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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사라진 전설, 그리스 불 (1부)

by uesgi2003 2014. 9. 16.


역시 골치아픈 인문학 역사보다는 시원한 자동차가 인기가 좋군요. 캐시카이 외신을 정리했더니 제 차고(?)를 구경오신 분이 3,500명이 넘었습니다. 정작 잘난 척하고 싶은 곳은 서재인데, 차고가 훨씬 인기가 좋아서 잠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서재에 오시는 손님도 소홀히 하면 안되겠죠?


사라진 전설, 그리스 불

 

이슬람은 7세기 초부터 성전의 기치를 내걸고 외곽 도시를 하나씩 무너트리며 비잔틴 제국을 위협했다. 634, 칼리프 오마르는 시리아를 공격했다. 헤라클리우스Heraclius 황제의 비잔틴군은 아즈나다인Ajnadain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635년에 다마스쿠스Damascus, 예루살렘과 안티오크Antioch를 모두 잃었다



비잔틴군이 아즈나다인 전투에서 전멸당하면서 동부영토를 모두 상실하게 됩니다. 원래 역사기록이 승자의 과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비잔틴군의 병력이 적게는 9천 명에서 많게는 5만 명으로 편차가 굉장히 큽니다. 수당 백만 명에 비하면 소심한 편입니다.

어쨌든, 이슬람 기록에 따르면 양쪽의 주요 무장들이 대결을 벌였고 여기에서 비잔틴 지휘관이 많이 죽으면서 병력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머지 지역도 636년에 모두 이슬람의 손에 넣어갔다.

 

헤라클리우스와 후계자 콘스탄스Constans 2세에게는 다행히도 이슬람군이 콘스탄티노플 앞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소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하루가 다르게 이슬람의 영토가 되었다. 654년에는 트리폴리, 아르메니아, 키푸러스와 로도스가 이슬람에게 점령당했다. 알라의 이름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칼리프는 확신을 가지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노리기 시작했다.

 

비잔틴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는 콘스탄티Constantine 4세의 제국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교도가 대함대를 편성해 길리기아Cilicia를 넘어왔고 모하메드Mohammed는 스미르나Smyrna에서, 카이소스Kaisos는 길리기아와 리키아Lycia에서 겨울 숙영을 했다유능하고 용맹스러운 전사, 에미르 칼리드Khalid가 그들을 보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콘스탄틴은 이교도의 대원정을 보고받고는 불가마솥을 갖춘 이단노선과 화공용 파이프를 갖춘 드로몬Dromon(비잔틴 제국이 사용한 대형 이단2노선)을 만들어 콘스탄티노플 항구에 모이게 했다.


콘스탄틴 4세는 고대전사에서 위대한 전략가로 꼽히지 않는다. 비잔틴 제국도 동로마 제국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잔틴 제국은 군사력보다는 외교정치로 국경을 지켰다. 그래서 671년에 야지드Yazid는 콘스탄티노플 앞에서 손쉬운 승리를 자신했을 것이다.

 

테오파네스의 연대기를 보면 자세한 설명은 거의 없어도 이슬람 군대가 예상 밖으로 격렬한 저항을 만난 것만은 분명하다.

 

올해, 앞에서 설명한 이교도의 함대가 바다로 나와 트라세Thrace 지역에 정박했다. 키클로비온이라고 부르는 동쪽 곶 부근에서는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전투가 벌어졌다. 이교도가 공격해오면 반격해 물리쳤다.”

 

비잔틴군은 2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먼저 그리스군이 방어 하나는 명성이 높았다. 콘스탄티노플은 비교대상이 없을 정도의 엄청난 요새였기 때문에 그리스군의 방어력과 결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칼리니코스Kallinikos라는 건축설계자가 시리아의 헬리오폴리스에서 탈출해왔다. 그는 본연의 직업인 건축설계보다는 신기한 화학공식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비잔틴은 인조 불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십자군은 그리스 불이라고 부른 전설이 태어났다



비잔틴 제국에서 발명된 그리스 불은 유럽 전역에 퍼졌고 바이킹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비잔틴 제국의 역사기록에서 그리스 불과 이교도에 대한 설명은 너무나도 짧고 부실하다. 몇 가지 특징만 유추해볼 수 있는데, 그리스 불 이전에도 다양한 유형의 화공무기를 사용했었지만 그렇게 위력은 없었다. 콘스탄티노플 항구를 위협하는 이슬람 함대에게는 그리스 불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는데 물 위에서도 불이 붙었기 때문이다. 비잔틴 자료에 따르면 그리스 불을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식초와 오줌을 뿌리는 것이었다. 그리스 불은 어디에고 달라붙었는데, 13세기 철학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기록을 보면 아무 것에나 달라붙어서 태웠다고 한다.


비잔틴 역사가에 따르면 그리스 불은 아랍 함대를 전체 또는 상당부분을 불태웠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이슬람군이 718년에 다시 나타났을 때에도 그리스 불이 다시 한 번 쏟아졌고 콘스탄티노플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당연히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불의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콘스탄틴 7세가 10세기 중반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비잔틴 제국의 염려를 잘 알 수 있다.

