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참조용으로 올렸어야 할 지도와 그림인데, 너무 늘어져서 따로 뽑아 참조자료에 올립니다. 앞의 이야기들을 잘 기억하시면 참조자료가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그냥 가볍게 넘기셔도 되고, 뭔가 걸리는 분은 참조자료와 함께 앞의 이야기를 다시 보셔도 됩니다. 지도 스캔이 좀 삐딱한데, 책을 찢지 않고 스캔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제게 의견이나 질문을 해주셔도 됩니다.
우선 노부나가의 최전성기의 진출지도입니다. 감정이입도 좋지만 너무 부담갖지 말고 가볍게 보면서 이렇게 저렇게 진출했구나 느끼시면 됩니다. 지도 자체에 설명이 있어서 그냥 지도만 연속해서 올리고 그림에는 약간의 설명을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지도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다음은 오다 노부나가와 관련된 그림들(浮世畵, 일본의 전통그림)로 당시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2~300년 후에 그려진 그림들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굉장히 커집니다.
5대 군단장 중 한 사람인 다끼가와 가즈마사(滝川 一益)입니다.
닌자출신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굉장한 실력자입니다.
경호, 암살, 정보수집에 동원된 닌자들은 천대받는 계층이었으니까요.
노부나가 사망 후, 시바따 가쓰이에 편을 들어 도요또미 히데요시에 맞섰다가 패배하고 목숨만 건지지만, 이전의 용맹함을 잃어 버립니다.
아께찌 미쓰히데(明智光秀)입니다. 일본 역사상 최대의 반란사건의 주모자였기에 기록에서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5대 군단장 중 한사람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입니다.
문무를 겸비한 중신이었으며 도요또미 히데요시에 협력해 120만석의 대영주가 되지만 결국 히데요시와 반목을 하던 끝에 자결을 하고 맙니다.
자결할 때에 자신을 괴롭혔던 종양을 꺼내 히데요시에게 보냈다는 설이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겪었던 3대 위기 중 하나인 오께하자마 전투입니다.
앞에서 상세하게 설명했듯이, 당시 최대 실력자였던 이마가와 요시모또의 본진을 기습해 거꾸러뜨리는 대역전극을 펼칩니다.
여기에서의 (공격당하는) 요시모또는 날렵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비대해져서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마가와 가문의 중신과 전투를 벌이는 그림입니다.
오께하자마 전투에 참가했던 젊은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도요또미 히데요시와 친했고 그의 도움으로 한 때의 실수를 용서받고 노부나가에게 복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부터 히데요시와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히데요시 사망 후, 이에야스의 정권찬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지만 와병 중이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위기를 넘어서 천하에 군림하게 되는 미노(美濃) 공략 그림들입니다.
아사이/아사꾸라 연합군을 패배시키는 노부나가의 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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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바야마(稲葉山城) 성을 공력하는 도요또미 히데요시인데, 히데요시의 체격이나 무술이 별 볼일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미화된 그림입니다. 외모도 거의 성형 수준의 외모입니다.
히데요시는 권모술수 대가였지만 그 휘하에는 가또 기요마사 등과 같은 이름난 맹장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나바야마 성도 가신의 도움으로 전투없이 모략으로 빼앗습니다.
미노로 진출하고 있는 노부나가 군대입니다. 호수를 건너기 위해 배를 이어붙인 가교를 만들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미노를 공략하기 위해 가장 공을 들였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입니다. 당시 일본 최고의 미인으로 소문났던 동생을 출가시킬 정도로 공을 들였지만, 아버지의 간청에 따라 노부나가를 배반하고 동맹국이었던 아사꾸라 가문을 돕다가 죽고맙니다.
실리를 따라 노부나가의 곁에 있었다면, 또는 철저히 의리를 따라 노부나가를 완벽하게 배반했다면 일본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 겁니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인정을 따르는 햄릿형 인물로 그려집니다.
출신배경이 미천했고 무력이 약했던 도요또미 히데요시는 능력있는 가신을 모으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데, 최대 성과가 그림의 7본창(本槍, 7명의 무서운 시동)입니다.
1.후꾸시마 마사노리(福島政則)
2.가또 기요마사(加藤清正)
3.가또 요시아키(加藤嘉明) 또는 가또 요시아키라.
4.히라노 나가야스(平野長泰)
5.가따기리 가쯔모또(片桐且元)
6.와끼자까 야스하루(脇坂安治)
7.가쓰야 다께노리(糟野武則)
대부분이 조선원정의 주력이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원수들입니다. 와끼자까 야스하루는 이순신장군님에게 대패를 한 것으로 익숙해 별 볼일 없는 무장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용인전투에서는 겨우 2,000의 군사로 이광 전라감사가 이끄는 50,000명의 조선군을 패배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중앙의 인물이 하시바 히데요시(도요또미 히데요시로 개명하기 전)인데, 상당한 미화입니다. 절대로 저런 모습이 아니라 왜소한 체격에 못난 인물이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패를 하고 가신의 배반으로 사지에 몰린 다께다 가쓰요리(武田勝頼)입니다.
아버지 다께다 신겐의 병사 후에 가문을 상속받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제대로 펼치기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너무나도 천재였습니다. 결국 싸워서는 안되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일본 최고를 자랑하던 무수한 중신과 기병들을 잃고, 가신인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 그림의 인물)의 배반으로 사지에 몰려 자결하고 맙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신들에게 절대 독재자로 군림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최후를 맞이한 혼간 사의 난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는 꼭 모리 난마루(森蘭丸) 모습이 함께 그려지는데, 시동이었던 그는 노부나가와 동성애였다고 알려집니다. 그가 적의 난입을 막는 동안 노부나가는 안으로 들어가 자결을 합니다.
그 당시 무장들의 동성애는 일반적이었는데, 성적인 취향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동성애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믿을 수 없었던 시기이니 만큼 가신의 충성도는 시동일 때부터의 육체적 관계로 일체감을 높였습니다.
혼노 사의 난에서 노부나가를 죽인 아께찌 미쓰히데가 니죠 성에 있는 장남 오다 노부따다도 공격해 죽입니다.
그림에서 대포를 사용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는데, 100년 이후에 그려진 그림들이기 때문에 대포사용에 대해 착오를 한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이런 거치식 대구경 대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림과 같은 화력의 대구경 대포를 사용할 줄 알았다면, 임진왜란은 우리의 패전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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