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기타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7부)

by uesgi2003 2012. 11. 16.


날씨가 많이 추워지고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 오면 넉넉하지 않은 분들이 서글퍼지는데, 그런 분들 올해와 내년 겨울은 더욱 추워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다 못해 지하주차장 찾아드는 길냠이들도 마음씨 좋은 집사들을 만나는데, 어려운 시기이지만 더 어려운 분들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제가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반드시 50%는 어려운 분들을 위해 내놓겠습니다. 우선 로또를 사야 하지만요 ㅡ.ㅡ 

워낙 저주받은 뽑기 운이라... 하다 못해 디아블로 3에서도 남들 쉽게 먹는 전설템도 제대로 못 먹고 있을 정도입니다. 


쉬엄 쉬엄하다보니 50명의 지도자 명단이 이제 절반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이번 7부는 쉽지 않겠군요. 첫 번째 인물부터 영문자료를뒤지더니 로버트 클라이브는 더 많은 영문자료를 뒤져야 하는군요.


세상을 바꾼 50명의 지도자 - William Weir, The Career Press

 

1부

1.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Sargon of Akkad)
2. 해양족(Sea Peoples) 
3.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4. 손자(Sun Tzu) 
5.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6.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 
7. 한니발(Hannibal)

 

2부

8. 진시황(Qin Shih Huang) 
9.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10. 훈족의 아틸라(Attila the Hun) 
11. 무함마드(Muhammad) 
12. 샤를마뉴(Charlemagne) 
13. 오토 대제(Otto the Great) 
14. 토그릴 베그(Toghril Beg) 

 

3부

15.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 
16. 살라딘(Saladin) 
17. 징기스 칸(Genghis Khan) 
18.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4부

19. 잔다르크(Joan of Arc) 
20. 메흐메트 2세(Mehmed II) 
21.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22.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 

23.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5부

24. 이반 4세(Ivan IV)
26.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 
27. 나사우의 마우리츠(Maurice of Nassau) 

 

6부 

25. 성웅 이 순신(Yi Sun-sin) 

7부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8부예정

 

33. Napoleon I 
34. Horatio Nelson 
35. Carl von Clausewitz 
36. Simón Bolívar 
37. José de San Martín 
38. Sam Houston 
39. Winfield Scott 
40. Helmuth von Moltke 
41. Ulysses S. Grant 
42. Alfred Thayer Mahan 
43. Togo Heihachiro 
44. Giulio Douhet 
45. Adolf Hitler 
46. Heinz Guderian 
47. Yamamoto Isoroku 
48. Raymond Spruance 
49. Mao Zedong 
50. Matthew B. Ridgway


28.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Jean Baptiste de Gribreauval) - 1715년~1789년

장 밥티스트 드 그리보발은 18세기 프랑스 군의 포병을 혁신적으로 개선시킨 군인으로 유명하다. 그가 혁신시킨 포병전술은 미군이 계승했다. 그리보발은 프랑스 병사들의 처우를 개선시키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1715년 9월 15일에 태어난 그는 1732년 프랑스 군에 입대했고 3년 만에 장교로 승진했다. 1756년~1763년 기간 동안 벌어진 7년 전쟁에서, 그리보발은 포병장군으로 오스트리아 군을 지원했다. 1762년 8월~9월 동안 프레드릭 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쳤고 오스트리아 군의 포병 사용에 영감을 받았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프랑스 군의 시대에 뒤떨어진 포병체계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정부 관료들이 반대했다. 

1765년, 그는 포의 표준규격을 만들고, 용도에 맞는 전용 포를 설계하고 포병이 쉽게 다룰 수 있는 경량 포를 배치했다. 그리고 마차와 전용 마부를 동원해 포의 기동력을 높였다.  


1776년, 그리보발은 포병 장군으로 임명되면서 나폴레옹을 포함한 젊은 장교들을 훈련시켰고 자신이 생각한 개선안을 더 큰 범위로 적용시킬 수 있었다. 그는 일반 병사의 급여와 처우를 개선시

켰으며, 포의 구경을 규격화하고 중량을 줄여 기동력을 높였다. 다른 나라에서 많이 사용되던 곡사포(howitzer)를 도입했고 물에 젖지 않고 더 가벼운 탄약마차를 설계했다. 그리고 포병 장교에게 필요한 전문교육과정을 만들었다. 그의 개혁 덕분에 프랑스는 당대 최고의 포병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고 19세기까지 최강의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리보발이 새로운 포를 도입하면서 발리에흐(Valliere) 포와 같은 구식포가 퇴역하게 되었고 비밀리에 미국으로 보내져 독립전쟁에서 귀중한 전력으로 사용되었다. 

