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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우크라이나 역사 - 몽골침입과 공국소멸

by uesgi2003 2022. 5. 25.

 

키이우에서 분화된 공국에서, 우크라이나 지역의 공국은 몽골에 대항하고 로마교황과 협력하다가 완전히 소멸되었고, 러시아 지역의 공국이 지역패권을 잡는 계기가 됩니다. 

 

아직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등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힌 상태라 우크라이나의 역사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이렇게 복잡한 배경이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몽골군과 타타르족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타타르족은 몽골 이외의 다른 유목민족도 모두 포함하는 이름입니다. 

 

 

키이우 루스의 형성시기는 알 수 없어도 소멸시점은 확실했다. 1240년 12월 7일, 몽골이 키이우를 점령했다. 몽골의 침입으로 다시 평원 유목민의 시대가 부활했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던 키이우 루스는 사라지고 하자르, 훈, 스키타이족의 시대로 되돌아갔다. 
이전의 유목민족은 유라시아평원의 서쪽 정도를 지배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몽골은 아무르Amur강과 몽골평원에서 다뉴브강과 헝가리평원까지 지배했다. 루스지역도 몽골제국의 외곽이면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몽골은 블라디미르-수즈달과 갈리키아-볼히니아공국을 노렸다. 두 공국은 몽골의 지배를 받았지만 몽골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랐다. 지금의 러시아 지역은 몽골이 15세기 말까지 타타르족의 멍에Tatar yoke라는 시기가 계속되었고 이후에도 몽골군의 일부가 남았다. 러시아는 이 시기를 무척 가혹하게 기록했지만 우크라이나는 몽골이 상대적으로 짧고 관대했다고 기록했다. 

 


몽골은 1220년까지 부하라, 사마르칸드, 카불을 손에 넣고 1223년에 폴로비츠와 볼가 불가르족을 격파했다. 크림반도의 수다크Sudak요새도 무너트려 교역거점을 점령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죽으면서 제국을 아들과 손자에게 분할했다. 중앙아시아와 볼가강 동쪽평원은 손자 2명에게 주어졌는데 바투칸Batu Khan은 불만을 품고 영토를 서쪽으로 크게 넓혔다. 

 


바로 몽골의 유럽침공이었다. 1237년, 몽골군은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 동쪽 국경의 리아잔Riazan을 점령했다. 1238년 2월 초에는 수도 블라디미르가 함락되었다. 수비군이 대성당에서 농성을 계속 하자 완전히 불태웠고 저항하는 주민을 모두 학살했다. 
루스 공국은 몽골의 공격에 저항했지만 서로 협력하지 않아 몽골기병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240년 11월, 몽골군이 키이우에 접근하자, ‘루스의 땅이 온통 적으로 뒤덮였다’는 기록이 남았다. 키이우가 저항하자 바투는 투석기를 가져와서 성벽을 두들겼다. 주민들이 대성당으로 피신했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벽이 무너졌다. 성소피아성당은 건재했지만 귀중한 유물을 모두 약탈당했다. 

 


1246년 2월에 교황 인노첸시오Innocent 4세의 사절이 몽골 칸에게 가던 중에 키이우를 지났는데 수많은 해골과 뼈가 땅위에 그대로 뒹굴고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키이우는 몇백년 동안 몽골에게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 19세기 러시아학자들은 키이우와 페레이아슬라브 주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볼가와 오카Oka로 이동했다고 주장했는데 사실이 아니다. 멀리 달아나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북부의 숲과 데스나Desna강 부근에 안전한 피신처가 있었다. 이 지역은 숲, 습지와 높은 산이 많아서 몽골군을 막아주었다. 

 

키이우 공이 처형당하기 전에 고문받는 장면이고 아래는 키이우 주민의 학살장면입니다. 

 

이 자료는 우크라이나 역사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하게 넘어갑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이 궁금하신 분은 알렉산드르 넵스키 부분을 보시면 됩니다. 오래 전에 정리해서 용어와 표기법이 다른 점을 양해부탁드립니다. 

