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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스페인 원정 영국군과 가족 이야기 (1부)

by uesgi2003 2014. 7. 7.


독립기념관 관보에 핀란드 독립역사를 정리해야 하는데, 스페인 독립전쟁을 정리하다가 그만 스페인 원정에 나선 영국군과 가족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독립기념관 관보에 게재할 이야기는 아직 시간여유가 있으니까 며칠 더 자료를 찾아봐야죠. 


보통 우리는 지금의 시각, 그러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극히 제한된 지식과 정보만으로 과거의 일을 재단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물론 저라고 예외는 아닙니다만... 도대체 왜 그렇게 무식하게 싸웠을까? 왜 도망안갔을까? 왜 민간인이 따라 다녔을까? 왜? 왜? 왜? 

옛날이라고 해서 그들이 바보같았다는 폄하는 안했으면 합니다. 우리만큼 똑똑하고 현명한 판단을 하는 분들이었지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우리가 그 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판단을 하게 될 겁니다.  


이번 이야기도 우리의 오해를 풀어주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스페인 원정 영국군과 가족 이야기 (1부)


요즘은 외국 땅에 가족을 데리고 가는 군인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웰링턴이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프랑스 황제 보나파르트 휘하의 원수와 격전을 벌일 때에는 가족을 동반했다. 

원정길을 떠나는 남편과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함께 나섰고 영국군은 가족동반에 대해 일관성있는 정책이 없었다. 그 당시 군인의 복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군인에게 모든 것을 기대야 하는 가족은 더욱 비참하게 살았다. 궁핍한 의회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병사에게 최소한의 급여만 지급했다. 

1792년까지만 해도 병사는 일반 가옥에서 잠을 잤는데 그 해부터 윌리암 피트 수상이 자금을 모아서 땅을 사고 군막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프랑스 혁명정부가 들어서면서 영국군은 막사 안에 있을 수 없었다. 


전세계 군대 모두가 그렇듯이, 당시의 영국군도 여성과 아이는 훈련과 사기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했었다. 많은 지휘관은 결혼에 반대했고 불과 50년 전만 해도 "젊은 병사들이여, 너희가 결혼하기를 바랬다면 아내를 하나씩 지급했을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다. 

사기문제도 있고 주거문제도 있어서, 많은 영국군 부대는 공식적으로 결혼을 권장하지 않았다. 1795년 기병 규칙을 보면 "장교는 병사에게 여성이 주는 피해를 설명하고 그들이 결혼하지 못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반되는 시각을 가진 지휘관도 많았다. 존 무어 경은 "병사의 결혼은 연대에 도움이 되고, 병사개인에게 안정을 줄 수 있지만 모두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규율확립 여부에 달려있다"고 표현했다.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부대는 기혼 병사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다. 장교와 부인은 곤경에 빠진 병사가족을 도우려고 했고 병사의 아내는 미혼장교의 세탁과 옷수선으로 얼마 안되는 돈을 벌었다. 부대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권장했다. 


영국의 최전성기라도, 그리고 그런 도움을 받아도 병사가족의 삶은 어려웠다. 민병대는 기혼인 경우에 급여를 더 받았지만 정규군은 그런 일이 없었다. 부대가 다행히 막사에 머무를 경우에는 가족도 막사에 살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비바람을 막을 숙소만 있을 뿐이지 다른 복지는 제공되지 않았다. 

부부는 일반 막사침대에서 잠잤고 그들의 개인생활을 보호하는 장치는 아예 없었다. 


부대가 해외원정을 떠나게 되면 생존의 위기에 몰렸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는 남은 가족에 대한 배려가 일체없었다. 남편을 따라가지 못하는 부인은 약간의 현금을 받고는 작별인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는 돌아갈 가족이 있는 경우라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외톨이라면 기약할 수 없는 세월을 혼자서 살아야 했다. 

정부는 배급을 하거나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원정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족은 해외원정에 함께 나서려고 했지만 100명 당 겨우 6명의 아내만 허용되었다. 나중에는 4명으로 줄어들었다. 해외원정이 위험해도 최소한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부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부대원의 잡일을 도와주며 돈도 벌 수 있었다. 

