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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일본 전국시대 배경설명(6_1)- 다께다 신겐 두 방에 정리하기

by uesgi2003 2011. 2. 4.

(제가 이야기를 올릴 때에는 할 수 있는 경우에는 현지어를 따르고 있습니다. 외국어 표기법에는 ㅋ,ㅌ 등의 격음화가 맞지만 저는 ㄲ, ㄸ와 같은 경음화로 현지발음을 따릅니다. 그래서 책이나 인터넷에 나오는 이름과 다릅니다. 여러분에게는 불편하시겠지만, 권율장군이 아니라 퀀유르 장군이 되고, 서울이 아니라 세울이 되는 경우를 피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의 의견을 모아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몽고가 사실은 비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 조언을 듣고 모두 몽골로 변경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일본 전국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4명을 꼽으라고 하면

오다 노부나가, 다께다 신겐, 도요또미 히데요시, 우에스기 겐신을 꼽습니다.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없는 것에 항의하는 분도 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사실,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인생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는 하지만, 그가 주도적으로 나서 정국을 이끈 것은 도요또미 히데요시 사망 후의 세끼가하라 전투일뿐 나머지는 거의 모두 상대의 결정에 대한 대응에 불과했습니다. 상대가 이마가와 요시모또, 오다 노부나가, 다께다 신겐, 도요또미 히데요시 등과 같이 워낙 대단한 인물들이었기에 그의 대응도 가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림 설명: 위는 다께다 신겐을 그린 일본 전통그림(浮世畵)로, 다께다 신겐은 대머리가 아니라 불교에 귀의한 반 승려였기 때문에 머리를 민 것입니다. 당시 무장이나 다이묘 중에는 불교의 승려출신이거나 불교에 귀의한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와 달리 그 때의 시대상이 그랬기 때문에 결혼과 살생을 거리낌없이 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무지하게 커집니다.

 

이제부터 제가 왜 다께다 신겐(武田信玄)을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지 자세하게, 두 방으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위키에 정리된 다께다 신겐의 일생을 자료와 함께 보충설명하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명문대가인 다께다 가문의 사람들, 전국 최고의 자랑 24인의 가신단을 보충자료를 곁들여 설명하겠습니다. 다께다 신겐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이 알고 싶은 분은 들녘 출판사의 야망패자(절판 중, 무사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데)를 구해서 보시면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다께다 신겐하면 바로 떠오르는 말이 풍림화산(風林火山)이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이며, 군사를 움직일 때는 질풍처럼 신속하게,  행동하지 않을 때에는 숲처럼 고요하게, 적을 공격할 때에는 불길과 같이 맹렬하게, 방어할 때에는 태산처럼 굳건해야 한다는 뜻으로, 신겐의 모든 전략의 출발점이 된다.

 

그림 설명 : 풍림화산을 쓴 깃발로 진영 앞에 항상 꽂아두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범어를 쓴 깃발을 걸거나 심지어 부처상을 단 투구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또 다른 유명한 말로는 人は城、人は石垣、人は堀。情けは味方、仇は敵なり(사람은 성이자 성벽이며, 해자이니라. 인정은 아군이요, 원한은 적이다)가 있는데, 신겐이 가신과 백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그림 설명 : 다께다 신겐과 가신의 평정도로, 당시 한가닥하던 유명 가신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께다 가문의 24무장 그림이 유명한데, 재미있는 것은 후대에 그려진 그림들이기 때문에 24명의 인물의 이름, 모습, 위치가 제 각각입니다. 심지어 당시에 살지도 않았던 사람까지 그려져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24무장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다께다 신겐의 출발은 불운했다. 아버지인 다께다 노부또라(武田信虎)가 신겐의 재능을 두려워했던 것인지 아니면 강한 성격이 맞붙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동생인 다께다 노부시게만 편애를 해서, 심지어 새해 내리는 술을 동생에게만

줬다고 할 정도였다. 아버지 못지 않은 성격의 신겐은 아버지가 사위인 이마가와 요시모또(今川義元)를 만나러 가는 틈을 타, 모반을 일으켜 영지에서 내쫓고 가문을 이끈다. 다께다 노부또라가 전쟁에 치중하느라 가혹한 정치를 해서 가신과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었기 때문에 새로운 주군을 환영했고, 다행히 동생인 노부시게(武田信繁)도 성격이 온화해서 형의 결정을 지지해서 무혈혁명은 성공한다.