독립전쟁 후에 미국 의회는 포병장군으로 영국장군 헨리 녹스를 임명했지만 많은 장교들이 그리보발의 훈련과정을 따랐고 그의 개혁안은 남북전쟁까지 미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보발은 1789년에 죽었고 그의 책 Tables des Constructions이 1792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포병전략전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었다. 


(우에스기 왈: 포에 대해서는 저도 막연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사이트에 아주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나폴레옹 당시와 그 이후의 야전 포에 대해서는 http://glob.egloos.com/v/2653071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http://blog.daum.net/nasica/4973554 에도 중복이지만 좋은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보발의 8구경 중포

그리보발의 12구경 중포 

그리보발의 16구경 대포 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

 

29.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 1672년~1725년

 

(우에스기 왈: 이 분은 제가 반드시 책으로 출판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리더십 개발'의 가장 좋은 교과서입니다. 비록 그가 폭군의 기질과 독재정치를 펼치기는 했지만 당시 유럽변방이었던 러시아를 과감하게 개방해 영국을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개혁시켜 지금의 러시아의 기초를 마련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자세한 이야기를 정리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 이야기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불편하다는 분이 많아서 현지어보다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이전 이야기의 이름이나 지명이 다릅니다. 전부 수정할 때까지는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이야기는 분량이 상당하니까 시간여유를 가지고 즐겨주십시오. 그리고 표트르 대제의 일생에 대한 책이 하루 빨리 여러분 앞에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표트르 대체와 러시아의 상황 

표트르 대제와 폴타바 전투

폴타바 전투 동영상)

 

30.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 1725년~1774년

인도의 클라이브로도 알려진 그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벵갈에 정착시킨 군 지휘관. 워렌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와 함께 인도를 식민지로 확보해서 영국왕실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아버지의 급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고 태어난 클라이브는 아기때부터 이모와 함께 살았다. 클라이브의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런던에 머물러야했기 때문이다. 이모부의 증언에 따르면 클라이브는 싸움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그는 학교에서 늘 문제를 일으켜서 퇴학까지 당했고 무리를 지어 상점을 습격까지 했다. 겁이 없어서 마을 성당 종탑에 기어 올라가 가고일처럼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릴 때에는 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계발(개발은 천연자원 개발에 사용합니다)에 매진해 하원에서 대단한 연설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1744년, 아버지의 힘을 빌어 동인도회사의 서기로 취직했고 인도로 떠났다. 브라질 해안을 순항하던 중에 배가 고장나 몇 개월 정박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때에 포루투칼어를 배웠고 인도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성 조지 요새에 도착한 그는 2년 동안 상점점원, 경리, 물품관리 등의 사무일을 봤다. 자연스럽게 총독의 서가를 드나들면서 책을 접하게 되었고 많은 지식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인도는 유럽본토의 정치역학에 따라 복잡한 상태였고 무역항로를 둘러싼 전투가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7세기~18세기 초까지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이 교역소와 무역권을 놓고 지역 인도 왕족과 연합하고 있었다. 군사력이 무역권을 결정지었기 때문에 유럽 상업회사들은 군대를 보유하기 시작했다.

1720년, 프랑스는 프랑스 동인도회사를 국유화하고 본격적으로 식민지 확보에 나섰고 영국과 충돌이 잦아지면서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인도에서는 1차 카르나틱 전쟁(First Carnatic War)이 벌어졌다. 1745년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공격한 후에, 1746년 9월 영국령 무역도시 마드라스는 프랑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클라이브는 동인도회사 군에 입대했는데 강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747년 3월, 프랑스군이 성 데이비드 요새를 공격해왔고 클라이브는 전공을 인정받아 승진했다.

