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대/그리스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영화 제국의 부활편) 1부

by uesgi2003 2014. 2. 28.


영화 300의 후속인 제국의 부활이 개봉예정이어서 이번에는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원정 이야기를 정리해봅니다. 영화 300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영화를 위해 상당히 과장되었죠. 물론, 그 당시의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이 없으니까 우기면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만...


요즘 기대했던 영화들이 졸작 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폼페이... 스토리가 워낙 막장이고 재난장면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서 화산이 터지는 몇 장면을 보고는 그냥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주인공을 캐스팅하는 순간부터 이미 폭망예약을 했고, 감독은 클래디에이터를 대놓고 베끼고... 미국에서 이미 만신창이로 두들겨 맞은 헤라클레스도 개봉하는 순간 IPTV로 직행할 분위기입니다. 레니 할린 감독의 상업적 감각을 기대했는데 영 아닌 모양입니다.

300: 제국의 부활도 시사회 뒷이야기가 심상치않습니다. 예고편은 꽤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불안했던 남자주인공의 미스 캐스팅은 확실해졌다고 합니다. 특히 이전 레오니다스를 기억하는 관객은 더욱 그렇다는군요.


영화가 폭망이면 제 이야기를 즐기러 오는 분들도 많지 않겠죠. 그래도 고정 독자를 위해 몇 차례에 나누어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영화 개봉이 코 앞이니까 레오니다스 이야기는 뒤로 돌리고 우선 크세르크세스의 원정이야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Xerxes)는 선왕이 10년 전에 시작한 과업을 한 번에, 그러나 체계적으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바로 그리스 정복이다. 



헬레스폰트Hellespont에 도착한 크세르크세스입니다. 기원전 480년 5월 10일, 그는 약 30~50 만 명의 다국적군을 이끌고 유럽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기원전 480년 9월 20일,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Salamis 해협 옆의 높은 언덕에 놓여진 황금왕좌에 오르고는 전장으로 선택한 장소를 둘러보았다. 헬레스폰트를 건넌지 4개월 그리고 테르모필레Thermopylae에서 저항하던 300명의 스파르타인과 700명의 테스피아인 700명을 죽인지 1개월 만에 이곳에서 대회전을 벌여 그리스 원정을 마무리지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리스 전역을 합병한 후에 유럽까지 정복할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선왕인 다리우스가 10년 전에 그리스를 침공했고 (저항이 미미했던 덕분에) 초반의 성공 후에, 마라톤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해 물러난 적이 있었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로 퇴각했고 그 이후에는 복잡한 내정에 시달리다가 기원전 486년에 병들었고 이집트의 반란을 처리하다가 죽었다. 

다리우스의 32살 먹은 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올랐고 이집트 반란을 순식간에 진압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와 그리스를 합병하려고 했던 선왕의 과업을 다시 시작했다. 

결정이 되자 상세한 계획이 수립되었다. 장군들은 군대를 모았고 원정지에서 필요한 엄청난 병참선을 준비했다. 외교관은 지나게 될 도시와 민족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제국의 모든 조선소는 수 백 척의 전함과 수송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원전 480년 봄이 되자, 크세르크세스 원정군이 준비를 마쳤다. 실제 규모에 대한 추측이 분분하지만, 수사Susa를 떠날 당시의 규모는 30~50만 그리고 1,300척의 전함 정도로 보인다. 원정군은 여러 나라에서 징병(그림참조)했고 주력은 당연히 페르시아군이었다. 중무장을 한 페르시아군은 이민족 병사와 다른 대접을 받았다. 




페르시아 제국은 해군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페니키아, 이집트 심지어 소 아시아의 그리스 용병까지 동원했다. 

함대와 군대는 북쪽으로 행군했다. 그리스군을 상대하기에 앞서 천연 장애물부터 정복해야 했다. 헬레스폰트(현재의 다르다넬레스Dardanelles 지도의 A 참조. 클릭하면 커집니다.) 해협은 길이 64km, 폭 1.6~6.5km로 아게해와 프로폰티스(지금의 마르마라Marmara 해)를 연결한다.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아비도스Abydos에서 2개의 다리로 연결되었는데, 하나는 페니키아인이 아마 줄을 사용해서, 다른 하나는 이집트인이 파피루스 줄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두 다리는 폭풍에 끊어졌고 크세르크세스는 책임자의 목을 벤 후에, 병사들에게 채찍과 달군 쇠로 해협을 300회 때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대의 사기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처벌하려고 했던 것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하루팔루스라는 마케도니아인에게, 1.7km와 3.4km 길이의 부교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하루팔루스는 314척과 360척의 함선을 동원해서 부교를 건설했다. 

