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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꿈으로 끝난 샤밀의 코카서스 이슬람왕국 건설

by uesgi2003 2019. 11. 23.


중세해전은 잠시 미뤄두고 한동안은 다양한 이야기를 정리할 예정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현대의 러시아와 체첸분쟁 그리고 IS 이슬람극단주의에 대해 약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꿈으로 끝난 샤밀의 코카서스 이슬람왕국 건설


1839년 8월 21일, 다게스탄Dagestan의 3대 이맘Imam(지도자)인 샤밀Shamyl은 수십명의 전사와 함께 아쿨고Akhoulgo 거점을 탈출했다. 러시아군은 80일 동안이나 포위한 끝에 요새마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러시아군이 오지마을의 돌집을 하나씩 수색하는 동안 샤밀부대는 어둠을 틈타 밧줄을 타고 절벽아래로 내려갔다. 

샤밀은 이튿날 계곡바닥의 강까지 내려간 후에 뗏목에 허수아비를 태워 하류로 흘려보내 러시아초병을 따돌리고 상류를 건넜다. 

샤밀은 자신을 넘기고 현상금을 받으려는 동족을 피해 체츠냐Chechnya(체첸)의 밀림으로 들어가 겨울을 숨어지냈다. 그의 상황은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이전처럼 러시아와 협상하는 실수는 피할 생각이었다. 

코카서스Caucasus에서 1838~1842 기간동안 러시아군을 지휘한 예브게니 골로빈Yevgeny Golovin은 “샤밀만큼 잔인하고 위험한 적이 없었다. 마치 이슬람 초기에 모하메드Mohammed가 전세계의 3/4를 뒤흔든 것처럼 강력한 힘과 성격을 가졌다”고 말했다. 



러시아황제는 동쪽관문인 전략요충지 코카서스지역을 오랫동안 노렸다. 무슬림에게 둘러싸인 조지아Georgia의 동방정교 기독교인을 구하고 흑해로 진출하기 위해 짜르 알렉산드르Alexander 1세는 1813년에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조지아, 다게스탄(지도 붉은 부분 참조)과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을 합병했다. 



테레크Terek강을 따라 강력한 요새를 구축하고 그레벤 코사크Greben Cossacks를 배치해 코카서스 북부와 러시아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코사크 라인이라고 부르는 이 경계선은 러시아군이 코카서스 북부의 부족을 상대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거점역할을 했다. 

알렉산드르는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Aleksey Petrovich Yermolov에게 요새를 구축하고 체츠냐와 다게스탄 부족을 순화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는 체첸 저지대의 그로즈니Grozny와 다게스탄 북쪽의 브네자프나야Vnezapnaya에 전진거점을 마련했다. 


체첸과 다게스탄을 요새와 수비대로 포위해 부족을 통제한다는 전략이었다. 산악지대에서 작전을 펼칠 경우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 뻔했다. 1828~1859년 31년 동안 있었던 무리드Murid전쟁(러시아의 체첸과 다게스탄정복전쟁)에서 수만 명의 러시아병사가 죽었다. 

이 지역의 분쟁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1825년에 니콜라스Nicholas 1세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상페테르부르크의 사치스러운 궁전에서 현장의 장군들에게 다양한 명령을 내렸다. 





다게스탄 고지대의 산악마을에 이슬람 민족주의인 무리디즘Muridism이 파고들었다. 무리디즘은 이슬람 신비주의Sufi mysticism에서 진리를 찾던 이슬람 광신학자 2명이 설립한 신념이었다. 

샤밀은 다게스탄 남부의 김리Ghimry에서 1797년에 태어났고 동료 가지 모하메드Ghazi Mohammed는 1794년에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야라굴Yaragul로 가서 유명한 이슬람학자들에게서 외국어, 철학과 종교를 배웠다. 

샤밀은 1828년에 메카Mecca성지순례(하즈Hajj)를 떠나 압 일 카디르Abd el-Qadir라는 알제리 민족주의자에게서 게릴라전을 배웠다. 그동안 가지는 체츠냐와 다게스탄에서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가지는 1829년에 코카서스 이슬람국Caucasian Imamate을 세우고 샤밀을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가지는 코사크 라인의 러시아군 초소를 습격하고 카스피아Caspia해안의 러시아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러시아군 그리고리 로센Grigory Rosen장군은 1832년에 가지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가지가 전사했고 샤밀은 사슈카Shashka를 휘둘러 몇 명의 러시아군을 죽이고 위기를 벗어났다. 

가지의 뒤를 이은 함자 베크Hamza Bek는 내분에 휩싸여 2년을 허비하다가 1834년 11월에 측근에게 암살되었다. 5일 후, 샤밀은 코카서스 이슬람국의 세 번째 이맘에 올랐다. 



코카서스 이슬람왕국의 국기입니다. 1차대전 후에 터키의 지원을 받아, 샤밀집안이 4차 이맘에 올라 이슬람왕국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다게스탄에서만 지지를 받았고 소련의 공격을 받아 바로 무산되었습니다. 


샤밀은 전임자에게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러시아군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코카서스 북부부족을 통일시켜야 했다. 그는 무슬림의 성전을 선포해 부족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리고 샤리아Sharia법률(이슬람 율법)로 통치했다. 

