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의 카스트로 제거계획은 공식적으로 백악관과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CIA의 극비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는데 일이 틀어질 경우에 무관한 것처럼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1961년 봄부터 1963년 초가을까지 2년 동안 몽구스 작전이 진행되었고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대통령의 동생으로 법무부장관)의 주도하에 미정부의 대규모 작전으로 발전했다.
잘 풀렸다면 3형제가 미국대통령을 연임할 수도 있었던 케네디 가문입니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로버트, 에드워드, 존 케네디입니다. 로버트 케네디도 승승장구하다가 암살되었고 에드워드는 자동차 사고와 비서의 죽음에서 보인 행동으로 결정타를 입고 대선의 꿈을 접었습니다.
기회가 된 김에 세계 최대의 정치가문에서 비극의 가문이 된 케네디 가문의 불행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조지프 케네디 -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형. 1944년 무인폭격기 실험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
존 케네디 - 35대 대통령으로 댈러스에서 피살.
로즈메리 케네디 - 누이동생. 어린 시정의 뇌손상으로 정신지체장애. 보호시설에서 여생을 보냄.
캐슬린 케네디 - 누이동생. 2차대전에서 남편을 잃고 자신도 1948년 프랑스 비행기사고로 사망.
로버트 케네디 - 남동생. 차기 유력한 대통령후보였으나 친 이스라엘 정책으로 요르단출신에게 피살.
에드워드 케네디 - 케네디의 막내동생. 여비서의 의문사가 평생 발목을 잡았고 2009년 사망.
패트릭 케네디 - 케네디 대통령의 막내아들. 조산 후 2일 만에 사망.
에드워드 케네디 주니어 - 에드워드의 장남. 골암으로 12살에 다리절단 수술.
데이비드 케네디 - 로버트의 넷째로 1984년 약물과다로 사망
마이클 케네디 - 로버트의 여섯째로 1997년 스키사고로 사망
존 케네디 주니어 - 케네디의 아들. 1999년 로버트 케네디의 딸 결혼식에 참석하려다가 비행기사고로 부인과 사망.
암살 프로젝트를 관장할 특수기관(SGA)가 만들어졌고 거의 매일 회의를 했다. 로버트 케네디, 맥나마라, 맥스웰 테일러(장군), 맥조지 번디(참모), 로스웰 길패트릭(참모), 아더 슐레싱거(참모), 리차드 굿윈(참모), 리만 렘니처(합동참모부 장군)가 참석했다.
작전 총책임자는 에드워드 랜스데일Edward Lansdale준장이 맡았는데 195년대 필리핀과 베트남 게릴라전으로 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그의 화려한 스타일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끌었고 영국인 작가 그래함 그리니Graham Greene는 랜스데일에게서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의 주인공을 만들어냈다.
랜스데일은 과격한 제임스 본드였던 빌 하베이Bill Harvey와 함께 몽구스 작전의 세밀한 부분을 정리했다. 둘은 얼마 안가 반목하게 되었는데 하베이는 전통적인 CIA 암살방식을 주장한 반면에 랜스데일은 쿠바 내에서 소요를 일으켜달라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혼란전술을 사용하려고 했다.
CIA는 마이애미 남서쪽의 리치몬드 해군항공기지에서 비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가짜 상점 등의 위장건물을 수 백 채 지었는데 사령부는 제니스 기술서비스라는 간판을 달았다. 실제로는 쿠바침공 전진기지였다. 플로리다 앞바다에서는 고속정이 쿠바로 스파이를 실어 날랐는데 플로리다 경찰과 문제가 생기면 전화 한 통화로 해결되었다.
예를 들어 1962년 12월 5일, 마이애미 해럴드는 솜브레로Sombrero와 마라톤Marathon키스Keys 에서 활동하던 미용병 10명의 체포를 보도한 적이 있었다. 군복차림의 용병은 막대한 양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가 미세관원에게 체포되었는데 쿠바 내에 테러를 벌일 계획이었다.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는 몽구스 작전이 정부 내에서 최우선순위라고 분명하게 못박았다. “예산, 시간, 인력을 아끼지 말라”며 지원했다. 작전에는 CIA가 보유하거나 임대한 비행기, 고속함정, 가상회사, 정보부 등이 투입되었다. 가상회사 중에는 지브랄타 증기선 회사도 있었는데 실제로는 모든 해상활동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기관의 고속함정은 에이스 지도제작 회사라는 부서가 맡았다. 해저침투 작전도 있었는데 쿠바와 미국인을 훈련시켜 쿠바 항구로 침투하거나 항구를 함정으로 공격하는 역할이었다. 해상 엔지니어링과 훈련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비밀기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쿠바 정보부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스트로는 하바나를 탈출한 수십만 명의 망명자들 틈에 수 백 명의 스파이를 섞어두었다. 마이애미와 키스제도의 술집, 식당과 쇼핑센터에서 반 카스트로 움직임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카스트로 정보부는 몽구스 작전에 대해 모두 알지는 못해도 미국정부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낌새는 알아챘다.