 

그림 설명: 충성스러운 동생으로 형의 결정을 따랐던 다께다 노부시게입니다. 가와나까지마 전투에서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예상을 벗어난 공격으로 전사하고 맙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약간 커집니다.

 

다께다 신겐의 지도자로서의 첫 출발도 불운했지만, 그가 태어난 곳도 불운한 곳이었다. 가이는 산악지방으로 당시의 병농일치 경제체제에서는 큰 세력을 얻기 힘들었고, 아래로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또, 사가미의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라는 실력자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등뒤인 에찌고에는 평생의 숙적 우에스기 겐신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영지확장은 커녕 조금만 실수해도 안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림 설명: 전국의 주요 다이묘들의 전투 전적으로, 이 그림에서는 이마가와 가문의 스루가가 이미 정복된 상태입니다. 중앙의 스캔이 잘 안보이는데, 모두 오다 노부나가이거나 군단장이 이긴 전투입니다. 다께다 신겐이 주변의 영웅과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다께다 신겐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인재를 중용하고 선정을 펼쳐 영지를 안정시키고, 금광을 개발해 열악한 가이의 경제능력을 크게 높이는 동시에, 간웅으로 불리게 된 온갖 권모술수와 유연한 외교로 우에스기 겐신을 에찌고에 묶어두는 동시에 이마가와 요시모또의 영지까지 흡수한다.

 

그림 설명: 당시의 원시적인 금광채굴 그림입니다. 농토가 거의 없었던 가이는 다행히 금광을 가지고 있어서 경제에 활력소가 됩니다. 그림은 약간 커집니다.

 

다께다 신겐은 평생의 꿈이었던 상경전에 나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오다 노부나가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오다 노부나가를 상대하기 전에 병사하는 역사의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또 다시 반복된다.

 

(우에스기 왈: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는 패턴이 두 가지가 있는데 영웅을 꼭 붙여서 태어나게 한다는 것과, 결정적인 순간에 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다께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은 각자 가이의 호랑이, 에찌고의 용으로 불렸고 특히 우에스기 겐신은 군신(軍神)이라고 불릴 정도로 패배를 모르는 다이묘였습니다. 두 영웅은 성격도 너무 달라서 손자 병법에 따라 싸우기 전에 이긴다는 권모술수의 대가 다께다 신겐, 그리고 FM 대로의 인생철학과 의리중심의 우에스기 겐신을 서로 붙여놓았으니, 신겐이 나가려면 등뒤를 겐신이 치고, 겐신이 나가려면 신겐을 먼저 쳐야 하는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영웅이 서로를 인정하고 외교전을 선택하기 전까지 무려 7차전에 걸친 직접 충돌이 있었는데, 가장 치열했던 가와나까지마 4차전에서는 다께다 신겐의 병력 중 85%, 우에스기 겐신의 병력 중 80%를 상실하는 대피해를 입었고 이같은 피해때문에 전국으로 나서는 시간이 너무나도 늦어집니다.

 

