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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그리스

세계최강 그리스 팔랑스 창병의 최후, 키노스세팔라이 전투

by uesgi2003 2013. 8. 7.


이제 서울은 폭염시작이군요. 그리고 휴가도 앞으로 1~2주 정도 절정이겠군요.


휴가를 가는 분들, 특히 젊은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음주운전은 절대로 안됩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음주운전으로 한 집안이 풍지박산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피해자 가정도 평생 치유되지 않는 피해를 입었지만 가해자의 부모님 역시 자식놈의 실수로 평생 그 짐을 짊어지셔야 합니다. 


음주운전은 반드시 다른 가정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휴가지에서의 음주는 곱게 그리고 적당히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동료들은 음주운전 반드시 말려야 합니다. 


오늘은 그리스의 천하무적 팔랑스 창병이 로마군에게 무릎을 꿇었던 키노스세팔라이 전투 이야기입니다. 지난 번에도 고대 기록가의 신뢰성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했는데, 마치 눈 앞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정리하려고 하니 좀 걸리기는 합니다. 


세계최강의 그리스 팔랑스 창병의 최후, 키노스세팔라이 전투


키노스세팔라이는 로마제국이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동 지중해 지역에 원정한 첫 번째 전투였다. 그리고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그리스의 팔랑스 창병과 로마군단 검병이 처음으로 자웅을 결한 첫 번째 전투이기도 하다. 


키노스세팔라이 위치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인 마케도니아는 당시 그리스 일대를 호령하고 있었고 로마의 확장을 계속 견제했었습니다. 큰 그림으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기병과 협동하는 그리스 팔랑스 창병은 300년 동안 서양의 전장을 지배해왔다. 로마의 키노스세팔라이 승전은 잘 훈련된 보병의 재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기원전 197년 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의 그리스군과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로마군이 그리스에서 서로에게 접근했다. 3일 동안 양쪽 군대는 키노스세팔라이(개 머리)라는 산등성이 양쪽에서 (서로의 위치를 모른 채로) 정찰 중이었다. 3일째 새벽은 폭우가 쏟아졌고 고지 전체는 짙은 안개로 뒤덮였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깃발을 든 병사가 길을 못 찾았고 로마군 대열은 뒤엉킬 정도였다. 

복병을 염려한 양쪽 지휘관은 적의 위치를 찾기 위해 기병을 보내 무력정찰을 했다. 산등성이 양쪽에서 올라오던 선봉대는 예상치 못한 조우를 했고 즉시 전령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렸다. 


전령은 양쪽 모두에게 실제보다 훨씬 과장된 보고를 했다. 즉시 본대가 투입되었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리스 부대 지휘관 한 명이 로마군의 기병대를 뒤쫓다가 (당시 로마군 기병의 전투력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약했습니다), 필리포스에게 로마군이 후퇴하고 있다고 보고를 했다. 

로마 본대와 교전을 했다고 믿은 필리포스는 고지를 점령하기로 하고 즉시 본대를 이끌고 고지로 향했다. 그리고 다른 지휘관 리카노르에게 나머지를 데리고 가능한 한 빨리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필리포스가 고지에 올라서자마자 이미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던 로마군 본대의 공격을 받았다. 플라미니누스는 계곡에 집결시켜두었던 병사들을 급히 고지로 올려서 그리스군을 고지에서 공격할 생각이었다. 필리포스는 팔랑스 창병에게 로마군의 공격을 밀어내라고 명령했고 로마군 대형이 곧 팔랑스 대형에 밀려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리스군은 로마군의 왼쪽을 압박했지만 로마 군단은 바로 작은 대열로 나뉘어 그리스군의 일체대형을 가볍게 회피해 첫 번째 기세를 허무할 정도로 가라앉혔다. 팔랑스 창병이 그대로 관통하려고 하자, 로마 검병이 좌우측에서 달려 들었고 팔랑스 일체대형은 곳곳이 쪼개져 나갔다. 니카노르의 부대가 고지에 도착하자 그대로 로마군의 우익을 공격했지만 바로 격퇴당했고 거의 전멸되었다. 

니카노르의 팔랑스가 궤멸하고 나머지가 도망치자 필리포스의 좌우익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승기를 잡은 플라미니누스는 20개 중대(40개 백인대, 약 1,600명)에게 그리스군 추격을 멈추고 필리포스의 왼쪽 뒤로 돌라고 명령했다. 20개 중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며 필리포스의 팔랑스 창병대열 뒤를 압박했다. 정면에 모든 공격력이 몰려 있는 그리스 팔랑스 대열은 무참하게 무너졌고 대학살이 벌어졌다. 

전투가 끝나자 필리포스의 25,000명 병력 중 절반이상이 전사했다. 로마군의 피해는 겨우 수 백 명에 불과했다. 

이후 600년 동안 로마의 단검병 군단은 서양의 전장을 지배하게 된다. 


그림과 같이 그리스 팔랑스 일체대형은 좌우 측면이 취약했고 뒤에서 공격을 받으면 전투가 불가능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후가 약한 것은 로마의 집체대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전투에서 전사가들이 분석한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전통적인 전투방식을 고집하지 마라. 그 당시 그리스군의 전술은 과거의 경험에만 의존했을 뿐, 그 전술을 새로운 적과 환경에 맞춰 개선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군은 로마군의 새로운 대형과 전술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패권을 넘겨주었습니다. 


2.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라. 자신에게 유리한 지형은 적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곳에 적의 반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3. 전장의 불확실성(Fog of War)을 기억하고 초기의 정찰보고는 반드시 확인하라. 초기 정찰내용은 언제나 과장되고 부정확하기 마련입니다. 플라미니누스와 필리포스는 이 사실을 잊고 양쪽의 본대를 바로 투입했습니다. 


4. 병력을 나누어 투입하지 마라. 필리포스는 병력을 순차적으로 투입했고 각개격파당했습니다. 더구나 로마군의 위치나 병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5. 단호하게 결정하고 행동하라. 전투가 시작되면서부터 순식간에 격렬해집니다. 로마군의 우익은 필리포스 본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니카노르의 증원부터 전력을 다해 막았습니다. 


6. 기선을 제압하라. 로마군은 고지에서 기선을 제압했기 때문에 니카노르의 합류를 막고 필리포스의 배후로 도는 등의 자유로운 전술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섣부른 선제공격은 더 큰 피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그리스 팔랑스와 호플라테스(Hoplite)의 그림입니다. 커지는 그림도 있으니까 클릭해서 자세히 감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