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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우크라이나의 역사 - 아마존과 코난의 고향

by uesgi2003 2022. 5. 15.

1. 하바드대학 세르히 플로키Serhii Plokhy교수의 정식 출간물을 인용정리하고 있습니다. 

2. 우크라이나어를 모르기때문에 기존의 지명과 인명을 사용합니다. 러시아의 사관을 공유한다고 비난하지 마시길. 

 

우크라이나를 처음 기록한 역사가는 헤로도토스Herodotus였다. 그리스인은 흑해를 폰토스 에우크세이노스Pontos euxeinos, 로마인이 라틴화시킨 친절한 바다라고 불렀고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세상은 그리스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크림반도와 흑해평원Pontic steppe이 한계였다. 이집트가 고대문화와 철학의 원천이었다면 우크라이나는 그리스 문명이 야만문명을 만나는 국경선이었다. 바로 서방세계라는 개념이 만들어진 한계선이었다. 

헤로도토스는 터키에 있는 그리스도시 출신이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이탈리아 남부에서 살다가 지중해와 중동을 건너 이집트와 바빌론 등을 여행했다. 그리스식 민주주의를 찬양했지만 당시에 알려진 세계 모든 곳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스-페르시아전쟁을 자유와 노예제의 충돌로 묘사하면서도 양측의 이야기를 모두 기록하려고 했다. 그리스인과 야만인의 놀라운 업적을 모두 기록해 과거의 기억을 보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집필한 역사Histories의 야만인 부분은 지중해평원까지 관심을 가졌다. 기원전 512년, 다리우스Darius대왕은 그리스를 침공하기 30년 전에 이 지역의 스키타이Scythian족에게 복수를 하려고 했다. 

흑해 북쪽의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유목민 스키타이왕은 응전하지 않고 다뉴브Danube강에서 돈Don강까지 페르시아군을 끌고 다녔다. 전세계 최강제국의 페르시아에게는 굴욕적인 원정실패였다. 

헤로도토스는 신비로운 스키타이족, 땅, 관습과 사회에 대해 들은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했다. 그 지역을 여행해본 적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옮겼는데, 스키타이족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처음으로 기록한 역사가, 지리학자, 민족학자였다. 

 

 

기원전 4~5세기 스키타이 전사들입니다. 여성궁사가 인상적이어서 그랬는지 아마존의 전설도 이 지역입니다. 

 

 

그가 아테네에서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을 소개하기 전까지 그리스는 그 지역과 사람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냥 야만족과 신의 놀이터라고 생각했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Achilles가 다뉴브나 드네프르Dnieper강의 섬에 매장되었다던가, 활을 쏘기 위해 오른쪽 가슴을 잘라낸 그리스신화의 전사부족 아마조네스Amzons가 돈강 부근에 산다고 이야기했다. 

아가멤논Agamemnon의 딸이자 여행객을 잔인하게 재물로 바친 이피게네이아Iphigenia도 이 지역 이야기여서 친절한 바다 너머의 땅으로 여행하려는 그리스인이 없었다. 그리고 친절한 바다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예측불가의 폭풍으로 항해하기 무척 어려운 바다였다. 

 

 

아가멤논 정말 마음에 안드는군요. 여신의 분노를 사자 장녀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쳤는데 여신이 빼돌려서 우크라이나 남부로 보냅니다. 아가멤논 동생부부의 불륜으로 트로이전쟁이 벌어졌고 장녀를 제물로 바치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킬레우스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기원전 8세기, 스키타이족이 흑해평원을 차지했고 킴메르Cimmerian이 지금의 터키로 밀려나면서 처음으로 그리스인과 접촉했다. 키메르족은 성경에도 거친 야만인으로 기록되었는데 아놀드 슈바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가 코난 더 바바리안Conan the Barbarian에 킴메르왕으로 출연했다. 

 

 

기원전 7~6세기, 흑해평원과 흑해북쪽 연안도 그리스세계가 되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밀레토스Miletus 이주민이 그리스 식민지를 건설했고 시노프Sinope가 중심지였다가 올비아Olbia가 그 자리를 넘겨받았다. 석벽, 대광장, 아폴로신전이 있었고 1만명의 시민과 민주주의체제였다. 