그림 설명: 일본 역사상 가장 다이나믹했던 전투로 그림으로도 가장 많이 그려진 4차전의 우에스기 겐신의 다께다 신겐 본진 난입 장면입니다. 워낙 많은 그림이 그려졌는데, 그 중에서도 우에스기 겐신이 가장 무식하게?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다께다 신겐이 5년만 더 살았다면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고 일본의 역사는 크게 졌을 것입니다. 아니, 신겐이 10년만 더 일찍 태어났다면 숙적 우에스기 겐신이 자리잡기도 전에 에찌고를 합병하고 전국을 통일했을 것이고 임진왜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다께다 신겐은 제갈공명과 같이 뒤에 물러 앉아 전장의 흐름을 읽으며 전술을 펼친 최초의 인물로 지략면에서는 독보적이었습니다. 가이의 병사도 산악지방 출신답게 한 명이 이에야스나 노부나가의 병사 세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고 할 정도였고 당시 다께다 가문의 기병대는 전국최고의 수준을 자랑했습니다.
다께다 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은 도꾸가와/오다 연합군을 상대로한 상경전인 미까따가하라 전투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전투에서 다께다 신겐은 일부러 허점을 보이며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자극해 단 한 번에 연합군을 궤멸시킵니다. 당시 젊은 나이에 용맹함을 자랑하던 이에야스가 얼마나 놀랐던지 도망가던 중에 말 위에서 똥을 지렸을 정도로 다께다 군의 전투력은 무시 무시했습니다.
다께다 신겐이 오다 노부나가와 맞붙었다면, 오와리의 오다 군은 워낙 약한데다가 화승총이 대거 사용되기 전이었고, 다께다 신겐은 자만심으로 죽은 이마가와 요시모또와 달리 워낙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인물이라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께다 신겐의 일생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대부분의 내용은 위키에서 인용 후 수정).


법명은 신겐(일본어: 信玄)이고 본명은 하루노부(晴信). 가이슈고(甲斐守護. 일본 직위에 대해서는 이전의 자료를 참조)를 대대로 역임한 가이겐씨다께다가(甲斐源氏武田家)의 적자로서 태어났다. 이웃국인 시나노(信濃)를 침공,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의 가와나까지마의 전투(川中島の戦い)를 거치면서 세력을 키웠다.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한 후 가이, 시나노, 스루가(駿河), 니시 고즈케(西上野), 도또미(遠江), 미까와(三河)와 미노(美濃)의 일부 영지로 했지만, 상경 도중에 미까와에서 발병해서 시나노에서 병사한다. 에찌고(越後)의 우에스기 겐신과의 5번에 걸친 가와나까지마의 전투로 유명하다. 풍림화산(風林火山)의 군기를 사용하고, 가이의 호랑이라고 불리었다. 그가 이끈 다께다 군은 전국시대 최강이라고 평해진다. 다이쇼 시대(大正期; 1912-1926)에는 종3위(從三位)에 추대되었다.

 

가이슈고  시대
1521년 음력 11월 3일 다께다 노부또라(武田信虎)의 적자로서 가이 국 세끼수이지 성(積翠寺城; 현 요가이 산성(要害山城))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이겐씨의 명문 다께다가의 제18대 도슈(当主)로 가이를 통일한 전국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용장이다. 신겐이 태어난 1521년에 가이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우지찌까(今川氏親)의 명을 받은 구시마 마사나리(福島正成)가 이끄는 15,000명의공격을 받았으나, 다께다 군은 신겐의 탄생으로 사기가 올라 이마가와 군을 격퇴시켰다고 전해진다. 1525년에 동생 다께다 노부시게(武田信繁)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노부시게를 편애하고, 그에 따라 하루노부의 성격이 서서히 거칠어졌다고 한다.

 

1536년에 이마가와 우지떼루(今川氏輝)가 죽고, 이마가와 요시모또(今川義元)가 대를 이으면서 이마가와씨와 화친하고, 요시모또의 알선으로 신겐은 산조 긴요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다. 같은 해에 무로마찌 막부(室町幕府) 제12대 쇼군 아시까가 요시하루(足利義晴)로부터 이름을 받아 하루노부로 개명한다. 첫 출진은 시나노의 운노구찌 성(海の口城)의 성주 히라가 젠신(平賀源心)을 공격한다.

1541년 하루노부 21살 때 슈꾸로(宿老)로 있는 자국내 유력한 영주 이따가끼 노부까따(板垣信方)와 아마리 도라야스(甘利虎泰) 그리고 오부 도라마사(飯富虎昌) 등의 지원을 받아 아버지를 스루가로 추방한 후에 제19대 당주로 가독을 상속한다.