쿠바 본토에서는 무차별 체포와 심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다른 한편의 케네디 행정부는 몽구스 작전을 위한 법을 만들고 있었다. 1962년 3월 14일, 대통령은 SGA의 새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A) 카스트로 정권전복을 유발하는 임무, 미국은 쿠바의 내외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지만 궁극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군사력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1962년 하반기가 되었는데도, 작전진행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를 전복시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석유저장고, 해상시설, 심지어 항구의 러시아 선박을 공격하는 테러를 벌이다가 봄에는 미해군과 해병대가 푸에르토 리코로 넘어가서 Quick Kick 작전을 벌일 준비를 했다. 이 작전에는 4,000명의 병력, 79척의 함정과 300대의 비행기가 동원될 예정이었다.
침공군은 해안상륙훈련을 했고 해병은 실제 쿠바공격을 가상해서 비에케스Vieques섬 해변에 상륙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훈련이 계속되자 카스트로도 미국이 자신을 노리고 조만간 무력침공한다고 생각하고 미친 듯이 소련의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미국 군사력이 쿠바를 계속 압박하고 있던 중, 후루시체프는 1962년 4월, 군사고문과 회동을 가졌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소련을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 주피터 미사일이 터키 국경 바로 너머에서 소련을 겨냥하고 있었다.
미국이 소련영토 부근에 미사일을 배치할 수 있다면 자신도 러시아 미사일을 미국해변 근처에 배치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는 4월 말, 참모와의 협의를 거쳐 케네디의 쿠바 비밀전쟁에 대응하는 중거리 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양측의 결정이 핵전쟁으로 향하고 있는 동안에도, CIA 후원을 받은 망명자의 대쿠바 테러작전이 강도를 높여갔다. 1962년 8월 24일, 쿠바 망명자(군)이 2척의 작은 선박을 타고 하바나항을 통해 이카르Icar호텔에 접근했다.
카스트로는 이 호텔에 자주 들린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실제로 카스트로는 호텔 안에 있었다. 망명군이 자동소총을 호텔로 퍼부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2일 후에, 또 다른 망명군이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호텔을 공격했다. 3개월 전에는 알파Alpha66이라는 망명군이 산타 클라라 데 노르테Santa Clara de Norte 부근에서 쿠바해안경비대를 공격해 2명을 죽이는 일도 있었다.
CIA의 내부보고에 따르면, 카스트로는 1962년 여름에 미국이 침공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CIA가 카스트로 암살과 쿠바침공을 포기하지 않았는데도 9월 이후에는 미국의 침공에 대해 염려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소련 미사일이 9~10월 중 쿠바에 배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월에도 쿠바 망명군이 쿠바 전역의 항구, 군사와 경제시설을 공격하는 동안 미국도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CIA는 9월 8일, 옴스크Omsk가 카실다Casilda항에 들어오더니 소련 수송선이 연달아 쿠바로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프랑스 정보부는 몇 주 전에 소련 미사일이 쿠바로 들어온다는 정보를 넘겨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 천 명의 소련군도 배치된다는 정보였다.
케네디는 압박수위를 높이기로 했다. 10월 16일부터는 지금까지 성과가 없었던 몽구스 작전이 탁자 위에 올려졌고 법무장관이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회의록을 보면 대통령의 실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쌓여가는 정보량에 비해 테러성과나 쿠바내부의 소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케네디 형제는 소련이 수 천 명의 군사고문단, MIG기와 ICBM을 쿠바로 보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이쯤 되면 1962년 미사일위기는 케네디 행정부가 카스트로를 계속 위협하면서 자초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구스 작전이 절정기에 이르자, CIA와 군은 쿠바 민심을 교란하고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기 위한 다양한 비밀작전을 계획했다.
빙고Bingo 작전: CIA가 주도한 과감하지만 성공가능성이 없었던 작전. 관타나모Guantanamo만의 해군기지를 쿠바군이 공격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화재를 만들고 쿠바에 군사보복하려던 작전.
