠투조프Kutusov와 교체했다. 쿠투조프는 67세의 고령이었고 너무 비만해서 말을 탈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바클라이와 달리 러시아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상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전선으로 이동하는 길 주변 마을의 러시아인이 몰려 들어 그에게 인사를 할 정도였다. 그가 본대와 합류할 때에도 하늘에 거대한 독수리가 선회했고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소문이 떠 돌았다. 

쿠투조프는 결전의 장소로 그자츠크Gzatsk를 선택했지만 프랑스군이 바로 점령했고 계속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바클라이는 해임에도 불구하고 서부 1군 지휘관으로 우익을 맡았다.

나폴레옹은 2일 동안 머물면서 병력을 집결시켰다. 128,000명이 모였고 5일 내로 6,000명이 더 합류할 수 있었다. 9월 4일, 프랑스군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러시아군이 계속 산발적인 전투를 걸어왔다. 9월 5일 오후 2시, 무라의 선봉대가 보로디노Borodino 부근의 평야에 들어섰다. 



바클라이 드 톨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출신으로 러시아군부와 귀족의 반감을 샀지만 결국에는 그의 전략이 옳았고 국민영웅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쿠투조프 사후에 다시 총사령관을 맡아 파리공략을 책임집니다. 


쿠투조프는 러시아군 좌익이 노출된 것을 염려해서 쉐르바르디노Shervardino 방책을 보강하기로 했지만 겨우 공병 30명만 투입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작업이 미진한 상태에서 9월 5일, 프랑스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병력도 이해할 수 없는 배치가 이어졌다. 웰링턴은 언덕 배후 경사면에 병력을 배치해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부터 전력을 아낀 반면에 쿠투조프는 언덕 전면 경사면에 병력을 배치해서 불필요한 피해를 자초했다.

최정예 보병연대인 프레오브라젠스키Preobragenski와 세멘노프스키Semenovski근위보병연대는 프랑스 포대의 포탄을 뒤집어쓰며 총 한 방 쏘지 않은 상태에서 273명이 전사했다. 클라우제비츠Calusewitz는 회고록에서 쿠투조프의 판단을 비판했다. 


프랑스군 35,000명이 러시아군 18,000명을 상대로 벌인 전초전에서 양측은 각각 8,000명씩을 잃었다. 어둠이 내려 전투가 중단되자 양측은 진영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러시아군은 동쪽 멀리까지 모닥불이 이어진 반면에 프랑스군은 빛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양측의 보급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와와 세멘노프스키연대는 표트르대제가 측근으로 창설한 러시아 최초의 현대식연대입니다. 최정예연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