 

https://blog.daum.net/uesgi2003/695

https://blog.daum.net/uesgi2003/697

 

키이우 방어를 책임졌던 드미트로Dmytro는 갈리키아-볼히니아공 다닐로Danylo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보호를 부탁했다. 키이우공 미하일로Mykhailo는 몽골군에게 패배한 후에 더 이상 저항할 생각이 없었다. 
다닐로는 징키스칸처럼 고아출신으로 루스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볼히니아 공국을 통치하던 아버지 로만Roman은 갈리키아까지 손에 넣고 키이우 서쪽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고 폴란드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닐로형제는 유산을 물려 받았지만 라이벌 공국, 반항적인 갈리키아 보야르, 폴란드와 헝가리가 노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1238년까지 몽골군이 북동쪽으로 아직 진출하지 않았고 다닐로는 볼히니아와 갈리키아를 다지고 키이우에 자신의 지휘관을 임명했다. 

 


몽골군이 수도 할리치Halych를 요구하자 볼가강 사라이Sarai로 가서 바투칸을 직접 만났다. 바투칸은 ‘말젖을 먹겠는가?’라고 물었고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지만 그렇게 하라면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닐로는 칸에게 복종과 존경을 표시했다. 
기독교 기록은 이교도 몽골칸에게 머리를 숙인 기독교 루스를 좋게 기록하지 않았다. 체르니히브Chernihiv의 미하일로Mykhailo공은 바투의 요구를 거절하고 살해당했고,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야로슬라브공은 바투의 우상에 머리를 숙여 비난을 받았다. 다닐로는 두 사람의 중간으로 어중간한 태도를 보였다. 말젖은 먹는 대신에 우상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실제로 몽골은 신앙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동방정교교회에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었다. 야로슬라브는 몽골에 복종하고 대공지위를 얻고 키이우에 지휘관을 임명한 권한도 받았다. 그는 1246년에 죽을 때까지 복종했고 후손도 그 뒤를 따랐다. 
다닐로는 충성을 맹세했지만 오래 지키지 않았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현명하게 복종하는 장면이지만 여기에서는 다닐로가 복종하는 장면이라고 우기고 넘어가겠습니다.

다닐로는 공물을 바치고 몽골군 원정에 참여하는 대신에 라이벌 공국과 폴란드에 대해 몽골의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 경제부흥을 노렸는데, 몽골이 직접 통치하는 평원 부근에서 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키이우 주민들도 살길을 찾아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는 홀름Kholm(현재의 폴란드 첼름Chelm)으로 수도를 옮기고 경제거점으로 만들었다. 독일인, 루스, 폴란드인이 매일같이 몰려들었고 1256년에는 미래의 수도인 리비우Lviv라는 도시를 세웠다. 
13세기 후반, 몽골군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자주 비웠고 다닐로는 지역세력과 동맹을 맺어 칸국에서 독립하려고 했다. 

 


1246년, 다닐로는 바투와의 회견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황의 사절과 만나 교황과의 협력을 의논했다. 인노첸시오는 자신을 최고의 종교지도자로 추앙하기를 원했고 다닐로는 중앙유럽 가톨릭국가의 지원을 원했다. 
1253년, 결국 교황이 중앙유럽과 발칸반도 국가들이 몽골에 대항하는 십자군원정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다닐로에게 대리인을 보내 기독교왕관을 씌워주어 다닐로공은 루스의 왕 다니엘Daniel이 되었다. 
그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왕가와도 결혼을 성사시켰다. 1253년, 중앙유럽의 지원약속을 받은 다닐로는 몽골군에게 반격하고 포돌리아Podolia와 볼히니아를 탈환했다. 1255년, 킵차크칸국Golden Horde의 바투칸이 죽었고 후계자가 연거푸 교체(바투칸의 양자독살)되었기 때문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5년 후에 몽골군이 돌아오자 중앙유럽은 교황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했다. 헝가리는 체코와의 패전으로 여력이 없었다. 몽골군 지휘관 부룬다이Burundai는 다닐로에게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원정에 동참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수도 주변의 요새를 모두 허물 것도 요구했는데 모두 받아들였다. 그는 다시 몽골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교황과의 동맹은 콘스탄티노플리스와 루스 라이벌의 반발을 불러왔다.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리스를 약탈했고 기독교는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노플리스는 갈리키아의 대주교를 모스크바로 옮겨 다닐로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모스크바공을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했다. 
킵차크칸국이 영지관리와 공물수집을 위해 대공을 임명했고 그동안 모스크바와 티베르Tver가 대공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는데 대주교 이동으로 모스크바가 우위에 올라섰다. 