그래서 해외원정에 따라갈 추첨을 했다. 남편과 가족이 모여 모자 안의 표를 연장자 순서로 뽑았다. 보통은 아이가 많은 부인은 제외시키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탈락 표시를 뽑은 부인, 특히 임산부와 자녀를 가진 어머니는 몹시 낙담했다. 남편없이 외톨이로 남는 부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별장면은 늘 비통했다. 가족은 수송선까지 따라갔다. 병사가 배에 오르면 흐느끼는 가족은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봤다. 언제 돌아올 지는 신만이 알았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젊은 여성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로 했다. 배가 움직이려고 하자 남편에게 몇 마디 고함을 친 그녀는 갑자기 아이를 남편에게 넘겨주고는 배에 올라탔다. 부둣가의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장교는 그녀의 용기를 칭찬하며 머리를 돌리더니 못본 척 했다. 그녀는 남편과 원정지로 향했다. 


배에서는 막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고달픈 나날을 보냈다. 곳곳에서 배멀미로 신음하고 구토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포르투칼까지의 여정은 보통 3주 정도였는데 그 기간 동안 가족은 상상하기 힘든 생활을 했다. 

2인 또는 부부당 매트리스 한 장이 배급되었고 6명이 담요 한장 크기의 공간을 공유했다. 당연히 구획이나 벽은 없었고 1명이 4시간씩, 구토물 위에서 잠을 잤다. 

어떤 재치있는 병사는 구명정 안으로 들어가 개인공간을 만들고 요리사와 협상을 했다. 자신에게 배급되는 럼주와 구명정을 덮을 천을 교환했다. 그리고 매일 뜨거운 물을 받아서 아내와 차를 마셨다. 그 병사는 나중에 "불편한 중에서 가장 편안한"이라고 기록했다. 


환경이 더럽고 불편했기 때문에 병일 발생할 위험이 컸다. 1808년 항해에서는 250명의 하이랜드 병사 중에 12명만이 건강을 지켰다. 병은 차라리 견딜만 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난파였다. 원정에 나선 병사 중에 많은 수는 적이 아닌 바위와 바닷물에 죽어갔는데 버켄헤드Birkenhead 호가 대표적인 예였다.

버켄헤드는 식민지 전쟁때문에 1852년에 병사와 가족을 남아프리카로 수송하던 배였지만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많은 수송선과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시몬스타운 부근의 바위와 충돌한 배는 거칠고 상어투성이의 바다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구명정이 충분하지 않아서 여성과 아이만 먼저 탈출했다. 버켄헤드는 가라앉았고 병사들은 갑판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구명정에 뛰어들었다가는 가족까지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대부분의 병사는 목숨을 잃었지만 가족은 모두 무사했다. 이 사건은 당시 영국군의 규율 그리고 병사들의 용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수영에 능숙한 병사는 3.2km 떨어진 해안까지 12시간 걸려 살아남았고, 이튿날 오후에 도착한 구조선은 잔해에 매달린 40명을 더 구조했습니다. 643명 중에 193명이 살아남았는데 본문과 달리 민간인은 최대 30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버켄헤드 사고 이후 "여성과 어린이 먼저"라는 규율이 영국 해군과 상선의 구호가 되었습니다. 

 

원정지에 도착하면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 최소한 행군 중에는 부부만 함께 있을 수 있는 덤불이나 구덩이가 허용되었고 포르투칼과 스페인에서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여름에는 먹을 것이 풍족한 편이었다. 부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음식을 모았으면, 장교들은 부대의 식량을 구입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리고 현지의 농작물을 훔치기도 했는데, 당연히 지휘부에서는 금하는 행위였다. 웰링턴은 부인들이 병사들만큼이나 나쁜 행위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헌병이 주먹이나 개머리판으로 때려서 말린 경우도 있었다.


 

부대가 행군을 멈추면, 병사들은 민가에 들거나 적당한 재료로 헛간을 만들었다. 가족에 대한 공식적인 배려는 없었기 때문에 알아서 적당한 공간을 찾아들어갔다. 부인이 남편과 동료를 위해 음식을 만들었고 병사들이 불 옆에서 럼주에 취해 뒹굴고 있는 동안 세탁과 옷수선을 했다. 


 

여성이 남편보다 강인한 경우도 많았다. 스키디Skiddy의 남편은 빈혈증세였고 상관이 소총을 들어줘야 할 정도로 쇠약했다. 스키디는 부대를 앞질러가서 불을 피우고 탈진한 남편을 위해 차를 끓여두었다. 당연히 군율을 어기는 행위였지만 남편을 잃으면 부대와의 인연도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했다. 

한 여성의 남편은 불복종 처벌로 300대를 맞았는데, 부인은 간신히 걸음을 떼는 남편 곁에서 소총과 군장을 대신 짊어지고 행군했다. 보통 한 병사가 소총 한자루와 80발의 탄약, 외투, 배낭, 총검, 3일치의 음식과 음료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대단한 무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