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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5부)

by uesgi2003 2012. 11. 7.


요즘 스마트폰 없이는 잠시도 가만히 못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예를 들면 지하철에서 이어폰없이 DMB를 시끄럽게 시청하거나 극장에서 환하게 액정을 켜고 카카오톡을 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봅니다.


제가 한 체격(182cm/97kg)과 한 성질하는데다가 권투를 배웠던 적이 있어서 '무력'과 '욕설'로 제압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 때마다 저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 나들이 기분을 완전히 망치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문자를 확인할 수도 있고 지루해서 DMB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한 두 번에 그쳐야 하고,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서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숙이거나 소리를 낮춰야겠죠. 자신만을 생각하는 행동은 결국 돌고 돌아서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자신이 손해보고 싶지 않은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말아야겠죠.


5부에서는 25번째 이야기, 이 순신장군님에 대해서 건너뛰고 26번째 이야기로 바로 넘어갈 생각입니다.

이 순신장군님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려져있지만 역사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다른 지도자보다는 조금 더 자세하게 6부에서 따로 설명할 예정입니다. 그러니 왜 넘어갔냐는 댓글 달지 말아주세요. 

 

- 다음 에디터가 크롬과 같은 일부 브라우저에서는 오류를 일으켜서 IE에서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 그림은 대부분 클릭하면 커집니다.

- 불편하다는 분들이 많아서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인명과 지명을 설명합니다. 현지어를 사용하던 이전의 제 이야기와 약간 다른 발음이 사용됩니다.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예정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28. 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Peter the Great 
30. Robert Clive 
31. George Washington 
32. Benedict Arnold 
33. Napoleon I 
34. Horatio Nelson 
35. Carl von Clausewitz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24. 이반 4세(Ivan IV) - 1530년~1584년

 

이반 4 또는 폭군 이반(Ivan the Terrible)으로 알려진 그는 1533년부터 모스크바 대공(Grand Prince of Moscow)으로 카잔 한국(Khanates of Kazan), 아스트라칸 한국(Astrakhan), 시베리아를 합병해 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만들었고 번째 짜르(Tsar of all Russia) 되었다.  

그의 복잡한 성격에 대해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는데, 지적이고 신앙심이 깊었지만 화를 자주 냈고 정신병에 가까운 발작을 일으켰다. 심지어 후계자인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때려 죽인 일도 있었고 지능이 크게 떨어지는 표도르 1세가 왕위를 이었다.

이반은 뛰어난 외교관이자, 예술과 상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지만 편집증세에 가깝게 귀족을 의심하고 잔인하게 처형했다

 

이반이 3 때에, 아버지가 화상을 입은 후유증으로 죽으면서 모스크바 대공이 되었다. 어머니 엘레나 그린스카야가 섭정을 했지만 이반이 8 때에 독살되었고 주요 귀족에게서 박대를 받았다.

1547 1 16, 16살의 나이로 짜르가 되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짜르는 비잔티움 황제, 타타르 칸과 같은 권력을 가지며 자신의 의지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 공표를 했고 신의 뜻을 대신하는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면서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1547 대화재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이반의 초기 통치는 평화로운 개혁과 현대화 과정을 거쳤다. 그는 정규군을 설립하고 귀족의회를 인정하고 법을 개선했으며 전국의 종교의식을 통일시켰다. 러시아 북동부 변경에는 자치 정부를 허용했다.

1553. 이반은 모스크바 인쇄창을 설치해 번째 신문을 발행했고 종교 서적을 찍어냈다. 그러나 수구세력의 반발을 사서 인쇄창이 불타고 번째 러시아 인쇄전문가들이 리투아니아 공국으로 달아나는 일이 벌어졌다. 이반은 인쇄창을 계속 지원해 1568년부터 책들이 발행되었다 

1560년대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에는 불행이 겹치면서 이반은 극단적인 정책변화를 일으켰다. 가뭄과 기아가 전국을 휩쓸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군 침공, 타타르 침공, 스웨덴과 폴란드의 해상봉쇄가 있었고 번째 부인은 독살되었다. 측근 명이 리투아니아로 망명해 러시아를 침공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때부터 이반은 귀족을 병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1564 12 3, 이반은 모스크바를 떠나면서 귀족과 성직자들의 배반으로 왕위를 내려놓겠다는 발표를 했다. 귀족들은 모스크바 공국 시민들의 분노가 두려워 절대적인 반역자는 짜르의 결정만으로 처형할 있다는 권력을 약속했다.