갈리키아-볼히니아공국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코사크수장국Cossack Hetmanate이 탄생하기 전까지 마지막 독립국가였다고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는데, 실제로는 공물을 바치는 봉신국 수준이었다.
1323년, 다닐로의 두 손자가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고 다른 남성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 마조비아의 볼레스와프Bolesław of Mazovia가 공국을 차지했다. 그는 동방정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유리Yurii로 개명했다. 
그렇지만 1340년, 보야르가 반란을 일으켜 유리를 감옥에 가뒀고 강력했던 갈리키아-볼히니아공국은 오랜 내분에 시달렸다. 결국 15세기 후반에 갈리키아와 포돌리아는 폴란드에 합병되고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대공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 카지미에시Casimir 3세는 갈리키아의 내분을 노렸다. 1340년, 먼저 수도 리비우를 공격했는데, 갈리키아 보야르 드리트로 데코Dmytro Dedko가 몽골군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군을 물리쳤다. 

 

맞습니다. 우리가 많이 보던 그 인물입니다. 


카지미에시는 1344년에 다시 돌아와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가 데코가 죽자 1349년에 리비우과 갈리키아-볼히니아 공국 전체를 차지했다. 
1345년, 리투아니아와 지역군대가 폴란드군을 볼히니아에서 몰아냈고 폴란드는 칼리키아만 차지했다. 카지미에시는 폴란드 귀족 수백 명을 이주시켜 군사지원을 대가로 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1430년대에 갈리키아와 포돌리아 서부를 완전히 합병하고 지역귀족도 폴란드 의회에 참석해 지역의견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갈리키아는 폴란드의 귀족민주주의, 독일의 도시자치, 이탈리아 르네상스교육을 도입했지만 더 이상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루스 장인이 외국으로 대거 유출되었고 동방정교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충돌했다. 
리투아니아대공국은 폴란드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키이우는 14세기까지 몽골의 영향권이었기 때문에 볼히니아 지역 지도층을 인정했다. 게디미나스Gediminas대공은 키이우공을 임명하고 타타르Tatar족을 평원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1359년, 리투아니아와 루스군이 우크라이나 중부의 시니 보디Syni Vody강에서 킵차크칸국의 선봉인 노가이 타타르Noghay Tatar군을 격파하고 리투아니아국경을 우크라이나 대부분으로 넓혔다. 

 

 

1362년의 푸른바다Blue Waters전투가 킵차크칸국을 밀어내는 결정적인 전투였는데, 정작 이 자료에서는 훨씬 작은 전투를 언급하는군요. 아마 교수님이 1362년 전투와 혼동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리투아니아대공국이 제국수준이죠? 약 200년 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이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복잡한 역사배경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구성도 무척 복잡합니다. 

게디미나스는 대리인을 이 지역에 파견했지만 통치자들이 지역가문과 결혼하고 동방정교와 슬라브 교회식 이름으로 개명해서 갈리키아와 다른 길을 걸었다. 당시 이교도였던 리투아니아 지도층도 비잔티움 동방정교를 받아들였고 거꾸로 슬라브 교회어가 대공국 전체의 공식언어가 되었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키이우 루스의 후계자가 되었고 일부 역사가는 리투아니아공국이 아니라 리투아니아-루스 심지어 루스-리투아니아라고 부르고 있다. 

10세기부터 이어진 키이우 루스의 시대는 이렇게 끝났고 15세기에는 이 지역 지도에서 루스공국이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