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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우크라이나 역사 - 코사크수장국 소멸과 분할

by uesgi2003 2022. 5. 31.

원 자료가 우크라이나 학자이고 우크라이나 역사가 주제이기 때문에 러시아 역사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가볍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복잡하게 얽힌 역사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 이야기를 제대로 즐긴다면 이런 의문일 들겁니다.

'코사크수장국이 사라졌네? 아예 러시아에 합병되었네? 그럼 지금의 우크라이나 넓은 국경선은 누가 그린 것이지? 내전과 격전지인 크림반도와 돈바스는 코사크가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는데???' 

 

우크라이나의 넓은 국경선은 거의 전부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그려졌습니다. 

 

 

서부 우크라이나는 키이우 루스 - 폴란드 - 리투아니아연방 등의 영토와 역사였으니까 우크라이나의 지분이 상당합니다만... 

지금 전쟁의 배경이며 격전지인 지역은 크림칸국의 영토였고 러시아가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점령하고 합병했던 지역입니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중심인 코사크는 오히려 크림칸국을 인정하고 동맹관계를 이어갔습니다. 

우크라이나 역사에서도 지분이 아예 없는 지역입니다. 

 

 

 

코사크 대봉기 후에 루이나The Ruin이라는 내전시대가 왔다. 드네프르강 오른쪽 지역이 특히 심한 피해를 입었고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차르국과 폴란드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보흐단 프멜니츠키는 코사크국의 확장을 꿈꿨지만 657년 8월에 세상을 떠나면서 코사크장교단은 몇 자리 안되는 고위직을 두고 완전히 분열했다. 
보흐단은 왕조를 만들 생각으로 병약한 16세의 아들이 족장으로 선출되도록 미리 준비해두었다. 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r Pushkin의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를 읽은 사람이면 다 아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들의 섭정으로 지정했던 사람이 오히려 족장에 오르면서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폴란드왕조처럼 후손이 계속 왕으로 선출되기를 바랐지만 오스만제국의 승인에 따라 지도자가 결정되는 몰다비아 신세가 되었다. 코사크국은 모스크바차르국, 폴란드와 오스만제국이 개입해서 몰다비아보다 훨씬 복잡했다. 어느 쪽이 승리해도 코사크국은 사라질 판이었다. 

유리 흐멜니츠키를 밀어내고 족장이 된 사람은 이반 비호프스키Ivan Vyhovsky였다. 그는 동방정교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장교단보다는 귀족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재상도 코사크 장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부자 유리 네미리치Yurii Nemyrych를 임명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그는 폴란드개혁을 지지하는 반삼위일체론Antitrinitarians파였다. 폴란드, 바젤 등에서 교육을 받고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 엘리트였다. 폴란드 대홍수때에는 스웨덴 카를Charles 10세를 지지했다가 환멸을 느끼고 동방정교로 개종하고 보흐단과 친문을 맺었다. 
코사크 장교단은 이반 비호프스키와 함께 몰려든 귀족층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드네프리 급류 너머에는 족장을 별도로 선출하던 자포로자 코사크가 있었고 노골적인 반기를 들었다. 모스크바도 자포로자 코사크의 권리를 인정하며 내분을 조장했다. 

1658년 6월, 비호프스키는 크림칸국의 지원을 받아 폴타바Poltava 부근에서 자포로자 코사크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지만 피해가 막심했다. 15,000명이 죽었고 코사크군끼리 최초로 벌인 내전이었다. 
비호프스키는 차르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그것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었지만 차르에게는 명령만 있을 뿐이고 협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차르의 태도에 실망했던 보흐단은 스웨덴과 오스만제국에 의존했지만 비호프스키는 폴란드에게 접근했다. 
폴란드 체제를 겪어봤기 때문에 협상만 잘하면 자치권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58년 9월, 하디아치Hadiach에서 코사크회의를 열고 폴란드왕의 관할로 복귀하는 것에 합의했다. 하디아치조약은 바로 유리 네미리치의 작품이었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와 동등한 루스공국으로 연방에 가담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다. 
폴란드는 대봉기 후에 루스공국에 대해 개방적이었지만 코사크국의 체제를 그대로 통합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조약에 따라 1,000개 가문이 귀족신분을 받았는데 연대당 100개 정도였다. 그리고 동방정교 신도만 공국의 행정직에 종사할 수 있었다. 
코사크국이 폴란드에 합류했다는 소식이 퍼지자, 차르는 비호프스키를 배신자로 선포하며 코사크족에게 봉기하라고 명령했다. 모스크바와 자포로자군이 코사크국의 남부를 장악했다. 
1659년 봄, 비호프스키는 차르가 오히려 코사크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크림칸국을 불러 모스크바군을 공격했다. 1659년 6월,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부근에서 벌어진 코노토프Konotop전투는 비호프스키의 대승으로 끝났다. 100,000명의 모스크바군은 40,000명을 잃고 기병대는 전멸당했다. 
타타르족이 모스크바차르국의 남부 국경지대를 약탈했고 차르가 수도를 버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러시아군의 핵심인 스트렐치Streltsy인데, 서유럽에 비해 뒤처진 군대와 전술이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의 예니체리처럼, 제국과 차르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거꾸로 정권을 결정짓는 괴물로 변합니다. 