이반은 권세가의 주요 지도자들을 처형하거나 추방하기 시작했다. 1566년에는 12,000명의 귀족 중에서 570 만이 이반의 측근으로 인정받았고 나머지는 모두 추방되었다.

1570 전염병이 번지면서 노브고로드(Novgorod)에서는 10,000명이 죽었고 모스크바에서도 매일 600~1,000명이 죽어갔다. 노브고로드의 귀족들이 배반하려 한다고 의심한 이반은 측근 귀족에게 도시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주요 도시 하나였던 노브고로드는 파괴되었다. 3,000 정도의 시민이 죽었고 대부분의 시민은 다른 도시로 도망쳤다.

이반의 의심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는데, 여왕에게 영국에 자신의 피난처를 마련해달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였다 

 

이반이 어렸을 때에 카잔 한국이 모스크바 공국을 자주 침공했었다. 1552 6 16, 이반은 150,000명의 러시아군을 이끌고 카잔을 침공해 8 30일에는 타타르 수도를 포위했고 10 2일에 함락되었다. 60,000~100,000명의 러시아 노예가 해방되었고 짜르는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성바실리 성당 등을 지어 축하했다.

1556년에는 아스크라칸 한국을 합병하고 볼가 강의 최대 노예시장을 폐쇄시켰다. 카잔 한국을 비롯한 영토 확장으로 러시아는 다민족, 다종교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볼가 강으로 진출하면서 오토만 제국과 긴장이 높아졌고 1569 오토만 제국이 병력을 보내 아스트라칸과 아조프(Azov) 포위하자 이반은 오토만 제국과 평화협상을 맺었다 

발트해로 진출하려고 스웨덴, 리투아니아, 리보니안 튜토닉 기사단과 24 동안 리보니아 전쟁을 벌였다. 적의 평화제안을 무시했던 이반은 1579 가뭄과 전염병의 피해를 입으면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리투아니아 공국은 폴란드와 합병하면서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라는 정력적인 지도자를 얻었고 오토만 제국은 러시아 남부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토리는 리보니아(Kingdom of Livonia) 러시아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1579~1581 원정에 나서 스웨덴과 함께 러시아에게 점령당한 영토를 상당부분 되찾아서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이반의 통치 후반기에는 크리미아 타타르가 남부 국경을 위협했다. 크리미아의 (Khan Devlet I Giray of Crimea) 모스크바 부근을 자주 침공했고 1571년에는 40,000명의 크리미아와 터키군이 국경을 넘어왔다. 대부분의 병력이 리보니아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6,000명에 불과한 모스크바의 수비대는 속수무책이었다. 크리미아 연합군은 모스크바를 약탈하면서 10,000~80,000명의 시민이 불타 죽었다.

위기에 몰린 이반은 크리미아에게 아스트라칸을 넘겨주며 시간을 벌은 후에 1572 반격준비를 했다. 1572 크리미아 칸은 12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다시 공격했고 60,000 정도의 러시아군이 일주일 동안 몰로디 전투(Battle of Molodi) 벌였다.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대승을 거둬 크리미아 칸과 오토만 술탄은 이상 러시아를 침공하지 않았다.

 

이반은 조공을 바치지 않는 시베리아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츄바시 전투(Battle of Chuvash Cape)에서 시베리아 칸을 물리치고 시베리아를 합병했다.

 

이반은 1584 3 28 체스를 두던 중에 발작을 일으키며 죽었고 무능한 표도르에게 왕위가 넘어간 후에 그가 1598년에 죽은 후에는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반의 끊임없는 확장은 경제적으로는 러시아를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유럽과 직접 국경을 맞대면서 유럽의 사상이 유입되었고 피터 대제와 캐서린 여제가 러시아를 유럽최대의 국가로 만들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우에스기 왈: 그림은 이반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겠다고 간청하는

면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최근에 재조명되고 있는데 러시아로 그로즈니라는 호칭은 영어의 The Terrible(폭군)이 아니라 The Formidable(막강)으로 해석한다고 합니다.