 

시나노 평정 시대

노부또라를 추방한 직후, 시나노의 스와 우에하라 성(諏訪 上原城) 성주 스와 요리시게(諏訪頼重)와 하야시 성(林城) 성주로 있는 시나노 슈고(信濃守護) 오가사와라 나가또끼(小笠原長時)가 가이에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격퇴한다. 그리고, 1542년 6월, 거꾸로 스와를 공격한다. 마침 스와씨 내부에서는 스와 요리시게와 다까또 요리쓰구(高遠頼継) 간의 스와종가를 둘러싼 정쟁이 일어 났기 때문에 하루노부는 이것에 개입, 다까또 요리쓰구와 손을 잡고 스와 요리시게를 멸문시키고 스와를 평정한다. 계속해서 같은 해 음력 10월, 스와령 분할 문제로 다까또 요리쓰구와 대립하고, 고부찌자와(小淵沢)에서 격파한다.

 

그림 설명: 주변의 실력자들에게 둘러쌓인 가이는 시나노로 진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나노에서 실력을 쌓은 다께다 신겐은 주변 영웅들과 본격적인 대결 또는 외교를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1543년 시나노 나가꾸보 성(長窪城) 성주 오이 사다따까(大井貞隆)를 공격해 자결시키고, 1545년 4월, 우에 이나(上伊奈)의 다까또 성(高遠城)을 공격해 다까또 요리쓰구를, 음력 6월에는 후꾸요 성(福与城) 성주 후지사와 요리찌까(藤沢頼親)도 멸문한다.

 

1547년 시가 성(志賀城)의 가사하라 기요시게(笠原清繁)를 공격한다. 그때 가사하라 군에는 고즈께(上野)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 우에스기 겐신을 양자로 받아들여 가문을 물려준다. 우에스기 겐신에 훨씬 못미치는 인물)의 원군도 있었기에 고전하지만, 음력 8월6일 오따이하라 전투(小田井原の戦い)에서 다께다 군은 우에스기=가사하라 연합군에 대승한다. 그런데, 하루노부는 적병의 항복을 허락하지 않고, 3천 명의 적병을 전부 학살한다. 더욱이 여자 아이를 인질 노예로 하는 등 가혹한 처분을 했다. 이 사건의 의해 시나노국의 영주들은 하루노부를 믿지 못하게 되고, 시나노 평정을 크게 퇴보시키게 하는 원인이 된다.

1548년 음력 2월, 하루노부는 시나노 북부에 세력을 자랑하는 무라까미 요시끼요(村上義清)와 우에다하라(上田原)에서 격돌한다(우에다하라 전투(上田原の戦い)). 그러나, 병력이 많았던 다께다 군이 무라까미 군에 패해 중신인 이따까미 노부까따와 아마리 도라야스을 비롯해 많은 병력을 잃는다. 하루노부 자신도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는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음력 4월 오가사와라 나가또끼가 스와로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7월에 시오지리고개 전투(塩尻峠の戦い; 가쓰쓰루고개 전투(勝弦峠の戦い))에서 오가사와라 군에 대승한다.

 

(우에스기 왈: 승승장구하던 다께다 신겐은 무라까미와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100% 승리는 자만심만 불러오기 때문에 50%의 승리가 좋고, 70%의 승리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이후 용맹스런 그의 성격에 신중함까지 갖춰지게 됩니다. 무라까미 요시끼요를 결국 무력이 아닌 권모술수로 내분을 일으켜 몰아내는데, 무라까미 요시끼요가 에찌고로 도망가 우에스기 겐신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일생의 숙적을 만나게 됩니다.)

 

1550년 음력 7월, 하루노부는 오가사와라령을 공격한다. 이미 오가사와라 나가또끼는 저항할 힘이 없어 하야시 성을 버리고 무라까미 요시끼요의 밑으로 도주했다. 이렇게 해서시나노 중부지역(中信濃)를 장악하게 된다. 이 기세로 하루노부는 9월, 무라까미 요시끼요의 지성인 도이시 성(砥石城)을 공격하지만 도이시쿠즈레(砥石崩れ)라고 전해질 정도로 요꼬따 다까도시(横田高松)와 오야마다 노부아리(小山田信有)와 천 명 이상의 장병을 잃는다.