비호프스키는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없었다.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모스크바 수비대가 건재했고 코사크반군의 세력이 점점 늘어났다. 폴란드의회가 하디아치조약의 상당부분을 거부했다는 소식까지 들어왔다. 
그는 볼히니아와 포돌리아까지 요구했는데, 폴란드는 키이우, 프바츨라브와 체르니히브만으로 공국건립을 허락했다. 등록 코사크도 30,000명, 용병 10,000명으로 한정했다. 유리 네미리치가 바르샤바로 직접 달려갔지만 소용없었다. 
코사크 지도층은 비호프스키를 배신자로 간주했고 네미리치는 반대파와의 충돌에서 목숨을 잃었다. 폴란드의회로 갔던 코사크협상단도 공개처형당했다. 비호프스키는 도망치는 수 밖에 없었다.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는데도 내부의 반발로 족장자리를 버리고 우크라이나 서부로 달아났다. 
폴란드의원이 되었는데 하디아치조약에서 유일하게 성사된 조항이었다. 유리 흐멜니츠키가 족장에 선출되어 아버지가 원하던 왕조가 연결되었지만 코사크국의 혼란은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다. 

코사크국은 누구에게 의존해야 존재할 수 있는 국가였고 모스크바와 협상을 시작하자마자 덫에 걸린 것을 알았다. 모스크바군 장관과 모스크바군 40,000명이 둘러싼 코사크회의에서 유리가 새족장에 재선출되었지만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차르가 허락해야 족장을 선출할 수 있었고 사전허락없이 어떤 대외접촉을 하거나 대령을 임명할 수 없었고 모스크바국 주요 도시에 모스크바 수비대가 주둔하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절대로 맞서면 안되었다. 
1660년 1월, 모스크바군 장관은 유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보냈다. 비호프스키의 형제이자 유리의 사촌인 다닐로 흐멜니츠키가 키이우의 모스크바 수비대를 공격했다가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외교관이 질릴 정도로 고문을 받아 온몸이 산산조각난 시체로 유리의 집으로 배달되었다. 

협박은 역효과를 불러왔다. 1660년 가을, 모스크바군과 폴란드-크림타타르연합군의 전투에서 코사크군은 진영을 바꿔 폴란드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모스크바군이 패배했고 지휘관은 크림칸국에서 20년 동안 포로로 지냈다. 
폴란드왕에게 복귀했어도 조건과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루스공국이라는 이름까지 사라졌다. 코사크국이 모스크바와 폴란드 사이를 오갈 때마다 더 많은 권리를 잃었다. 결국에는 드네프르강을 따라 둘로 나뉘어졌다.

 

 

오른쪽을 왜 왼쪽이라고 부르지??? 혼란스러울텐데, 바다로 가는 방향에서 보는 좌우입니다. 그래서 지도를 거꾸로 봐야 합니다. 저 지도는 좌우 코사크영토경계없이 그렸는데, 드네프르강 부근에 한정되었습니다. 크림칸국과 폴란드도 그대로였습니다.


1660년, 유리가 드네프르 오른쪽 강변에 사령부를 차리자, 왼쪽 강변의 연대Left-Bank Hetmanate(좌안 코사크)는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 임시족장을 선출했다. 유리가 진압하려고 나섰지만 실패했다. 1663년 초, 유리는 족장에서 물러나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코사크국은 완전히 분리되었다. 
오른쪽 강변 코사크Right-Bank Hetmanate(우안 코사크)는 폴란드에 복종하는 족장을, 왼쪽 코사크는 모스크바의 통치를 인정하는 족장을 선출했다. 1667년, 모스크바와 폴란드는 안드루소보Andrusovo휴전에 합의하고 코사크국을 분할했다. 

