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파르티잔과 싸웠는데, 어땠는가?
- 음, 최악이었다. 파르티잔도 다양했는데, 공산주의 광신도가 가장 위험했고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징집된 농부가 있었고 후방에서 고립되어 어쩔 수 없이 파르티잔이 된 적군 병사가 있었다. 농부나 일반 병사는 어느 순간까지 몰리면 우리에게 투항했다. 그들은 경보병이다 보니 이동속도가 빨랐고 소그룹으로 다니며 히트앤드런 전술로 혼란을 노렸다.
그들은 도로에 지뢰를 매설하고 경비병을 죽이고 장교를 납치하고 마을주민을 강제로 데려갔는데 정말로 따라잡기 힘들었다. 코카서스에서는 험준한 계곡과 울창한 숲이 있었는데 나무 위에는 저격병이 있었고 벙커를 곳곳에 설치했고 지하에 병원, 무기제조 공장 등 없는 것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빨치산으로 알려진 소련 게릴라입니다.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후방에서의 게릴라 활동이 왕성해졌는데, 독일군의 잔혹한 수탈과 압제가 큰 원인이 되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그안에서 추위를 피하며 위장을 했다. 그들은 야생짐승처럼 살았고 그렇게 싸웠다. 심지어 살인범까지 감옥에서 데려와 파르티잔 부대를 만들었다. 저격병은 심각한 피해를 입혔는데 잡는 것은 고사하고 위치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이런 전투는 정말 최악이었다. 사람의 신경을 갉아먹고 무너져내리게 만든다. 차라리 적군 정규군을 상대하는 편이 더 나았다. 적군 정규군이 아무리 위험한 전력이어도 파르티잔보다는 편했다.
- 파르티잔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가?
- 그들은 독일군복을 입지 않는다면 보통은 군복없이 다녔고 마을 주민 사이에 섞여 있어서 누가 파르티잔인 지를 구분하기 힘들었다. 무기를 소지하거나 공격해오는 놈이 아니면 사실 구분할 수 없었다. 전쟁 말기에는 적군 정규군에 흡수되어 군복을 입었다. 파르티잔은 어떤 원칙도 없었고 빈 곳이 보이면 노렸다. 구석에 몰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규군보다 더 끈질기게 저항했다.
- 적군 병사에 대한 소감은?
- 훈련도 안되었고 자살에 가까운 전술을 썼지만 인내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연령이나 민족에 상관없이 동원했다. 전투 중에 죽은 9살 아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공산주의자를 다시 한 번 혐오하게 되었다. 부하들도 여성이나 아이에게 총을 쏘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총을 쏠 수 밖에 없었다.
- 당신이 잡은 포로에 대한 소감은?
- 러시아군 대부분은 항복하고 싶어했다. 느닷없이 전장에 끌려온 농부는 살고 싶어했다. 우리는 전선 전역에 (투항하기 위한) 안전통행증을 뿌렸는데 많은 병사가 소지하고 있었다. 수천 명이 통행증을 들고 투항했다.
전쟁초기에 엄청난 수의 소련군 포로가 잡혔는데, 독일군의 부족한 준비도 있고 슬라브 민족에 대한 혐오감때문에 많은 포로가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군은 항복보다 죽음을 택하게 되었고 독일군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옵니다.
- 동부전선에서 부대상황은 어땠는가?
- 몇 건의 자살사건도 있었고 미친 병사도 나왔다. 아마 당신도 경험해보면 알텐데, 경험해보기 전에는 뭐라고 설명하기 정말 힘들다. 탈진, 배고픔, 공포와 고통, 혹독한 추위를 겪어봐야 내 설명에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잔혹함때문에 상황은 더욱 나빴다. 눈동자가 풀린 채로 행군하고 몇 주 동안 따듯한 음식은 구경도 하지 못하는데, 죽은 말이나 우호적인 마을을 만나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마을주민을 상대로 절대로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다. 그들의 신뢰를 잃으면 우리는 10배로 돌려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많은 독일군 부대가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943년에는 제5 SS 뷔킹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명령을 그런대로 지켰다. 그렇지만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 탈영병은 어떻게 처리했나?
- 붙잡힌 병사, 거의 모두 붙잡힌다, 그 병사는 처형되어 공개전시된다. 나이가 어린 탈영병은 전쟁이 너무 버거웠다. 탈영해서 헌병에게 붙잡히는 것보다는 그냥 적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헌병은 알아서 처리했는데 매우 슬픈 일이었다.