러시아군은 전면전을 피하고 초토화전술과 게릴라기습을 결합한 파비안Fabian전략을 사용했다. 러시아군의 병력과 장비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방어전을 선호했다. 험지나 자신이 장악한 지역을 지나는 러시아군 대열을 매복기습했다. 

샤밀은 자신의 땅에서 알라의 뜻을 거부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려고 했다. 무리드저항에 동조하지 않는 부족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샤밀의 보복은 많은 부족이 러시아로 이탈하게 만들었다. 


샤밀은 이맘에 오르자마자 체르케스Circassia로 가서 부족장들에게 저항운동에 동참할 것을 설득했다. 그렇지만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이유로 냉담하게 거절당했다. 체르카스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샤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다. 

코카서스 북부의 모든 부족을 통일시키려던 그의 바람은 꿈으로 남았다. 


러시아군은 산악으로 들어가는 도로와 다리를 건설했다. 1837년 7월, 샤밀은 결정적인 위기로 몰렸다. 러시아군은 샤밀군을 틸크Tilq마을에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샤밀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휴전을 제안했다. 

차르에게 샤밀이 항복했고 승전했다는 보고가 들어갔지만 실제와 달랐다. 산악지대로 들어간 50,000명의 병력 중에 살아 내려온 숫자는 5,00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샤밀과의 협상은 9월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샤밀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1839년 봄, 6,000명의 러시아군이 아쿨고의 거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샤밀군 1,000명은 몇차례 반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아쿨고는 해발 180m의 산정상에 있었고 작은 널빤지 다리가 신 아쿨고와 구 아쿨고를 연결하고 있는 마을이었다. 샤밀은 마을전체에 탑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요새로 만들었다. 



러시아군은 반대편 산에 야포를 끌어올려 지원포격을 퍼붓고 3개 대열의 보병이 사다리와 밧줄을 타고 정상으로 올라갔다. 샤밀군은 바위를 떨어트려 러시아군을 막았다. 러시아군은 80일 동안 5번에 걸쳐 총공격했고 3,500명의 증원군이 합류했다. 

샤밀은 8월 중순에 4번째 총공격을 막아낸 후에 항복제안을 했고 이미 속은 적이 있었던 러시아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2살의 아들을 러시아군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러시아군은 상페테브루크로 보내 샤밀을 좌절시켰다. 

8월 17일, 러시아군은 5번째 총공격을 감행해 신 아콜고를 점령하고 구 아콜고로 건너려고 했다. 여성과 아이들이 몰려 나와 널빤지 다리를 막는 동안 100명으로 줄어든 샤밀군이 밧줄을 타고 절벽 아래로 도망쳤다. 러시아군은 포위공격에서 총병력의 1/3인 3,000명을 잃었다.  



1844년, 짜르 니콜라스는 미하일 보론초프Mikail Vorontsov를 코카서스 북동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보론초프는 샤밀이 체츠냐 남동부에 있는 다르기이야Darghiyya마을에 있다는 것을 알고 1845년 봄에 샤밀의 새 본거지를 공격했다. 

샤밀은 6년전처럼 포위당할 생각이 없었다. 초토화작전으로 러시아군 경로에 있는 모든 집과 창고를 불태웠다. 샤밀군은 6,000명으로 불어나 있었고 기병으로 러시아군 대열후위를 계속 괴롭혔다. 노획한 야포로 러시아군을 포격하고 저격수가 부주의한 러시아군을 노렸다. 

샤밀은 러시아군 사체를 토막내 바리케이드에 걸어서 러시아군을 질리게 만들었다. 러시아군은 끊임없는 소모전, 전염병과 탈진으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샤밀군을 진압하려면 새로운 전략이 필요헸다. 


1847년, 니콜라스는 알렉산드르 바랴틴스키Alexander Baryatinsky를 새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바랴틴스키는 샤밀을 쉴새없이 몰아붙여 거점을 옮기거나 병력을 모을 여유를 주지 않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중립 또는 항복한 부족을 인도적으로 대해서 샤밀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전면공격을 피하고 측면우회공격으로 샤밀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중립부족에게는 마을을 재건하고 가축을 채워주고 자치권을 인정해서 절대로 이탈하지 않게 했다. 이 덕분에 많은 부족이 러시아진영으로 이탈했고 샤밀의 기반이 무너졌다. 


1859년 8월, 러시아군은 샤밀을 군닙Gunib에 몰아넣었다. 샤밀군은 겨우 400명 밖에 안되었고 병사들의 가족이 함께 있어서 달아날 수도 없었다. 샤밀군은 가파른 바위로 사방이 막힌 황무지 산정상에서 버티고 있었다. 

바랴틴스키는 포격의 엄호를 받으며 공격을 시도했다. 샤밀은 반드시 생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공격을 세 번이나 멈추고 샤밀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샤밀은 부하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샤밀은 처형을 기다렸지만 4년 전에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2세는 그를 정중하게 대했다. 샤밀은 모스크바 외곽 칼루가Kaluga에서 10년 동안 격리되었다가 1869년에 아라비아의 성지순례를 떠날 수 있었다. 

그는 1871년에 메디나Medina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