당연히 지역주민과의 융화가 관건이었다. 기원전 5~4세기, 올비아의 그리스인은 스키타이족과 평화롭게 살며 교류하고 결혼해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올비아상인과 선원은 곡식, 말린 생선과 노예를 그리스로 가져가 포도주, 올리브유, 미술품으로 바꿔왔다. 우크라이나남부 평원에 널린 스키타이족 매장지에서 고대 금속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유물을 보면 스키타이족은 평원유목전사 특유의 남성중심사회이며 유목경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융합덕분에, 헤로도토스는 고고학발굴만으로는 알 수 없는 귀중한 정보를 남겼다. 그는 스키타이신화를 따라 신이 하늘에서 황금쟁기, 황금재갈, 황금전투도끼, 황금술잔을 떨어트렸는데 아들 둘이 선물을 잡으려다가 불탔고, 막내가 무사히 받아서 로얄Royal 스키타이인의 왕위애 올랐다고 기록했다. 

헤로도토스는 드네프르강 일대가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유럽의 빵바구니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다. 

 

 

 

스키타이족 유물에 그리스신화의 그리핀이 묘사되어 있어서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스키타이왕국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복합체로 해안, 평원, 숲 그리고 노동방식에 따라 민족구성이 달라졌고 그 차이가 수백년 이상 이어졌다. 그리스인과 그리스계 스키타이인은 해안지역에 살면서 지중해 그리스도시와 내륙의 중개인역할을 했다. 

헤로도토스의 스키타이족 기록은 기원전 3세기로 끝났다. 흑해 북부의 그리스 식민지를 로마인이 합병하고 기원전 1세기에 로마제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동쪽에서 유입된 새로운 유목민족 사르마티아족Sarmatian이 스키타이족을 완전히 밀어내고 교역로를 통제했다. 사르마티아족은 흑해평원을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차지했다. 최절정기에는 볼가Volga강에서 다뉴브강까지 장악했다. 

 

 

사마르티아 부녀가 스키타이 사위를 잡아가는 장면입니다. 여성의 표정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르마티아 시대에는 그리스식민지와 내륙의 교역이 차단되어,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스키타이족을 크림반도로 밀어냈고 그곳에서 소스키타이Scythia Minor왕조가 태어났다. 소스키타이와 사르마티아족이 계속 충돌하면서 교역로가 차단되었고 스키타이족은 그리스식민지에 공납을 요구했다. 그리고 알렉산더대왕과 로마제국의 확장으로 이집트의 곡물교역로가 열리면서 흑해평원 곡물의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이 흑해의 그리스식민지 보호에 나섰지만 무척 버거운 상황이었다. 기원후 8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황제가 추방한 오비디우스Ovid가 현재의 루마니아에서 10년 동안 살다가 죽었는데 당시 그리스 식민지의 위태로운 일상생활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어디오 안전하지 않았고 야만인이 뒤섞여 살았는데 그 수가 무려 절반이나 되었다고 한다. 

1세기에 올비아를 방문했다고 주장하는 그리스철학자 디온 크리소스토모스Dio Chrysostom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올비아는 끊임없는 약탈과 전쟁으로 고대의 명성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오랜 동안 야만인에 둘려 쌓여 전쟁의 연속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의 그리스인은 완전히 몰락했고 일부는 도시가 아니라 그냥 지역사회로 무너졌다. 그리고 야만인이 몰려들었다.’ 

 

 

격전지 헤르손과 가까운 위치입니다. 

 

로마인의 보호를 받고도 100년 이상 이 상태가 계속되었고 다시는 이전의 번영을 되찾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기록에서 멀어져갔다. 오비디우스는 땅끝이라며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춥고 완전히 무인지대라고 기록했다. 

다행히 지리학Geographies을 집필한 스트라본Strabo덕분에 사르마티아 부족명과 거주지역을 알 수 있었지만 그는 그 지역에 살지도 않았고 헤로도토스처럼 정보원이 정확하지도 않았다. 스트라본 자신도 단순히 북부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무지에 대해 불평했다. 

그의 정보원은 주로 돈강 하구의 그리스식민지였고 돈강이 유럽의 동쪽 한계선이 되었다. 돈강 서쪽이 유럽, 동쪽이 아시아가 되었다. 그리고 헤로도토스가 구분했던 평원유목민과 숲평원의 경작민 차이도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는 서방시민사회의 북방국경이 되었다. 그렇게 2,000년이 흘러 18세기에 러시아제국이 부흥하면서 유럽지도를 다시 그렸고 동쪽 한계선을 우랄Ural산맥으로 넓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