1665년에 지역코사크족이 족장으로 선출했던 페트로 도로쉔코Petro Doroshenko대령은 국가분할에 저항하며 전투를 벌였다. 도로쉔코는 국가분할에 경악한 지도층을 결집시키고 크림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1667년 가을, 연합군은 폴란드군을 공격해서 오른쪽 강변 코사크국의 자치권을 받아냈다. 곧바로 왼쪽 강변으로 넘어가 모스크바에 봉기를 일으킨 코사크족과 합류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스크바관리가 과세목적으로 인구조사를 벌이고 있어서 불만이 극에 달했는데 국가분할이 봉기에 불을 질렀다. 
도로쉔코가 양쪽의 족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통일되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폴란드의 후원을 받은 족장을 상대하기 위해 오른쪽으로 넘어가자 모스크바군이 왼쪽을 점령했다. 이제 오스만제국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1669년 7월, 메흐메드 4세는 족장 철퇴와 깃발을 보내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와 대등한 봉신국으로 보호를 약속했다. 술탄은 드네프르 양쪽의 코사크국뿐만 아니라 오래 전의 루스국 전체를 봉신국이라고 선포했다. 

1672년, 100,000명의 오스만군이 다뉴브강을 건넜고 크림, 왈라키아, 몰다비아와 코사크군이 합류해 폴란드군으로 진격해 포돌리아의 케미아네츠Kamianets요새를 포위했다. 자연장애물로 난공불락으로 생각하던 요새는 단 10일만에 함락되었다. 

 


연합군은 리비우를 포위했고 폴란드는 포돌리아와 드레프르 중류지역을 포기하겠다며 평화협상에 나섰다. 코사크족은 축제분위기였다. 
그런데 오스만제국은 왼쪽 강변이나 볼히니아와 벨라루스쪽으로 진격할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기독교교회를 모스크로 바꾸고 크림칸국이 노예사냥에 나서게 방치했다. 도로쉔코의 명분이 어그러졌고 주민들이 모스크바가 지원하는 새 족장에게 합류했다. 

1676년, 모스크바군과 코사크족이 드네프르강을 건너 도로쉔코의 수도 치히린Chyhyryn에 접근하자 도로쉔코는 족장에서 물러나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장관에 임명되어 모스크바에서 1,400km 떨어진 비아트카Viatka(현재의 키로프Kirov)로 갔다. 
오스만제국의 우크라이나통치도 오래가지 않았다. 오스만은 이 지역이 별 의미가 없었고 포돌리아는 다시 폴란드에게 넘어갔다. 다시 드네프르강을 따라 모스크바-폴란드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18세기 말까지,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통치했고 러시아와 폴란드 분할은 우크라이나 정체성과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토대는 모스크바 차르의 통치를 수용한 왼쪽 강변 코사크국이었다. 공식 명칭은 소 러시아Little Russia였고 우크라이나인도 러시아연방의 국민으로 간주했다. 
1708년, 이반 마제파Ivan Mazepa족장은 스웨덴 카를 12세가 러시아를 침공하자, 러시아제국을 건설한 표트르Peter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스웨덴군이 패배하면서 실패로 끝났고 1709년 폴타바Poltava전투는 코사크국과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완전히 바꿨다. 
우크라이나를 소 러시아라고 부르며 우크라이나의 정치, 영토와 문화를 인정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크라이나의 국민영웅 마제파입니다. 반대로 러시아에게는 배신의 상징입니다.


17세기 직전, 차르는 족장선거가 있을 때마다 권한과 특권을 조금씩 줄였지만 관대할 때에는 폴란드보다 관대했다. 1669년, 도로쉔코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에 폴란드는 오른쪽 강변 코사크를 크게 위축시킨 반면에, 차르는 이전의 조건으로 복귀하는 것에 동의했다. 
폴란드령의 코사크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고 오른쪽 지역은 갈수록 황폐해졌다. 차르는 코사크족이 복종하는 동안에는 더 많은 권한을 허용했다. 
왼쪽 강변이 부흥하면서 키이우도 다시 부활했고 키이우대학이 열렸다. 달아났던 교수와 학생이 돌아왔고 새 학과가 개설되었다. 키이우 바로크문학은 모스크바에도 전해져서 러시아 대중문화의 기원이 되었다. 