 

그리스 불은 신의 뜻을 받은 천사가 위대한 콘스탄틴 황제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그리고 기독교 도시에서 기독교인이 제조해야 하며 다른 도시나 국가로는 절대로 내보내거나 알려주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고 선조는 그 약속을 엄격하게 지켰다.”

 

실제로 신의 뜻에 따라 그리스 불의 제조법이 전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리스 불에 대한 경외심을 보태고 개인의 욕심 때문에 비밀을 외부로 유출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목적이 더 컸을 것이다. 어쨌든 콘스탄틴 7세는 반역자 처벌이 신의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계자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그리스 불을 다른 나라에 감히 유출시키려는 자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며 어떤 신분도 유지할 수 없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박탈한 후에 추방하고 영원한 경고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 황제나 대주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뜻을 어긴 사람은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처형을 받을 것이다.”

 

비잔틴 제국은 비밀유지에 성공했고 그 덕분에 현대 역사가는 이슬람 해군을 격퇴한 그리스 불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했다. 원료배합과 적을 공격한 수단에 대해서 추측만 할 뿐이다.

야지드의 패배 후 수백 년 동안의 기록을 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설명이 전부다. 12세기 알렉시우스Alexius 황제의 딸, 안나 콤네나Comnena는 아버지의 전기를 남겼는데, “그리스 불은 이런 식으로 제조했다. 소나무와 상록수에서 송진을 모아 유황으로 비빈 후에 튜브에 넣어서 사람이 있는 힘껏 불어 날렸다.”


안타깝게도 안나 콤네나가 기록한 당시에는 그리스 불의 비밀이 유실되었고 비잔틴 제국 어느 누구도 제조법을 알지 못할 때였다. 지금은 나프타에 송진을 추가했을 것이고 생석회를 넣어 수면에서도 불탈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하다. 초석을 추가해 폭발력을 얻었을 수도 있다.

 

그리스 불은 만능의 화공무기가 아니었으며 이슬람군도 화공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 불은 해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화공무기였고 비잔틴 제국만 그 비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 불은 수면에서도 불타올랐고 도저히 끌 수 없다는 점에서 이슬람군의 화공무기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이슬람군의 화공무기는 목표물에 적중해야만 효과가 있었지만 그리스 불은 넓은 수역에 화염장막을 만들었다.

보스포루Bosporus 해협처럼 좁은 지역은 그리스 불 몇 방만 쏘아도 몇 시간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테오파네스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 불 때문에 야지드 함대가 패배했다는 내용이 없다. 그저 이슬람군이 비잔틴 제국을 포위했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던 중에 산의 분노를 사서 침몰했다는 내용만 있다. 테오파네스는 봄에 출항해서 기독교 함대와 해전을 벌였다. 7년 동안 같은 방식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신의 벌을 받아 막대한 병사를 잃거나 부상당해 처참한 모습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자 마자 겨울태풍과 폭풍을 만났고 산산조각나서 완전히 전멸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리스 불이 이슬람 함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그리스 불은 이슬람 함대의 접근을 막는 정도에 그쳤고, 보급품 부족과 질병 때문에 이슬람군이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테오파네스가 말한 막대한 피해도 비잔틴 제국의 핵심전력인 궁수에게 당한 것일 수 있다.

 

비잔틴 제국이 아무리 기밀유지에 신경썼다고 해도, 이슬람군도 그리스 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콘스탄틴 7세가 아들에게 기밀유출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경고했던 편지를 보면 악은 언제나 스며들기 마련인데, 지휘관 중 한 명이 이교도의 뇌물에 넘어가 그리스 불의 비밀 중 일부를 넘겨주었다…”라고 털어놓았다.

 

814, 불가리아 민족이 상당한 양의 그리스 불을 빼앗는데 성공했지만 사용법은 전혀 몰랐다. 인화물질을 일반 무기와 달라서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했다.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불이 다른 화공무기와 달랐던 두 번째 이유다.

 

바티칸에 보관된 기록을 보면 적에게 그리스 불을 발사하는 장치가 상당히 자세하게 그려져있다. 3명이 노를 젖는 작은 배의 선수를 보면 두 명이 관을 통해 적의 배에 그리스 불을 쏘고 있다. 



레오Leo 황제는 배의 선수에 황동관을 장착해서 좌우와 상하로 불을 쏠 수 있었다. 병력이 대기하는 갑판 위에 임시 갑판을 놓고 관을 설치했기 때문에 접근하는 적의 위로 불을 쏘았다. 배에 쏘거나 적의 얼굴에 불길을 쏘았다라는 설명을 남겼다.



게임의 한 장면입니다.  

 

그리스 불을 적에게 쏘았다는 설명을 보면 수류탄이나 화염병처럼 다양한 무기로 사용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비잔틴 제국이 황동관을 사용했다는 구체적인 언급을 보면 화염방사기처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