 

그림 설명: 다께다 신겐이 북 시나노 지역의 용장 무라까미 요시끼요에게 패배를 계속 당하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림은 도이시 전투에서 공격당하고 있는 장면이며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그러나 1551년 음력 4월, 사나다 유끼따까(真田幸隆) 또는 사나다 유끼쓰나(真田幸綱)의 책략으로 도이시 성을 함락하고, 1553년 음력 4월 무라까미 요시끼요는 가쓰라오 성(葛尾城)을 버리고 에찌고의 나가오 가게도라(長尾景虎; 우에스기 겐신)의 밑으로 도망친다. 이렇게 해서 시나노의 대부분을 평정했다.

 

그림 설명: 북시나노 침공도. 차라리 북부 시나노의 군소 영주들을 건드리지 않고 에찌고와의 버퍼로 두었으면 전력손실이 훨씬 적었을텐데, 아직까지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시나노를 장악하고 평생의 숙적을 만나게 됩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가와나까지마 전투 시대
1553년 음력 4월, 무라까미 요시끼요의 요청을 받은 나가오 가게도라는 5천의 군을 이끌고 시나노 가와나까지마로 출병한다.(제1차 가와나까지마 전투). 그러나, 하루노부와 가게도라는 서로 대치만 한 채 5월에 모두 군대를 물린다.
8월, 가게도라의 지원을 받은 오이 노부히로(大井信広)가 모반을 일으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즉각 진압한다.

1554년 봄, 나가오 가게도라에 대항하기 위해, 하루노부는 장남 요시노부(義信)의 정실로 이마가와 요시모또의 딸을 며느리로 맏이해 이마가와씨와 동맹을 맺는다. 또, 자신의 딸은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의 장남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에 시집보내 고호조씨와도 동맹을 맺는다. 이마가와씨도 다께다가의 중개로 호조씨와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고소슨3국동맹(甲相駿三国同盟)이다.

 

(우에스기 왈: 이마가와 요시모또는 다께다 신겐의 매제인데, 조카를 며느리로 받아들였으니 이해가 안가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지금도 사촌간의 결혼이 허용되지만 당시에는 친족 간의 결혼이 일반적이었고 더욱이 정략결혼이 외교의 기본수단이었기 때문에 매우 성행했었습니다.)

 

1555년 음력 4월, 다께다 군과 나가오 군이 다시 가와나까지마에서 대치한다. (제2차 가와나까지마 전투). 그러나 전과 없이, 이마가와 요시모또의 중개로 양국은 음력 10월에 화친하고 휴전한다. 하루노부는 나가오 군이 에찌고로 군대를 물리자 마자, 가게도라의 힘을 빌어 저항하던 기소 요시야스(木曽義康), 기소 요시마사(木曽義昌) 부자를 공격, 굴복시킨다. 1556년에는 시나노 북부로 진출한다.


(우에스기 왈: 우에스기 겐신은 요즘 폭설로 사람이 많이 죽은 북부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요즘의 4M 폭설까지는 아니더라도 겨울에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에 시나노 영주들의 구원요청에 발만 동동구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는 쉴새없이 정치공작을 펼치는 다께다 신겐을 응징하는 것이 전국시대 무장의 도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서로를 증오하다가 존경하게 되었는지, 내륙지방의 다께다 영지가 소금이 부족해 고통을 겪자, 우에스기 겐신은 선선히 소금을 공급해줬고, 다께다 신겐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진정한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1557년 나가오 가게도라가 가와나까지마로 출병해 옴에 따라, 재차 다께다 군과 나가오 군이 대치하기 시작한다.(제3차 가와나까지마 전투). 그러나 양군 모두 전과 없었고, 더욱이 가게도라가 없는 사이에 가가(加賀), 엣추(越中)에서 잇코잇키(一向一揆, 일향교도의 반란)가 일어났기 때문에 나가오 군은 다시 후퇴한다.


1559년 음력 5월 하루노부는 출가해서 신겐으로 개명한다.

