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현대 우크라이나 역사에 진입했습니다. 우크라이나어를 모르기때문에 용어와 지명이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표트르부터 로마노프왕정까지 우크라이나 내부의 격동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넘어갔습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사라예보Sarajevo에서 2발의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와 아내 소피Sophie가 총상을 입고 몇 시간 후에 죽었다. 21살 대학생이 쏜 권총은 1차대전의 방아쇠도 당겼다.
오스트리아-헝가리정부는 세르비라에게 선전포고하고 슬라브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하려고 했지만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을,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편을 들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편에 가담했다.
이렇게 시작된 1차대전은 1800만명 사망, 2200만명 이상의 부상이라는 인명피해를 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각협상 Triple Entente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오스만제국으로 교체)의 삼국동맹 Triple Alliance의 대결로 보았다.
블라디미르 레닌 Vladimir Lenin은 시장과 자원통제를 위한 강대국의 충돌이라고 강조했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충돌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과 러시아제국이 패전해서 완전히 해체되거나 군주가 물러나거나 영토를 잃었다.
다양한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 제국의 폐허에서 새로운 국가가 태어났다. 우크라이나도 그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러시아가 연승을 거뒀다. 북쪽에서 프로이센으로 진격했고 남쪽에서는 갈리키아와 부코비나Bukovyna에 진입했다. 9월 초, 리비우를 점령했고 연말에는 카르파티아Carpatia산맥 협로를 장악했다.
러시아는 지역학교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게 하고 폴란드어와 우크라이나어의 도시이름을 러시아로 바꿨다. 러시아가 친러인사를 지원하는 동안 오스트리아는 전쟁발발과 동시에 친러인사를 처형하기 시작했다.
약 20,000명의 친러인사와 가족이 수감되어 유럽역사상 최초의 집단수용소가 생겼다. 추위과 질병으로 3,000명 정도가 죽었다. 캐나다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이민 온 우크라이나인 4,000명을 가택연금시키고 80,000명은 적대국 외국인으로 등록하게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우크라이나 정치인은 갈리키아를 분할해서 우크라이나 지역은 자치권을 얻고, 러시아령의 우크라이나를 독립시키려고 했다. 오스트리아제국군에 입대하고, 러시아포로 중에 우크라이나출신은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가지게 했다.
빈에 우크라이나해방동맹Union for the Liberation of Ukraine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는 1920~30년대 급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둥인 드미트로 돈초프Dmytro Dontsov도 있었다.
1915년 늦은 봄과 여름. 독일-오스트리아연합군이 갈리키아와 부코비나 대부분을 탈환했다. 이 지역의 친러인사는 러시아군과 함께 동쪽 로스토프와 돈 남부지역으로 달아났다.
1916년 봄과 여름, 알렉세이 브루실로프Aleksei Brusilov가 반격에 나서서 볼히니아, 부코비나, 갈리키아 일부를 탈환했지만 경제와 군사 모두 더 이상 여력이 없었고 로마노프왕정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1917년 3월 초, 로마노프왕정이 최후를 맞이했다. 페트로그라드Petrograd(상트페레트부르크)에서 식료품부족으로 노동자들은 파업을,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국가의회Duma의 권고로 니콜라스Nicholas 2세가 퇴임했다.
2월 혁명February Revolution으로 알려진 페트로그라드 사태는 우크라이나에도 대변혁을 불러왔다. 3월 초, 키이우에 중앙라다Central Rada를 만들고 미하일로 흐루쉐프스키 Mykhailo Hrushevsky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20대 학생과 교수를 중심으로 활동에 나섰다.
중도파 우크라이나 진보사회Society of Ukrainian Progressives의 우크라이나어 사용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크라이나의 자지권을 요구했다.
바울 리젠코Paul Rizhenko의 작품으로 퇴임하는 니콜라이와 병사들 모습인데, 한 병사가 쓰러져 있습니다. 제정러시아의 몰락을 표현한 것이겠죠.
두번째 그림도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의 최후인데, 표트르대제에 창설된 차르의 연대입니다. 제정러시아의 최후를 의미합니다.
자치우크라이나정부를 만들고 키이우, 포돌리아, 볼히니아, 체르니히브, 폴타바 등의 행정권을 주장했고 7월, 러시아임시정부를 우크라이나지역정부를 인정했다.
러시아임시정부는 동부전선에서 반격에 나서면서 병사들에게 계속 싸워줄 것을 간청했지만 종전을 간절히 바라던 병사들도 중앙라다를 지지했다. 1917년에 우크라이나에서 모병했던 300,000명이 중앙라다에 충성을 맹세했다. 대부분 농부출신으로 귀향뿐만 아니라 중앙라다가 약속한 귀족토지 배분을 원했다. 농부의 지지를 받는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이 최대정당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국장 coat of arms은 키이우 볼로디미르공의 주화에 있던 삼지창과 코사크의 이미지로 키이우 루스와 코사크수장국의 후손을 주장했다. 문장과 국기의 청색과 노란색은 갈리키아의 문장에서 가져왔고 우크라이나 영통의 통일을 상징했다.
1917년 가을, 중앙라다가 약속실행에 실패하면서 지지기반이 볼세비키가 주도하는 의회로 넘어갔다. 키이우에서만 지지율이 25%였고 농촌에서는 마음대로 국가와 귀족땅을 빼앗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는 볼세비키가 주도한 10월 혁명October Revolution이 다시 일어났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중앙라다가 우크라니아인민공화국Ukrainian People’s Republic을 선포했지만 러시아와의 연방은 유지한 상태였다.