키이우 성직자가 서유럽 문화를 모스크바로 전달했고 반대로 모스크바의 정치사상을 가져왔다. 동방정교 차르는 정치와 종교세계의 중심점이 되었고 비잔티움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전재군주와 유일 교회라는 체제가 굳혀졌다. 
원래 키이우는 드네프르 오른쪽 강변에 있었기 때문에 휴전조건에 따라 2년의 유예기간 후에 폴란드로 반환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키이우 동방정교 성직자는 가톨릭왕의 통치로 들어간다는 소식에 경악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키이우를 차르의 소유로 두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키이우는 모스크바공국의 첫 번째 수도였고 모스크바 동방정교의 기원이기 때문에 이교도나 가톨릭에게 넘기면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차르는 키이우를 그대로 소유했지만 1685년, 키이우 대교구를 콘스탄티노플리스가 아니라 모스크바의 관할로 바꿨다. 키이우 성직자는 자치권을 잃은 대신에 차르의 보호를 받았다. 
그리고 현재 러시아가 국가의 기원을 키이우로 생각하는 근거가 되었다. 

우크라이나화폐에 등장하는 코사크족장은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이반 마제파밖에 없다. 마제파는 외국에서 더 유명한데 볼테르, 바이런, 푸슈킨, 빅토르 위고가 그에 대한 작품을 남겼다. 유럽 오페라와 북미연극에도 등장했고 군주이자 연인으로 묘사되었다. 
모스크바는 이전 족장 2사람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고 가족도 처형했는데 마제파는 무려 20년(1687~1709년)동안 코사크국의 족장으로 있었고 자연사했다. 왼쪽 강변 출신으로 동방정교 귀족가문 출신이었고 키이우대학과 바르샤바 예수학교에서 공부했고 서유럽에서 포병술을 배웠다. 
귀국 후에는 폴란드왕정에서 외교와 군사업무를 했고 도로쉔코에게 합류했다가 자포로자 코사크족에게 포로가 되었다. 볼테르의 작품을 보면, 그는 폴란드 고위직의 젊은 아내와 사랑에 빠졌다가 나체로 말에 묶여 평원에서 끌려다녔다고 한다. 자포로자 코사크가 죽기 직전의 그를 발견하고 치료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자포로자 코사크는 마제파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고등교육과 외국경험이 많은 그를 장교로 받아들였다. 

 


마제파는 족장에 선출되자 코사크국의 경제, 종교와 문화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키이우 루스 시절의 대성당을 모두 복구했고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볼쉐비키Bolshevik혁명 후에 키이우를 사회주의수도로 바꾸겠다며 모두 무너트렸다. 
그는 표트르가 이복누나 소피아Sofia와 권력투쟁을 벌일 때에 표트르 편을 들어 표트르가 만든 안드레아St. Andrew훈장을 받은 첫 번째 신하가 되었다. 코사크장교단이 반역의 기미가 있다며 차르에게 제보하자, 표트르는 그 내용을 그대로 마제파에게 보냈을 정도로 신뢰했다. 그리고 마제파가 제보자들을 공개처형할 수 있게 허락했다. 

 


1708년 가을, 대북방전쟁(1700~1721)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 표트르와 마제파의 밀월관계가 완전히 깨졌다. 전쟁 초기에는 스웨덴이 압도했다. 카를 12세는 러시아동맹인 폴란드의 강건왕 아우구스트Augustus the Strong를 축출하고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표트르는 초토화전략을 벌이며 퇴각했는데 코사크 지도층이 그 피해를 모두 입었다. 더구나 표트르는 코사크연대를 동원해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 주변에 운하를 파서 코사크 장교단의 불만이 엄청난 상태였다. 
표트르는 전쟁과 개발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중과세를 물렸고 행정개혁으로 코사크국은 러시아의 일반 주로 전락할 판이었다. 

 

대북방전쟁은 2차세계대전과 함께 러시아의 양대전쟁입니다. 위 그림은 스웨덴기병이고 초반에는 러시아군이 지리멸렬한 상태로 상대가 아예 안되었습니다. 

 

폴란드 강건왕은 칭호가 창피할 정도로 이리 저리 도망다녔고 폴란드는 외세의 전장으로 추락합니다. 

강건왕은 희대의 정력왕이기도 했습니다. 곳곳에 어마무시한 숫자의 자녀를 만들었습니다. 