1561년 음력 9월10일, 다께다 신겐 군 20,000만과 우에스기 마사도라(上杉政虎; 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노리마사에게 가문을 상속) 군 13,000이 4번째 가와나까지마에서 전투를 벌인다. (제4차 가와나까지마 전투). 이 전투는 지금까지의 가와나까지마의 전투중 최대 규모의 전투이다. 양군 합쳐 6천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그림 설명: 가와나까지마에서 전사하는 야마모또 간스께입니다.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지만, 혈기왕성했던 젊은 다께다 신겐을 지략으로 보필했던 인물입니다. 가와나까지마에서 자신이 내놓은 전략이 거꾸로 우에스기 겐신에게 큰 허점을 제공하자, 자진해서 겐신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내다 전사합니다. 한쪽 다리를 절고 한 눈이 안보이는 불구로 전투를 할 수 없는 처지인데도 부대를 이끌고 나가 자신의 실수를 목숨으로 치룹니다.

 

 이 전투에서 다께다 군은 신겐의 동생 다께다 노부시게, 모로즈미 도라사다(諸角虎定), 야마모또 간스께(山本勘助), 사에구사 모리나오(三枝守直) 등 유력 무장을 다수 잃었다고 전해진다.

 

(우에스기 왈: 영화 천과지의 주무대가 4차전으로, 위의 6천 명 전사자는 전사한 병사만을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부상입은 병력까지 따지면 양쪽이 최대 85%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병원시설이 워나 미흡했기 때문에 부상을 입으면 대부분 전사하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을 감안하면 부상자도 전사와 동급으로 칩니다.
다께다 군이 친족과 중신을 비롯해 훨씬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결국 가와나까지마 지역을 장악해 전쟁에서는 이긴 것으로 판단됩니다. 4차전은 일본 최고의 영웅이 맞붙은, 말 그대로의 용호상박이었고, 우에스기 겐신의 무대포^^; 본진 돌파로 일본 역사상 가장 멋진 전투였기 때문에 나중에 따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1564년에도 우에스기 군과 가와나까지마에서 대치하지만, 충돌 없이 끝난다 (제5차 가와나까지마 전투).

 

이마가와, 호조 가문과의 전투 시대
가와나까지마 전투 후, 신겐은 공격 방향을 고즈께(上野)로 전환하지만,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옛 신하였던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의 저항이 워낙 거세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1561년 나리마사가 죽자 다께다 군은 대를 이은 나가노 나리모리(長野業盛)를 격렬하게 공격, 1566년 음력 9월에는 미노와 성(箕輪城)을 함락하고 고즈께 서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1560년 음력 5월, 다께다가의 맹우인 이마가와 요시모또가 오께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전사하면서 이마가와 가문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신겐은 이마가와씨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요시모또의 딸과 결혼한 적자 다께다 요시노부(武田義信)와 그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가 격렬히 반대한다. 신겐은 1565년 오부 도라마사를 할복시키고, 1567년 음력 10월에는 요시노부를 폐적시키고 자살로 몰고 간다 (병사설도 있다).

 

(우에스기 왈: 위키의 자료가 잘못되어 있는데, 아들 요시노부도 할복시켰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들도 배갈라 죽인 불행은 계속 이어집니다.)

 

1568년 음력 12월, 미까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공동으로 스루가로 침공을 개시한다. 이마가와 군도 저항했지만, 마쓰노 산(松野山)에서 오기 기요따까(荻清誉)를, 삿따 산(薩垂山)에서 이마가와 우지사네(今川氏真)를 격파하고 이마가와야까따(今川館)로 입성한다. 그러나, 이마가와씨와 친척 관계로 있는 호조 우지야스가 이마가와씨의 원군으로 온다. 더욱이 스루가 정복을 기획한 이에야스도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고 신겐을 적대했기 때문에 호조=도꾸가와 연합군과의 싸움의 불리함을 깨닫고, 1569년 요꼬야마 성(横山城)에 아나야마 노부끼미(穴山信君)를 남겨놓은채, 음력 4월 다께다 군 본대는 일단 가이로 후퇴한다.

 

그림 설명: 다께다 신겐의 스루가 침공도. 클릭하면 커집니다.