부교가 완성되자 크세르크세스는 병력을 수사에서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5월 10일 새벽, 왕은 해협에 포도주를 부으며 신에게 유럽정복을 기원했다. 그는 황금술잔, 황금대접과 페르시아 단검을 바다에 던져 넣으며 기도를 마쳤다. 그리고 부교 위에 향을 피우고 은매화 가지를 뿌린 후에 페르시아의 대군이 첫 번째 장애물을 건넜다. 



선두에는 머리에 화환을 쓴 페르시아의 불사부대 임모탈Immortal 1만 명이 섰고 페르시아 제국의 이민족 병사들이 그 뒤를 따라서 6일 동안 해협을 건넜다. 



영화 300의 과장때문에 불사부대의 이미지가 환타지의 괴수처럼 오해를 사고 있습니다. 기원전 500년에 이 정도의 무장을 했다면 세계정복은 식은 죽 먹기였겠죠? 실제 페르시아군의 최고 정예군인 불사부대는 이런 무장이었습니다. 





왕과 본대가 해협을 건너는 동안, 선봉대는 이미 트라키아Thrace를 지나면서 저항이 없음을 보고했다. 원정로에 있는 도시들은 모두 간단한 위협만으로 성문을 열었다. 원정군에는 지원병이 흘러 넘쳤고 일부는 자발적으로 일부는 원정군에게 잘 보이려고 병력을 내놓았다. 

크세르크세스는 승리를 확신했겠지만 유럽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고 특히 남부 그리스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무릎을 꿇은 생각이 없었다. 


두 경쟁도시는 처음부터 동맹은 아니었다. 크세르크세스가 드디어 그리스를 침공했다는 말이 전해지자, 스파르타와 아타네는 대응책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그리스 연맹회의가 코린트Corinth에서 4월에 열렸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장군은 그리스 도시국가가 자신의 계획을 지지해주기를 바랬다. 그는 겨울내내 3단 갤리선(그림참조)을 건조했고 아티카Attica를 포기하고 적이 가장 취약한 바다에서 결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아테네 육군을 설득하는 것도 힘들었다. 최강의 육군인 스파르타 정예군의 지원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크레테Crete와 시라쿠스Syracuse의 해군지원이 무산되면서 그리스 연맹은 해군으로 맞서기에는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일단 해전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지협에 방어선을 펴자는 스파르타의 제안대신에 북부 그리스에 방어선을 펼치자는 제안을 지지했다. 이렇게 하면 지협과 아테네 모두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스파르타는 방어선을 북쪽으로 옮기면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주장을 했다. 이미 많은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성문을 열고 있었고, 주 방어선을 북쪽으로 옮긴다면 더 많은 도시를 잃게 될 판이었다. 


테미스토클레스도 이런 염려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는 정찰부대를 보내 북쪽의 방어선을 돌아보게 했는데, 북쪽에서 아무런 지원도 얻지 못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다시 한 번 아테네를 비우고 바다에서 페르시아군을 맞이하자고 주장했다. 안타깝게도 아테네에서는 스파르타처럼 한 사람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회의에서 아테네 시민은 집과 성지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적을 상대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정치가와 지휘관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는 회의에서 시민대표와 지휘관에게 아테네는 고립되었다는 것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쪽의 테살리Thessaly는 이미 페르시아에게 항복했고 코린트나 스파르타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과장했다. 아테네 육군은 페르시아는 고사하고 심지어 인접한 보이오티아Boeotia와도 상대가 안되지만, 해군은 페르시아는 물론이고 그리스 전체를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마지막으로 델파이Delphi 신탁 예언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물론 실제 예언이 있었는지는 그만이 알 수 있다. 


페르시아가 2차례에 걸쳐서 그리스를 침공한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여기에서는 크세르크세스의 행군로와 함께 그리스 주요 국가의 위치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스파르타보다 앞에 있는 아테네의 고민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테미스토클레스의 계획이 6월에 통과되었다. 7월부터 아네테 시민은 집을 비우고 트로이젠Troezen이나 살라미스Salamis로 향했다. 이제 아테네 시민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테미스토클레스는 코린트로 가서 다른 도시국가에게 육군 선봉대를 테르모필레Thermopylae라고 불리던 북부 보이오티아로 보내자고 설득했다. 그 동안 함대는 근처 아르테미시움Artemisium에서 페르시아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 도시국가가 협력을 시작했다. 