- 독일편으로 전향한 소련군 부대와도 협동작전을 했는가?
- 여러번 그랬고 성공과 실패 모두 경험했다. 소련으로 다시 전향한 공산주의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종전까지 독일편에서 싸웠다. 공산주의자에게 잡히면 어떻게 되는 지를 잘 알고 있는데다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며 우리편을 들었다.
최고의 지원병은 아무래도 서유럽인이었다. 벨기에, 프랑스(사진참조), 네덜란드와 노르웨이말이다. 뷔킹 사단은 가장 뛰어났고 보조부대가 아니라 실제 SS 부대로 기갑사단을 완편했다.
네덜란드에서의 SS 지원병 모집 포스터입니다. 볼세비키와 싸우자는 내용입니다.
- 소련의 선전책동은 어땠는가?
- 꽤 자주 있었다. 적군은 우리를 알고 있었고 프랑스어로 방송하면서 카를 드골 편에서 싸우자고 권유했다. 물론 씨알도 안먹혔다. 그래도 꽤 재미있었다.
- 히틀러나 히믈러같은 나치 지도자와의 회동에 대해 말해달라. 소감은?
- 내 기억이 맞다면 히믈러는 4번 만났고 히틀러는 여러 번 만났다. 훈장 수여말고도 말이다. 한 번은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났는데 1943년에 카톨릭 신부를 배속시켜달라고 요청했고 승낙을 받았다.
히틀러가 만약 아들이 있다면 나같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나를 존중했고 히믈러도 나를 각별하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단 한 번도 믿지 않았고 그가 SS 최고사령관이라는 점이 불편했다. 만약 동유럽 민족이 모두 우리와 뜻을 같이 했다면 미국이 참전해도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 히틀러가 기사십자 훈장을 직접 달아주었나?
- 그렇다. 체르카시 전투 후인 1944년 2월에 달아주었는데 꽤 드문 일이었다. 아마 히틀러가 직접 달아준 것은 2~30명에 불과할 것이다. 그 중에 12명은 1940년 5월에 있었던 에방 에말Eban Emael 공수작전 참가자였다.
괴벨스는 내 훈장수여를 이용해서 외국 지원병 모집캠페인을 했다.
- 독일이 1945년 5월 8일에 항복할 때에 계급은 무엇이었나?
- SS 준장Oberfuhrer였는데, 상급대령과 준장 사이의 계급으로 연합군에는 없는 계급이었다. 전쟁 마지막 주에 장군으로 승진했는데 SS 소장Brigaderfuhrer는 되지 못했다.
- 연합군에게 체포되어 벨기에나 소련 후송되지 않았나?
-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독일, 벨기에와 덴마크로 마구 달렸는데 키엘에서 히믈러를 만났었다. 배를 타고 노르웨이 오슬로로 갔고 노르웨이 파시스트 지도자를 만난 후에 오래있지 못할 것을 알았다. 비행기에 연료를 채우고 이륙했다. 연료가 다 떨어져서 스페인 해변에 추락했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벨기에 정부는 내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내 가족을 죽인 살인범은 무시했다. 정의는 힘있는 자의 것이다.
- 종전 후 당신의 삶은 어땠는가?
- 전쟁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친구를 만나면서 보냈고 지금은 새 친구를 사귀고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의 다른 면도 알아야 한다. 신념과 다른 정치문제때문에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는다면 입장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아주 좋은 예다.
-이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 아직 정신이 온전하고 시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책을 집필할 생각이다. 항상 책을 읽고 내 인생에 벌어진 극적인 변화를 되돌아본다. 유럽의 공산주의 붕괴는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증거가 필요했는데 실제로 일어났다.
나는 유대인과 민간인 청소에 대해 모두 믿지는 않으며 내 전쟁도 아니었다. 내 전쟁은 조국을 위한 것으로 50년 전에 싸웠던 전쟁이 이제야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 결국 전세계 공산주의가 사라질 것으로 믿는가?
- 그렇다. 공산주의는 붕괴될 것이다. 정부는 사람이 만든 최고의 조직이다. 정부는 모양을 바꾸며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그렇지만 나는 낙관주의자다. 인류는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며 보다 나은 희망을 갖게 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스페인 자택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비인도적인 범죄를 저지른 전범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추적을 받지도 않았고 벨기에 정부도 반드시 본국으로 송환해서 처형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고위 지휘관으로는 흔하지 않게 천수를 누렸습니다.
그의 책인데... 읽었는지 기억아 안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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