 

음력 9월, 신겐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조씨를 억누르기 위해 고즈케, 무사시(武蔵), 사가미(相模)로 침공한다. 음력 10월1일에는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하지만, 4일 후에 재빨리 포위를 풀었다. 호조 우지야스는

 

호조 우지떼루(北条氏照), 호조 우지꾸니(北条氏邦) 등을 다께다 군의 퇴각로에 포진시키고, 오다와라로부터는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를 출진시켜 양동작전하는 구상을 했지만, 음력 10월8일 미마세 고개(三増峠)에서 다께다 군이 대승한다 (미마세고개 전투(三増峠の戦い)). 이렇게 호조 우지야스를 제압한 후, 1570년 음력 7월 재차 스루가를 침공, 완전히 평정한다.

 

(우에스기 왈: 호조 우지야스도 불쌍한 것이, 나름 전국을 노릴 수 있는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호죠 쇼운이 주군에게서 나라를 빼앗은 후에 선정을 펼쳤지만 세력을 펼치기에는 시간과 기반이 너무 부족해 끊임없이 다께다와 우에스기 가문의 견제를 받습니다. 그의 거성 오다와라 성은 우에스기 겐신의 오랜 포위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냈고 다께다 신겐의 공격도 막아냈지만 결국 후대에 이르러 전세를 읽지 못하는 자손들때문에 도요또미 히데요시에게 성문을 열고 맙니다.)

 

호조 가문과의 동맹  시대

1568년 음력 9월,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上洛)을 달성해 아시까가 요시아끼(足利義昭)를 옹립한다. 하지만, 요시아끼와 노부나가는 대립하게되고, 요시아끼는 노부나가를 멸문하기 위해, 신겐에게 노부나가 토벌 명령을 내린다. 신겐도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를 우려했기 때문에 1571년 음력 2월 노부나가의 동맹인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돗또미, 미까와를 침공한다. 신겐은 음력 5월까지 오야마 성(小山城), 아스께 성(足助城), 다미네 성(田峯城), 노다 성(野田城), 니렌기 성(二連木城)을 함락시킨 후에 가이로 귀환한다. 1571년 음력 10월 3일, 호조 우지야스가 오다와라에서 죽고, 대를 이은 적자 우지마사는 "다시 다께다와 화친해라" 라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우에스기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동생 호조 우지따다(北条氏忠), 호조 우지노리(北条氏規)를 인질로서 가이로 보낸다. 그리고, 음력 12월27일에는 신겐과 고소동맹을 맺는다. 이 시기 다께다가의 영토는 가이 일국외 시나노, 스루가, 고즈께 서부, 돗또미, 미까와, 히다(飛騨}}, 엣추의 일부까지 약 120만 석에 달하며 최고의 시대를 보낸다.


오다 노부나가는 1565년 동 미노(東美濃)의 영주 도야마씨의 여자를 노부나가의 양녀로 받아들여 다께다 가쓰요리(武田勝頼, 다께다 신겐의 아들)에 시집보내 신겐과 동맹을 맺는다. 이 양녀는 다께다 신겐의 적손을 출산한 후 죽었지만, 계속해서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따다(織田信忠)와 신겐의 딸 마쓰히메(松姫)가 약혼했다.


(우에스기 왈: 오다 노부나가가 얼마나 다께다 신겐에게 신경을 썼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직 중부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던 노부나가는 앞 뒤로, 그것도 당시 최강의 다께다 군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는 추파를 보냅니다.)

 

1572년 음력 10월3일 쇼군 아시까가 요시아끼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해서 노부나가와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을 하기 위해 고후(甲府)를 출발한다. 약 30,000명의 총병력 중, 3,000을 아끼야마 노부또모(秋山信友)에게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야마까따 마사가게(山県昌景)에게 5,000을 주어 이에야스의 영토 미까와에 보내고, 자신은 바바 노부하루(馬場信春)와 함께 20,000의 대군을 이끌고 아오구즈레 고개(青崩峠)로부터 돗또미로 공격해 들어갔다.

 

신겐이 이끄는 본대는 음력 10월 13일 다다라이 성(只来城), 아마까따 성(天方城), 이찌노미야 성(一宮城), 이이다 성(飯田城), 가꾸와 성(各和城), 무까사 성(向笠城) 등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성들을 하루 만에 접수한다.