테르모필레에서 벌어진 일을 보면 도시국가의 협력에 의문이 생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Leonidas는 4,000명이 채 안되는 선봉대를 이끌고 7월 초에 바다와 산맥 사이의 좁은 해변에 도착했다.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은 8월에 도착했고, 300명의 스파르파인과 700명의 테스피아인만이 남았다.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스파르타 전사는 숨을 거둘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결국 그들과 테스피아인은 모두 전멸했지만 페르시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면서 4일 동안 발목을 잡았고 다른 도시국가가 병력을 내주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영화 300에서 과장된 것처럼 스파르타인 300명이 외롭게 분전을 한 것이 아니라 테스피아인 등이 함께 있었고, 처음에는 꽤 많은 병력이 있었습니다.) 



바다에서 벌어진 첫 번째 해전은 사기를 올리기에 충분했다. 아르테미시움Artemisium(지도 참조)에서, 그리스 갤리선 271척(대부분 아테네)이 650척 이상의 페르시아 함선을 맞이해 우세한 전투를 벌였다. 테르모필레가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퇴각명령이 내려졌고 함대는 살라미스로 물러났다 (이 해전에서 그리스는 100척 정도, 페르시아는 200척 정도의 함선을 잃었습니다.)



그리스군이 물러나자,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Attica와 아테네 방향으로 병력을 집중시켰다. 육군이 선봉에 앞서 나가며 항구를 점령하고 함대가 그 뒤를 따르는 전략이었다. 그리스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아타네 시민은 6월에 이미 도시를 비웠고 코린트의 연맹회의는 아티카에서 결전을 치르지 않고 스파르타가 주장하는 계획을 더 선호했다. 지협을 따라 단단한 방어벽을 만들고 결전을 치를 생각이었다. 

아티카는 이제 페르시아에 무방비로 열렸다. 아직 도시에 남아있던 아테네인은 급히 아티카 고지대로 몸을 피했고, 도시에는 노약자만 남았다. 크세르크세스가 8월 말에 무방비 상태의 아티카에 들어섰고 신전, 농장과 작물을 모두 불태웠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에 들어섰지만 도시는 이미 텅빈 상태였다. 마지막까지 신전을 지키던 소수의 병사가 아크로폴리스의 목책 뒤에서 최후의 저항을 했다. 페르시아군은 불화살을 쏘아 목책에 불을 질렀는데도 이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언덕 아래로 돌과 나무를 굴리며 공격해오는 적을 물리쳤다. 9월 초에 페르시아군이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로 성을 쌓고 공격하자 자살하거나 저항을 하며 죽어갔다. 페르시아군은 신전을 약탈하고 성채에 불을 질렀다. 


지금 남아있는 아크로폴리스를 생각하면, '그 정도 언덕을 점령하는데 뭐 그리 오래걸려?'할텐데, 당시의 신전성채는 이 정도로 웅장했던 모양입니다. 



그 동안 그리스군은 코린트 지협(지도참조)의 좁은 통로에 방벽을 설치하느라 분주했다. 연맹은 그리스 함대에게 남쪽으로 집결해서 지협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처음부터 페르시아군과의 결전은 살라미스 부근의 엘레우시스Eleusis 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총사령관이 아니었다. 

다행히도 총사령관인 유리비아데스Eurybiades가 테미스토클레스를 포함한 고참들에게 전략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작전회의는 양쪽으로 의견이 나뉘어졌다. 아테네, 에기나Aegina와 메가라Megara는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벌이자고 했고 펠로폰네스 도시국가는 해전은 단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잃는다며 트로이젠에서의 일전을 주장했다. 

논쟁이 벌어지던 중에 북쪽의 아테네에서 높이 솟아오르는 화염을 보게 되었다. 선원들은 배로 달려가 바다로 나가려고 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총사령관에게 다음에 결정하자고 말했다. 결정이 연기되자,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을 설득해서 살라미스 해전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아테네의 불길을 보면 적이 얼마나 가까이에 와 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는데 트로이젠은 너무 넓어서 오히려 페르시아의 대함대에게 유리하다. 살라미스 주변의 좁은 해안에서 적을 상대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대의 3/4를 차지하는 아테네와 동맹군은 유리비아데스가 뭐라고 하던 상관없이 살라미스에서 해전을 벌일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이성적인 설득 후에 해군 단독으로 살라미스에서 운명을 결정짓겠다는 협박을 했다. 9월 6일에 회의가 끝나자, 지진이 일어났다. 신탁을 맹신하는 그리스군은 어떤 징조인지 몰라 당황하다가 신이 그리스에게 보내는 지원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