그는 말년에 임신한 며느리를 폭행해 유산시킨데다가 항의하는 아들을 때려죽이는 편집증세를 보였습니다. 옆의 그림은 아들을 폭행해 중상을 입히고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Ivan the terrible은 러시아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제작시기가 1944년으로 러시아가 한창 전쟁 중일 때여서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스탈린에게서 3부작 제작 허가를 받았었는데 2부에서 스탈린의 심기를 거슬러서 3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1부는 러시아어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DVD를 가지고 있는데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군요.

http://www.youtube.com/watch?v=kyGVNXC9yzo&feature=related)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 1543년~1616년

 

실질적으로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시킨 무장으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해 에도 막부의 첫 번째 쇼군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1543년 1월 31일 미카와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이에야스의 가문인 미카와 마쓰다이라 씨는 아버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清康)가 살해당한 모리야마의 변 사건이 발생한 후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복종하고 있었고 서부는 오와리의 오다 노부히데가 계속 노리던 상황이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여섯 살의 이에야스를 인질로 받아들였지만 중간에 오다 가문에 납치되어 오와리에서 2년 동안 인질 생활을 했는데, 오다 씨의 대접은 의외로 관대했다고 한다. 마쓰다이라 가문이 오다와 연합하는 것을 우려한 이마가와는 마쓰다이라 가문과 그 가신들의 영지를 전부 몰수하고, 오다 영지를 공격해 이에야스를 인질로 다시 데려갔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8세부터 19세까지 인질로서 생활하였다. 인질 기간 동안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의 돌격대 역할로 피폐해졌지만 이에야스는 최고의 학문과 병법을 공부하는 기회가 되었다.

 

16세가 된 이에야스의 결혼 상대는 이마가와의 가신의 딸이자 요시모토의 조카이기도 했던 쓰루히메(후의 쓰키야마도노)였다. 이 결혼은 혼인 관계를 통해 이에야스가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기 위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계획이었다.

이에야스의 생애 첫 출전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측으로 넘어간 스즈키 시게타쓰의 데라베 성을 공략하는 것이었다. 이에야스는 방화 작전으로 데라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히로세 성·고로모 성·이호 성에서도 같은 방화 전법으로 오다 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오다카 전투에서는 밤을 틈타 군량미를 전달하기 위해 기습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560년, 이에야스의 계속된 승리로 자신감에 도취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상경전을 벌여 25,000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씨의 본거지인 기요스 성을 포위했지만,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기습을 당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사했고 오카자키로 돌아간 이에야스는 인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이에야스는 혼다 다다카쓰, 사카이 다다쓰구, 사카키바라 야스마사 등을 앞세워 마쓰다이라 영지를 확장하다가 1561년 독립했고 오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와 1562년 기요스 동맹을 결성하였다. 기요스 동맹은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계속 유지되어 배반이 일상적이었던 전국시대에서 보기 드문 동맹이었다.

 

이에야스는 내정을 어느 정도 정비한 후 이마가와의 영지를 공격해 미카와를 완전히 통일했다. 그리고 다케다 신겐과 이마가와의 영지를 두고 오이 강을 경계로 분할한다는 이른바 가외기리 협정을 맺어 동맹을 결성하였다. 신겐과 함께 이마가와 가문을 멸망시키며 도토미와 미카와의 전역을 확보한다. 

다른 한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요청을 받고 하마마쓰로 다시 진군, 아자이 나가마사·아사쿠라 요시카게와의 아네가와 전투, 신겐과의 미카타가하라 나가시노 전투를 거치며 입지를 크게 넓혀갔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와 장남 오다 노부타다가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반으로 할복하는 혼노지의 변이 발생했고 같이 초청받았던 이에야스가 서둘러 미카와 국으로 탈출한 후에, 아케치 미쓰히데를 제거하여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수를 쳐 아케치를 죽이자 단념하고 철수했다. 대신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가 미노 일대를 점령하자, 1582년 호조 씨를 포섭하여 오다, 도쿠가와, 호조가 동시에 가이 국을 공격하여 다케다 씨를 멸망시켰다. 

같은 해 이에야스는 스루가, 도토미, 미카와 등 3개 국으로 영지를 넓혔다. 한편 히데요시는 아케치를 죽인 후 기요스에서 오다 가문의 적손인 산포시(三法師)를 앞세우며 사실상 오다의 세력을 계승했다. 이에야스는 반 히데요시 세력을 형성하며 히데요시에 불만이 많았던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손잡았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회유할 목적으로 조정을 통해 그에게 정4품 하계 좌근위권중장(左近衛權中將) 벼슬을 제수했는데, 이는 종5품 하계였던 히데요시보다 더 높은 직위였고, 노부카쓰와는 같은 직위였지만, 이에야스는 이를 거부했고, 히데요시가 종3품인 참의(參議)로 이에야스를 천거하자 오히려 화를 냈다.  