위장Cover-Up 작전: 우주 프로그램과 심리전의 일환. 미해군이 미우주인을 실은 머큐리 캡슐울 회수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실제로는 쿠바를 침공.
무임승차Free-Ride 작전: 쿠바국민의 소요를 유발하는 작전. 쿠바국민에게 멕시코, 베네수엘라와 다른 남미로 떠날 수 있는 팬암 항공권을 배포하는데 실제로 미국이 그 비용을 지불할 예정이었음.
이런 작전은 우스개로 치부할 수 있지만 합참이 기획한 노스우즈Northwoods 작전은 심각했다. 실제로 관타나모 기지의 전함을 파괴한 후에 쿠바의 소행으로 만들 계획이었는데 그 후에는 마이애미와 워싱턴 지역의 무고한 시민까지 죽일 생각이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더 끔찍하게도 미국으로 망명하는 피난민 선박을 고의로 침몰시키고 미국 항공기를 가짜로 피납시키고 쿠바 MIG기가 국제수역에서 미군기를 여러 대 격추시켰다는 가짜 보도를 내보내는 계획이었다. 모두 쿠바를 침공할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노스우즈 계획에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196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미정보부는 쿠바로 향하는 수송선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쿠바내부의 요원에 따르면 쿠바는 대규모 소련미사일 배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수 천 명의 소련 기술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이 미사일을 발사대에 세우기 전에 쿠바를 10월에 선제공격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10월 16일, U-2가 미국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을 쿠바에 보냈다는 증거를 가지고 돌아오자 상황이 급변했다.
이후 벌어진 13일의 위기 동안, 미국은 쿠바 전역을 봉쇄하며 봉쇄선을 넘은 소련 선박은 모두 격침시키겠다고 위협했고 혹시라도 있을 쿠바침공을
위해 플로리다에는 대규모 병력이 집결했다. 소련은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이미 몇 기의 전술핵무기를 쿠바에
들여놓은 상태였고 미국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미군이 쿠바해변에 상륙하면 그대로 사라질 판이었다.
CIA는 허가도 받지 않고 2인용 잠수함에 요원들을 태워 소련 미사일 시설을 정찰하게 했고 그 사실을 안 워싱턴은 쿠바 내부의 요원에게 복귀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쿠바에 잠입한 팀은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어쨌든 미국에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다.
미국이 주피터 미사일철수를 비공식적으로 약속하자 후루시체프 수상도 미사일철수를 결정했고 이렇게 미사일위기는 끝이 났다. 그리고 미사일위기가 대화로 풀리면서 몽구스 작전도 자연스럽게 막을 내렸다. 1963년 가을까지 소규모 테러공격은 계속 되었지만 쿠바와 카스트로 정권은 건재했다. 이제 작전종결을 외치는 목소리가 행정부 내에 가득 차게 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핵전쟁으로 치닫는 두 나라를 비난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목소리였죠.
위기 후에 케네디대통령은 소련과의 긴장관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1963년 6월, 미국과 소련은 핵실험금지 협정을 맺었다. 카스트로는 케네디가 자신과 비밀협상을 할 생각이 있는 지를 타진했다. 케네디가 11월 22일, 텍사스 댈러스에서 암살당할 당시에도 대통령의 개인특사가 하바나에서 카스트로를 만나고 있었다.
같은 날, CIA의 쿠바요원 롤란도 쿠벨라Rolando Cubela는 파리에서 상관을 만나 카스트로를 암살할 다른 시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CIA와 마피아의 연루를 조사한 검찰총장의 보고서를 보면 이 마지막 회의가 잘 나와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보면, 소련 미사일의 쿠바배치는 언론과 미정부가 주장하듯이 단순한 적대행위로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케네디 형제의 카스트로 축출전쟁은 케네디의 대통령 재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카스트로를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카스트로는 눈앞에 나타나는 미국의 침공에 저항하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아직도 1962년에 사악한 소련이 핵미사일을 현관 앞에 놓으려고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소련과 핵미사일을 현관 앞까지 불러들인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당시 오키나와 지하 미사일기지에는 2차대전에 투하된 리틀보이와 팻맨보다 50배나 강력한 핵미사일이 6기 배치되어 있었고 미사일위기 당시에 데프콘DEFCON 2와 3를 오가며 핵전쟁 직전까지 다가섰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다시 데프콘 3가 발령되었는데 겨우 20세에 불과한 병사들이 느끼는 불안과 압박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미사일 발사 후에 바로 보복 핵공격을 받고 도망치거나 숨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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