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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영화 명량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 (5) - 왜군의 손실은?

by uesgi2003 2014. 8. 1.


일반적으로 우리의 손실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지만 왜군의 손실에 대해서는 유일한 자료가 일본 참모본부가 펴낸 일본전사 조선역의 자료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일본 기록은 소설에 가까울 정도의 공적 빛내기가 많아서 국내 연구자료는 이 자료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을 보면 이런 황당무계한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쪽 바다에서 기묘한 검은 구름이 일어나 점차 다가오기에 살펴보니 가마우지였다. 고려에서는 평소 전혀 보지 못하던 터라 바라보니 그 수가 몇 백만이나 되었다. 울산성 주위로 날아올랐다가 내려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

병사들은 가마우지가 아마테라스 오카미와 하치만 대보살의 사신으로 일본 신이 우리를 키키려고 힘을 보태준다고 든든하게 생각했다...

신관의 아들이 갑자가 신들려 말하기를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농성하는데, 이국 오랑캐인 명나라인과 조선인이 맹렬하게 성을 포위해 곤란에 빠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신들이 그곳으로 건너가 2~3일 안에 이국 오랑캐들을 모두 쓸어버릴 것이니 안심하라고 했다. 


'다이코기'에서도 공상에 가까운 기록이 많습니다.


... 기요마가사 울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시작하자 6~70만의 병력이 그를 두려워했는지 1598년 1월 3일 밤에 후퇴했다. 6~70만의 용맹한 군대가 기요마사 한 사람의 용맹함으로 인해 물러난 것이다. 


실제로는 가토 기요마사의 병력 약 15,000명 중에 겨우 500명만 살아 남았고 가토 기요마사도 유서를 썼을 정도로 죽음직전까지 몰렸었습니다. 남부의 왜군 8만 명이 구원하러 온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고, 이 때의 경험을 살려 성을 지을 때에는 다다미에 고구마 줄기를 넣어서 농성식량으로 활용했고 성에는 많은 우물을 팠습니다. 



그럼 왜군의 손실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먼저 1924년 일본 참모본부의 자료를 인용해야겠죠? 저는 편하게 박희봉이라는 분의 자료를 날로 먹도록 하겠습니다. 

(위 자료에 오타가 있군요. 사타케 요시노부를 다테 마사무네로 했군요. 다른 오타도 있을 것 같은데... 귀찮으니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1592년 당시의 병력이 이랬습니다만, 평양에서 물러나 한양에서 전열을 정비했던 왜군은 병력을 점검했는데 그 손실이 무려 50%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특히 1진으로 선봉에서 격전을 치뤘고 평양성에서 3차례나 조명 연합군에게 승리를 거둔 고니시 유키나가는 60%가 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한양으로 후퇴했을 당시만 해도 왜군의 기세가 대단했던 시기인 점을 감안하면, 손실 대부분은 북한의 혹독한 추위와 전염병으로 분석됩니다. 


왜군 1진과 2진인 고니시와 가토의 병력은 대부분 일본 남부출신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추위는 죽음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선조실록에도 왜군의 모습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근일 적진에서 와서 말하는 자들이 모두 '적들이 겹저고리와 겹바지를 입는 습관이 들지 않아 추우면 단지 불만 쬐기 때문에 피부를 데기까지 하고 목을 움츠리고 발을 꼬고 있다'하니.. 


그리고 지난 이야기에서 정리했듯이 조선 전역에는 대기근과 역병이 퍼졌고 왜군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1년 만에 50% 가까운 피해를 입으며 자멸하기 시작했고 조선의 반격에 남부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의 자료는 찾기 힘든데, 아마 정유재란 당시에는 따뜻한 남부에서 추위를 피했다 하더라도 조명연합군의 공세를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여전히 50% 정도의 손실을 입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죽어간 왜군무리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귀한 조선의 온갖 물자와 인재를 훨씬 더 많이 데리고 갔으니 그들에게는 피해를 복구하고도 남는 전쟁이었죠. 


아! 마지막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93년 봄에 조선으로 친정을 하려고 했었고 자신이 타고 건너갈 거대전함을 만들라고 지시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상황도 여의치 않고, 원정장수들의 만류가 빗발쳐서 단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조선에 직접 건너왔었다면 훨씬 참혹한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참고로 박희봉님의 자료는 일본군 피해상황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https://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1&ved=0CCEQFjAA&url=http%3A%2F%2Fwww.kapa21.or.kr%2Fdata%2Fdata_download.php%3Fdid%3D6243&ei=70DbU9T0AsLg8AWf1IHQBA&usg=AFQjCNHkZitG5lPU1z_QYDz4fdIT_t695g&bvm=bv.72197243,d.dGc&cad=rj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