히데요시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마키 산 북쪽의 가쿠덴(楽田)에 진을 치고,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카쓰의 연합군과 장기적으로 대치했다. 1584년 4월 9일 이에야스의 선제 기습으로 나가쿠테에서 히데요시의 선봉대가 궤멸당하자 다시 전투는 장기 지구전으로 바뀌었고, 11월에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카쓰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가 계속 싸울 명분이 사라지자 히데요시에게 인질로 보내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강화 이후의 냉전 과정에서 전부터 히데요시와의 우호 관계를 건의해 오던 중신 이시카와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설득을 받아 히데요시 측으로 출분하면서[62]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히메와의 정략 결혼을 거쳐 1586년 히데요시에게 형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갖추고, 복종을 맹세했다.

통일 이후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교토에서 최대한 떨어뜨리기 위해 도카이도의 5개 국을 거두어들이는 대신 간핫슈 지역과 이즈(伊豆)를 하사하는 영지교환 명령을 내렸다. 대신들의 전쟁의지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의 결과를 받아들인 이에야스는, 아직 민심이 수습되지 않은 호조 가문의 옛 영지 에도로 입성했고 불안감을 느끼던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겠다며 에도 성에 입성할 때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평상복을 입었고 닷새 후 주민 모두에게 쌀을 무상으로 배급했다. 자신의 직할지 1백여만석에는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의 유신들에게 다이칸(代官)이란 지방관직을 주어 행정을 관리하도록 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효율적 제도와 다른 지역과 산으로 격리된 간토의 지리적 특성이 맞물려 간토를 지배하던 이에야스는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나중에 "이에야스는 후퇴하여 제국을 건설했다"는 속담이나 "모든 길은 에도로 통한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에도 건설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다른 지방의 다이묘들 중간에 서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히데요시의 중신에게까지 큰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사이가 벌어진 히데요시의 문관파와 무장파 사이에서 무장파를 지원해 이후에 벌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결정적인 지지세력을 얻게 되었다.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비롯한 다섯 다이로들에게 늦게 얻은 유일한 혈육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생전에 다이묘들 간의 혼인 관계 맺기를 금지했던 것을 무시하고 여러 다이묘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입지를 넓혀갔다. 그러자 같은 다이로였던 마에다 도시이에를 비롯한 나머지 다이로들과 부교들이 이에야스를 비난하면서 도요토미 가의 가신들은 이에야스를 따르는 무리와 마에다 도시이에를 따르는 무리로 나뉘게 되었지만 도시이에가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와 화해함으로써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1599년 이시다 미쓰나리(石田光成)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해 오던 도시이에가 세상을 떠나자, 이시다 미쓰나리 호소카와 다다오키에 집에 침입하여 호소가와 다다오키의 아내 호소카와 가라샤를 죽게 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한 무공파가 미쓰나리를 위협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으로 도망쳐 온 미쓰나리를 그의 거성인 사와야마 성으로 무사히 보내주었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와야마 성에 도착하는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공파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시다 미쓰나리의 관직을 일시적으로 파직시켰다.

한편, 아이즈로 돌아간 우에스기 가케카쓰가 새로운 성을 쌓고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이듬해인 1600년 이에야스가 여러 다이묘들을 이끌고 긴키를 출발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미쓰나리는 반도쿠가와 파를 결집시키기 위해 사이고쿠 다이묘들에게 격문을 돌려 군사를 일으켰고,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를 총 대장으로 하여 우키타 히데이에, 조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오타니 요시쓰구 등 8만 4천여명의 병력을 모았지만 세키가하라에서 참패를 당했다.

 

1603년 3월 24일, 이에야스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으며, 무로마치 막부 이래 여러 권력자들이 교토에 본거지를 둔 것과는 달리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에 막부를 개창하였다. 그 후 이에야스는 1604년부터 에도 성을 대대적으로 증축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나머지 중신들을 오사카 전투에서 궤멸시켜 전국시대를 끝냈다.