하르키우, 헤르손, 타우리다Tavrida, 쿠르스크, 보로네즈Voronezh로 영토를 확장했다. 키이우의 우크라이나정부와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의 볼세비키정부가 충돌했다.
볼세비키는 레닌이 주도하는 급진 공산주의로 폭력을 통한 혁명을 주장했습니다.
소련의 낫과 망치, 붉은 색 깃발이 볼세비키의 로고입니다.
페트로그라드에 노동자, 농부, 병사 대표를 모아 임시정부를 무너트리고 쿠데타를 성공시킨 볼세비키는 키이우에도 우크라이나의회Ukrainian Congress of Soviets를 소집해 정권을 잡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대표가 중앙라다를 지지하면서 실패했다.
1917년 12월 24일, 볼세비키는 공업지대인 하르키우로 가서 우크라이나소비에트인민공화국Ukrainian People’s Republic of Soviets을 선포했다. 1918년 1월, 러시아 볼세비키군이 우크라이나에 진입해 키이우로 진격했다. 하르키우의 노동자부대가 지원했다.
중앙라다는 노동자의 지지를 잃은 데다가 병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우크라이나독립을 지지했던 부대들은 모두 동부전선에 있었다. 1918년 1월 25일, 중앙라다는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크루티Kruty역에서 400명의 학생과 생도가 볼세비키군을 5시간 동안 막았고 포로가 된 27명은 처형당했다. 국가독립의 첫번째 순교자였다.
폴란드에서도 비슷한 전투가 있었는데, 1920년 볼세비키 러시아는 신생독립국 폴란드를 너머 독일까지 공산혁명을 일으키겠다고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연합군 중 어느 누구도 지원하지 않아, 폴란드 재합병이 당연한 상황에서 학도병과 시민 600명이 합류해 자포르제에서 러시아군을 오랜 시간 지연시킵니다.
덕분에 바르샤바 대반격이 일어납니다.
아래 그림은 1918년 우크라이나와의 전투 장면이지만 그냥 자포르제전투라고 우기고 넘어갑니다.
1918년 2월 9일, 중앙라다는 키이우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퇴각했고 브레스트Brest(현재의 폴란드-벨라루스국경)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중앙라다는 이제 적이었던 외세의 도움을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동맹국 Central Powers은 우크라이나의 농산물이 절실했고 우크라이나 곡식의 대가로 잘 무장된 군사력을 빌려주었다.
3월 2일, 키이우에서 볼세비키군을 밀어내고 중앙라다가 복귀했다. 학생의 시신을 아스콜드 무덤 Askold’s Mound에 매장했다.
볼세비키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 45,000명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고 우크라이나 남부의 모든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오데사인민공화국, 타우리다공화국, 도네츠공화국 등이 독립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연합군은 크림반도를 점령했고 볼세비키는 동맹국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서 독립했지만 동맹국에게 부채가 있었다. 곡식 100만톤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독일은 중앙라다를 해산시키고 우크라이나 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파블로 스코로파드스키Pavlo Skoropadsky정부를 세웠다.
그는 족장을 자칭하면서 대중의 기억에 호소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독재를 했다.
우크라이나와 문화는 전환점을 맞았다. 사상 처음으로 자체 은행과 금융체계를 갖췄고 지방정부를 열고 부대를 창설했다. 첫번째 국립도서관과 기록실도 만들었다. 대학 2곳을 열고 우크라이나어 교육을 시작했다.
중앙라다는 새 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지도층은 지하로 숨어서 기회를 노렸다. 노동자의 근로시간이 12시간으로 늘었고 농부는 농작물을 몰수당했다.
1918년 여름, 노동자들이 파업했고 40,000명의 농부가 무력투쟁에 동참했는데 독일군의 진압으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정부는 비 볼세비키 러시아와 연방을 체결해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풍을 불러왔다.
중앙라다의 사회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족장정부를 전복시키려 했고 1차대전 종전으로 스코로파드스키정부가 몰락했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연합국과 평화조약에 서명했고 동맹국은 우크라이나를 떠나야 했다. 3일 후, 혁명위원회가 족장축출에 나섰고 농부와 군대가 키이우에 진입했다. 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이 복귀하고 관공서를 접수했다. 그리고 볼세비키도 돌아왔다.
반대편 전선의 갈리키아에서는 종전과 함께 서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Western Ukrainian People’s Republic이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왕정이 무너지자, 모두가 영토를 탐내기 시작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갈리키아를 두고 격돌했다. 빈정부는 갈리키아를 동서로 나누지 못했고 폴란드가 모두 차지했다.
1918년 11월 1일, 우크라이나가 먼저 공격해 리비우를 점령했다. 폴란드가 반격해 20일 후에 리비우를 탈환했다. 서우크라이나인민공화국은 사령부를 동쪽으로 옮기며 폴란드와 전쟁을 계속 벌였다.
1918년 12월 1일, 동서우크라이나공화국이 통일에 합의했다.
푸른색의 동 갈리키아를 두고 양측이 전쟁을 벌였고 많은 일반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폴란드는 이 당시에 이미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폴란드가 2차대전에 말탄 기병을 앞세워 독일군에 대들었다는 초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무시하세요. 2차대전 최초의 전차에이스가 폴란드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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