 

1748년, 클라이브는 폰디체리 공성전(Siege of Pondicherry)에서도 전공을 세웠다. 영국으로 돌아가 정치가로 데뷔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클라이브는 1755년에 인도로 돌아가 데이비드 요새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1756년, 중요한 무역도시 캘커타를 지역 왕족에게 빼앗기자, 클라이브가 나서 탈환했다. 1757년 2월, 클라이브는 540명의 영국군 보병, 600명의 수병, 800명의 세포이(현지 인도군)만으로 100,000명의 벵갈 원정군과 맞섰다. 클라이브는 포위하고 있던 벵갈군을 뚫고 윌리엄 요새로 들어갔고 영국군의 과감한 작전에 놀란 벵갈군은 겁을 먹고 클라이브와 협상을 맺고 캘커타에서 물러났다.

6월 플라세이(Plassey 그림 참조) 전투에서 벵갈군과 다시 맞선 클라이브는 압도적인 적의 전력에 처음으로 행동을 주저했지만 지역 군벌의 배반을 사주해 벵갈군을 전장에서 몰아내고 벵갈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벵갈왕국의 엄청난 금고를 손에 넣은 동인도회사는 군사원정자금으로 사용했고 벵갈왕국의 자금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1760년 35세의 나이에 본국으로 돌아간 클라이브는 귀족지위를 인정받으며 정치활동을 했지만, 동인도회사는 부패와 무능력으로 엉망이 되었다. 1765년, 세 번째로 인도로 돌아간 클라이브는 자신이 직접 벵갈 왕위(정확하게는 지역군벌 나왑-Nawab)에 오른 후에 1767년 마지막 귀국 길에 올랐다.

동인도회사에서의 부패와 전횡에 대해 의회의 비난을 받은 클라이브는 1774년 11월 의문의 사망을 했다. 종이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주장도 있고 약물과용으로 심장마비에 걸렸다는 주장도 있다.

 

(우에스기 왈: 인도의 역사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인도 역사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약 70년 후의 인도 북부 역사에 대해서는 제가 정리한 이야기가 있으니까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201 )

 

31.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 1732년~1799년

미국의 초대 대통령.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총사령관으로 활약했고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1775년 대륙 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는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톤 렉싱턴 곤도르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미군을 지휘했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의 의견을 조율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왕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제정의회를 주재했고 1789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했는데 1795년 워싱턴은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과 제이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의회가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했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했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부채를 조성하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했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했다.

 

워싱턴은 1799년에 67세로 사망했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 칭송하였다.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유년 시절에 워싱턴은 측량 기사로 일하면서 버지니아 식민지의 지형에 대한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맏형이 유력한 가문이었던 페어팩스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당시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던 토마스 페어팩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752년에 형 로렌스가 죽으면서 부동산의 일부를 상속 받았고 로렌스의 직업이었던 식민지의 부관 임무 중의 일부를 떠맡았다.조지는 1752년에 버지니아 군대의 부관 참모로 임명되었는데, 스무 살의 나이로 워싱턴 소령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뒤에 영국군 정규군에 편성되어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참전하여 싸웠다. 참전 후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마운트 버넌 농장으로 돌아간 그는 1759년 마사와의 결혼으로 3,000명이 넘는 노예와 1만 7,000에이커의 땅이 그의 재산이 되어 그는 토지만 2만 2,000에이커나 되는 버지니아주 최고 갑부 중 하나가 되었다. 결혼 전 그는 자신의 친구의 아내였던 샐리 패어팩스와 불륜관계를 갖기도 했다. 

 

마운트버넌의 농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해, 명석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온갖 악조건과 싸우면서 끝내 승리를 거두어 미국의 독립을 성취하게 하였다. 그 후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림은 요크타운에서 항복하는 영국군).

미국이 탄생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아직도 대통령이란 자리가 무엇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 선출된 왕이라고 생각했고, 대통령인 자신도 선출된 왕이라고 생각하여 행동했다.

초기에 그는 그에 대한 칭호로 왕에게 붙일 수 있는 전하라는 단어를 좋아했고, 다른나라 왕처럼 위엄있는 몸가짐을 가지고 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했다. 유럽의 왕실을 본받아 많은 접견회와 파티를 열었고, 영국의 왕처럼 그는 미국 전역을 여행하였고, 국민들은 국왕을 맞이하듯 화려한 축하행사로 그를 환영했다.

이러한 그의 제왕과 같은 언행으로 새로 태어난 나라 미국의 새로운 직책인 대통령 지위는 처음부터 강력해졌다. 즉 그는 그 누구도 겪어보지 않은 미국과 대통령직을 구체화하는 업적을 이룩했다.