1616년 사냥을 나갔다가 복통을 일으킨 후에 3개월 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이에야스는 4월 73세의 나이로 죽었다. 다음과 같은 유훈을 남겼고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정권을 이어갔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를 필요 없다. 자유롭지 못함을 항상 곁에 있는 친구로 삼는다면 부족할 것은 없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면 궁핍했을 때를 걱정하라. 인내는 무사장구 (無事長久)의 근원이요,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그 피해는 너 자신에게 돌아갈 것이다. 너 자신을 탓할 뿐 남을 탓하지 말라. 미치지 못함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우에스기 왈: 일본 전국시대와 인물에 대해서는 이전 이야기에서 어느 정도 설명되었기 때문에 관심있는 분들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http://blog.daum.net/uesgi2003/3

일본 전국시대 전투 정리 http://blog.daum.net/uesgi2003/26

일본 전국시대 성 정리 http://blog.daum.net/uesgi2003/29

오사카 공방전 http://blog.daum.net/uesgi2003/159   http://blog.daum.net/uesgi2003/160    http://blog.daum.net/uesgi2003/161

그리고 전국시대 배경, 다케다 신겐, 오다 노부나가, 다른 인물들의 일화 등등 많은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으니까 여유있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 1567년~1625년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 또는 나사우의 모리스(Maurice of Nassau, Prince of Orange)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세습 스타드홀데르(stadholder:총독)으로, 아버지 침묵왕 빌렘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전략·전술 및 공병술을 발전시켜 네덜란드 육군을 당대 유럽에서 가장 근대적인 군대로 육성했다.

 

마우리츠는 침묵왕 빌렘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오라녜 공(公)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1618년 이복형이 죽고 난 후에 실질적인 통치권을 물려받았다. 빌렘 1세와 정신분열증세를 보이던 작센의 안나와의 불행한 결혼에서 출생한 마우리츠는 어린시절 예민한 성격을 보였으며 스페인의 전제군주 세력에 맞서 빌렘 1세가 투쟁을 벌이던 수년 동안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성장했다. 게다가 빌렘 1세의 동맹세력들이 이탈하거나 배반하고 마침내는 1584년 암살당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그의 소년기는 암울했다. 따라서 이같은 경험들은 당연히 그에게 신중함을 더해주었으며 적대자들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도 의심스런 눈길로 보게 만들었다.

1584~86년은 그에게 위기의 시기였다. 영국이 스페인에 맞서 일어난 네덜란드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레스터 백작을 대장으로 한 원정군을 파견해 잠시 네덜란드의 방어능력이 보강되었지만 오히려 몇 가지 정치적 실수를 해서 반란세력의 명분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마우리츠는 유능한 정치가이며 홀란트 출신의 용병 요한 반 올덴바르네벨트의 도움을 받았다.

마우리츠와 올덴바르네벨트, 그리고 마우리츠의 사촌 프리슬란트의 총독 빌렘 루이스 세 사람의 지도 하에 네덜란드 북부의 주들은 스페인에 강력하게 대항하며 무역과 해운업을 통해 계속 부를 키워나가면서 독립을 준비했다.

 

올덴바르네벨트는 내정과 외무를 관장했으며 마우리츠는 빌렘 루이스의 도움을 받아 총사령관으로서 군사문제에 전념했다. 어린시절부터 수학·탄도학·공병술에 매료되었던 마우리츠는 군대의 규모를 줄이고 조직을 개선했다. 그당시 모든 군대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골칫거리인 반란을 근절시키기 위해 그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병사들에게 적절하고도 신속하게 급료가 지불될 것임을 확신시키고 또한 우수한 무기 지급과 정규 훈련의 실시, 그리고 요새 공방전 전술을 훈련시켰다. 마우리츠의 군사작전의 비결은 포위전에 있었다. 포위전은 당대의 지배적인 전쟁 유형이었는데 그는 네덜란드의 모든 기술과 과학을  포위 전술에 적용시켰다.

(그림은 당시 부유했던 북유럽 정예부대인 흉갑기병)

 

마우리츠가 기울인 노력은 1590년대에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나사우 가문이 위치하고 있던 브레다를 시작으로 차례차례 적들의 요새를 장악해나갔다. 그는 용맹보다는 냉철하고 체계적인 계획이 두드러지는 여러 차례의 군사행동을 통해 스페인의 방어선을 동쪽·남쪽·북쪽에서 물러나게 만들어 현재의 네덜란드 크기와 비슷한 정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남부지역에서의 성과는 부진했다. 마우리츠는 성미 급한 올덴바르네벨트로부터 스페인의 정복으로 분할된 남부 및 북부 네덜란드를 다시 통합하라는 설득에 마지못해 응했다. 그는 플랑드르를 침략해 그 곳을 자극함으로써 스페인 정복자들을 물리치려고 시도했으나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1601년 니우포르트(Nieuport 그림 참조)에서 처음에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곧 후퇴했고 나중에는 오스텐데도 포기해야 했으며 올덴바르네벨트의 낙관론이 전적으로 오판이었음이 입증되었다. 남부지역 주민들은 홀란트인들의 호소에 냉담했으며 심지어는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마우리츠는 정보수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그는 1607년 정전(停戰)에 합의한 데 이어 1609년 스페인과 12년간의 휴전을 체결했으며 네덜란드의 분할상태는 계속 이어졌다.