 

그림 설명: 다께다 신겐의 마지막 불꽃, 미까따가하라 전투. 신겐이 무라까미 요시끼요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배웠듯이, 도꾸가와 이에야스도 이 전투에서 패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가슴 속에 새겨두고 평생의 교훈으로 삼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야마까따 마사가게 군은 가끼모또 성(柿本城), 이다이라 성(井平城)을 접수하고 신겐의 본대와 합류하고, 아끼야마 노부또모 군은 음력 11월까지 히가시 미노의 요충지인 이와무라 성(岩村城)을 접수한다. 이때 노부나가는 아사이 나가마사(浅井長政), 아사꾸라 요시까게(朝倉義景), 이시야마 혼간 사(石山本願寺)의 일향종(一向宗) 등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3,000의 원군만을 보낸다.

 

이에야스는 음력 10월14일, 다께다 군과 돗또미의 히토코토자카(一言坂)에서 싸우지만,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와 신겐의 교묘한 전술에 패한다 (히또고또자까 전투(一言坂の戦い)). 음력 12월19일에는 돗또미의 요충으로 있는 후따마따 성(二俣城)을 함락시킨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하마마쓰(浜松)에서 농성을 생각하지만, 다께다 군의 유도전술에 속아 11,000명을 이끌고 출진, 돗또미의 미까따가하라(三方ヶ原)에서 음력 12월22일 신겐과 일대 결전을 준비하지만 거의 모든 병력을 잃고 목숨만 건져 달아난다(미까따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이에야스는 도주할 때 공포에 질려 말위에서 변을 봤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림 설명: 성에 돌아와 자신의 참담한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 교훈을 삼았다는 그림입니다. 다께다 신겐이 이에야스의 본성까지 바로 쳤다면 일본 역사는 또 다시 완전히 바뀌었을텐데, 신겐의 너무 신중한 행동덕분에 이에야스는 목숨을 건지고 일본을 통일하게 됩니다.

 

이때 북 오미(北近江)에 진을 치고 있던 아사꾸라 요시까게가 노부나가 포위망을 풀고 후퇴하는데, 신겐은 격노하여, 요시까게에게 문서를 보낸다 (이노 문서(伊能文書)). 그러나 요시까게는 그 후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신겐은 군대의 움직임을 멈추고 해를 넘긴다. 다시 1573년 음력 1월에 미까와를 침공하고 음력 2월10일에는 노다 성(野田城)을 접수한다 (노다 성 전투(野田城の戦い)).

 

사망

노다 성을 접수한 직후부터 신겐의 지병이 악화되어, 다께다 군은 돌연 진격을 멈춘다. 이 때문에 신겐은 나가시노 성(長篠城)에서 요양하지만, 별진전이 없어 음력 4월 초순에는 결국 가이로 군대를 전격후퇴시킨다. 음력 4월 12일, 가이로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국 고마바(駒場)에서 53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우에스기 왈: 일부 소설에서는 총에 맞아 암살된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병사가 정설입니다. 신겐은 죽으면서 자신이 남긴 큰 공백과 아직 미숙한 아들을 염려해 3년간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대역을 세우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미동도 하지 않는 다께다 가문의 소문은 전국 다이묘들에게 퍼져 결국 다께다 신겐의 죽음을 알게 됩니다. 가문을 이어받은 다께다 가쓰요리는 하루빨리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만 중신들은 "아버님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님이라면...."으로 가쓰요리를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갑니다.


그림 설명: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결정적인 한 방을 노린 다께다 가쓰요리가 무리하게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꾸가와 연합군에  맞서다가 가문 대대로의 자랑거리인 24인의 가신과 전국최고의 기마부대를 모두 잃고 맙니다. 결국, 무리한 전투를 중단하지 않은 가쓰요리는 친족의 배신으로 깊은 산속에서 자결을 하고 다께다 가문은 멸망하게 됩니다.)

 

다음은 별로 재미없는 참조자료입니다. 일본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젊은 다께다 신겐(당시 하루노부)이 아버지를 추방하는 에피소드로 모두 일본어이고 액션 장면이 없어서 그냥 심심한 동영상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액션과 멋진 음악이 있는 드라마 '풍림화산'의 오프닝을 처음에 미끼로 넣었습니다.^^;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니까 시간이 되시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