 

1797년 두번에 걸친 임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그가 대통령직에 사망할 때까지 영원히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며, 자기가 3번씩 임기를 맡는다면 장기집권을 위한 무서운 정치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대통령직을 떠나면서 그는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신념에 신성한 사료로 살아 있다. 이 고별사에서는 그는 무엇보다 통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민들에게는 정당간의 극심한 대립을 경고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대한 지나친 종속과 적대감을 경계하려고 했다.

그가 세운 두 번까지만 대통령 임기를 마친다는 전통은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선을 하면서 수정헌법 22조에 3선 출마금지, 타인의 임기로 2년 이상 대통령직에 봉직한 사람은 2번 이상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조항을 추가할 때까지 철칙처럼 지켜온 절제의 미덕이었다.

 

32.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 1741년~1801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으로 전쟁 초기에는 대륙군 (Continental Army)으로 참전했으나, 대륙군을 배반하고 영국군에 합류했다. 미국 독립 전쟁 초기의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나, 승진은 번번히 보류되었으며, 아놀드가 세운 공적들도 다른 장군들이 가로챘다. 또한 여러 정적들로부터 고발당해, 대륙 회의가 그 증언들을 일일이 조사했으나 외려 아놀드는 전쟁 수행을 위해 사비를 털었을 뿐만 아니라, 빚을 지고 있었다는 결과가 드러났다.

일련의 사건들로 불만을 품은 아놀드는 1780년 7월 웨스트포인트 요새를 영국군에게 넘기기 위해, 미국군에게 웨스트포인트 요새의 지휘권을 맡겨달라고 요구했으나, 아놀드의 편지를 지참하고 있었던 영국군의 존 안드레 소령이 체포당해 계획이 들통났다. 아놀드는 안드레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허드슨 강을 따라 내려가, 영국군의 수송선 HMS 벌처 호를 통해 탈출했다.

그 후 아놀드는 영국군의 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보잘것없는 보상금을 탔다. 그 후 영국군의 1부대를 지휘하며 싸웠으나, 요크타운 전투를 끝으로 전쟁이 끝나자 1782년 겨울, 영국으로 건너갔다. 아놀드 일가는 영국 왕실의 환대를 받았으나, 휘그당으로부터는 소외당했다. 1787년, 아놀드는 자식 리처드, 헨리와 상업을 하다가 1801년 사망했다.

미국에서 베네딕트 아놀드라는 이름은 "배신의 대명사"로 취급받고 있다.

 

미국 코네티컷에서 태어난 아놀드는 1757년, 캐나다에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과 맞서기 위해 16세의 나이로 민병대에 입대했다. 프랑스의 침공은 윌리엄헨리 요새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윌리엄헨리 요새에서 영국군은, 프랑스군에게 대패하여 항복했다.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영국군과 식민지군이 제시한 항복 조건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포로가 되어 호송 중이던 180명의 영국군이 학살당했으나, 프랑스 정규군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패전 소식과 일련의 사건을 들은 아놀드와 그의 중대는 후퇴해야만 했다. 이는 아놀드가 군대에 입대한 지 13일만이었다. 이 사건은 아놀드에게 프랑스에 대한 증오심을 남겼다.

1759년, 아놀드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놀드는 알코올 중독에 걸린 아버지와, 어린 여동생을 부양하게 되었다. 게다가 아놀드의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은 아놀드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더욱 심해져, 낮에도 술에 취한 상태로 행패를 부리다 여러 번 구속을 당하면서, 교회의 성찬식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우에스기 왈: 아놀드가 왜 50인의 지도자 명단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이 정도의 인물이 역사를 바꾼 것이 뭐가 있는지... 그냥 몰랐던 인물에 대해 알게되었다는 의미 정도로만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인물이 아니어서 이하 작은 전투참여와 그의 여생에 대해서는 위키 http://ko.wikipedia.org/wiki/%EB%B2%A0%EB%84%A4%EB%94%95%ED%8A%B8_%EC%95%84%EB%84%90%EB%93%9C 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의 캐나다 원정은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위에서 설명한 헨리요새 전투와 그 이후의 포로학살은 라스트 모히칸 http://www.youtube.com/watch?v=ZJv86RpLsVQ&feature=related 이 장면인 것 같군요.

 

아놀드는 미국인들의 증오를 단단히 사고 있는데 옆의 그림은 남부 분리주의자였던 제퍼슨 데이비스와 함께 악마취급을 받는 카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