 

마우리츠는 점점 더 강한 자신감을 갖고 프랑스 왕과 영국 여왕에게 당당하게 홀란트의 이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덴바르네벨트가 군사문제에 계속적으로 간섭하는 데 대해 강한 분노를 갖게 되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오스텐데 공격 역시 이들의 관계에 심각한 긴장을 초래했으며 휴전협상으로 불화가 더욱 악화되었다. 휴전이 체결된 후 10년 동안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는 전쟁상태로 변했다.

올덴바르네벨트는 당시의 격렬했던 신학과 정치의 문제에 깊숙이 빠져들어 있었던 반면 마우리츠는 참을성있게 때를 기다리며 지지세력을 조용히 규합했다. 올덴바르네벨트가 도시에서 직업군인의 소집을 늘리기 위한 권한을 지지세력들로부터 얻어내자 마우리츠는 재빨리 1617년 9월 28~29일 남부 홀란트의 브릴로 진격해 소집된 군인들을 해산시켰고 1618년 여름 모든 직업군인들을 해고해버렸다.

이제 올덴바르네벨트를 제거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1618년 8월 29일 올덴바르네벨트는 체포되어 이듬해 5월 13일 사형시켰다. 오래된 정적을 재판하고 사형을 집행한 것은 마우리츠의 품성과 이력에 하나의 오점으로 남았다.

올덴바르네벨트를 제거한 후 그는 전례없는 권력을 행사했으며 이름만 총독이지 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정통 칼뱅주의와 동맹관계를 맺어 오라녜당을 창설하고 지방과 중앙의 관직을 모두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운 후 그는 더이상의 '혁명'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1621년 그는 자신이 12년 동안 혐오해왔던 스페인과의 휴전을 보란 듯이 파기했다. 칼뱅주의자 영웅이었던 마우리츠는 곧 합스부르크가의 강력한 위협을 받자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협정을 맺었다.

그는 1625년 간장병으로 사망하기 직전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첫 승리를 거두었던 장소 브레다를 다시 스페인에 넘겨주고 말았다.

 

생애 마지막 10년간은 그의 명성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위대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의 호의적인 성품은 평화시의 마우리츠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크게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590~1609년 스페인을 물리치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영토를 확장해 변경지역의 안전을 확보한 공로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전체를 재통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올덴바르네벨트에 대한 그의 끈질긴 복수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오라녜파와 반오라녜파로 오랫동안 분열시켜놓았다.

마우리츠는 복잡하고도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린시절의 성장환경은 그에게 공와 의심, 그리고 원한에 쉽게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장에서는 대단한 용기와 함께 관대한 아량을 발휘할 줄도 알았다.

 

(우에스기 왈: 당시 유럽은 카톨릭 구교와 신교 간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강대국의 식민지였던 북유럽을 포함한 군소 영주들이 종교전쟁을 기회로 독립과 세력확장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중남미에서 발견한 막대한 황금을 바탕으로 유럽 최강의 해군과 육군을 양성했지만 교황의 요청에 따라 유럽 전역에 병사를 보내 종교전쟁에 참전해 국력을 탕진하게 됩니다.

스페인이 종교전쟁에 국력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영국과의 전투에 집중했다면, 미국 대륙에서 황금이 나오지 않는다고 버려두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대학입시에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영어의 2배가 넘는 인구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겠죠.

역사는 가정이 소용없지만요.

당시 전투장면을 제대로 재현한 영화가 있는데 1643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벌인 Rocroi 전투입니다. 흉갑기병도 제대로 등장하고 적나라한 근접전 장면이 연출되었으니까 소리 높여서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깃발은 스웨덴 깃발이 나오는군요. 스웨덴도 참전했는지 아니면 비슷한 깃발을 프랑스가 사용했는지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 제가 강추하는 동영상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625iTKITRoA&feature=rel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