마제파는 카를 12세와 이미 내통하고 있었지만 스웨덴왕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우회할 때까지 봉기하지 않았다. 러시아와 차르가 코사크국을 보호한다는 합의를 먼저 깨트렸기 때문에 차르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1708년, 마제파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카를 12세의 선봉대에 합류했다. 코사크족 전체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출발했는데 이것이 큰 실수였다. 표트르는 그의 배신을 알자 대규모 러시아군을 보내 수도 바투린Baturyn을 공격해 마제파가 스웨덴군을 위해 모아둔 군수품을 모두 빼앗았는데 코사크군은 영문을 몰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바투린 병사와 시민 10,000명 이상을 학살했는데 지금도 유골이 발굴되고 있다. 차르는 배신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차르는 마제파를 배신자로 낙인찍고 사로잡으면 유다훈장을 달겠다고 조롱했다. 

마제파는 코사크영토, 조국에만 충성한다며 족장은 차르에 충성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지만 표트르의 보복에 놀란 코사크대령들이 대거 전열을 이탈해 러시아에 가담했다. 특히 마제파는 일반 시민의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동방정교 신도들은 개신교의 기둥인 스웨덴보다는 동방정교 차르를 선택했다. 
1709년 7월 초, 25,000명의 스웨덴군이 폴타바부근 들판에서 50,000명의 러시아군과 격돌했다. 코사크족은 양측에서 보조병으로 참전했는데 이미 유럽정규군과 비교할 수 없는 전력이라는 증거였다. 코사크의 무용담은 과거의 전설이었다. 
3~7,000명이 마제파와 스웨덴군을 지지했고 9,000~21,000명이 차르진영에 가담했다. 카를 12세에게 병력차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전에도 그는 훨씬 압도적인 적을 여러 차례 격파했었다.

 

소년왕 카를 12세입니다. 왕으로서는 결함덩어리였지만 군지휘관으로 역사를 통틀어 첫번째를 다툴 정도로 용맹스럽고 무모했습니다. 왕이면서도 전장에서 늘 선두에 섰고 그때문에 결국에는 패배하게 됩니다. 저 모습도 일선 참호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다가 죽기 바로 직전의 모습입니다. 

만약 러시아가 이전의 무기력한 차르였다면 세계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텐데, 하필이면 러시아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표트르대제가 상대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적지에서 겨울을 보내 전력이 크게 약하되었고 며칠 전에 입은 부상 때문에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지 못하고 여러 지휘관에게 명령을 전달했는데 혼란이 일어났다. 
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뒀고 카를과 마제파는 우크라이나를 떠나 오스만령 몰다비아로 피신했다. 1709년 가을, 마제파는 몰다비아 벤데르Bender에서 사망했고 카를은 고국으로 5년 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폴타바전투는 대북방전쟁의 전환점이었는데 발트해와 스웨덴의 패권이 멀고도 먼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결정되었다. 

 

마제파가 카를 12세에게 오스만제국으로 넘어가자고 권유하는 모습입니다.

카를 12세는 오스만제국이 귀국하라고 권해도 러시아에 복수하겠다며 버텼고 강제납치를 시도할 정도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오스만제국이 표트르를 상대로 대군을 일으켰을 때에, 왕이 재상의 뒤를 따라다닐 수 없다며 참관(참전이 아니라)을 거부했다가 표트르를 사로잡을 마지막 기회를 놓칩니다. 

러시아의 승리는 키이우 성직자과 차르의 권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차르는 전투 전에 키이우대교구가 마제파를 배신자로 파문시키라고 명령했었다. 전투 후에 마제파를 선대의 영웅과 비교했던 키이우대학은 마제파를 저주하는 긴 설교를 했다. 그리고 표트르의 개혁과 절대권력을 지지하는 기구가 되었다. 표트르를 조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표트르는 모스크바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키이우대학에서 현대식교육을 받은 학생들을 행정에 대거 고용했다. 수백 명이 모스크바로 이동해 동방정교 주교부터 군종신부와 같은 자리를 맡았다. 조국 러시아라는 개념이 퍼지게 되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표트르는 마제파의 배신에 충격을 받고 코사크국을 제국의 제도와 행정체제 안에 통합했다. 러시아인이 새 족장을 감독했고, 수도를 바투린에서 흘루히브Hluhiv로, 러시아국경 부근으로 옮겼다. 러시아군이 코사크국에 영구주둔했다. 
마제파를 지지했던 코사크장교가족은 추방시키고 재산을 몰수했다. 

1721년,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자, 표트르는 모스크바차르국을 러시아제국으로 바꾸고 첫 번째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족장이 죽자 더 이상 족장을 선출하지 않고 아예 없애버렸다. 코사크족이 새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해 항의했는데, 표트르는 항의단 대표를 감옥에 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