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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나폴레옹전쟁

독배를 든 나폴레옹, 보로디노전투 1812년 (2부)

by uesgi2003 2015. 4. 30.



상세한 전황은 지도를 참조해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큰 그림으로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러시아 장교의 기록을 보자. “다리를 건너 후퇴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총탄이 심하게 쏟아진 적이 없었다. 한꺼번에 다리로 몰려들어서 하마터면 강에 빠질 뻔 했다. 겨우 10분 만에 장교 30명이 죽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다리를 폭파해서 프랑스군의 추격을 막을 수 있었다. 외젠이 대방벽Great Redoubt를 노리는 동안 훨씬 심각한 전투가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부와 네Ney원수는 플레쉐Fleches를 돌파해서 러시아 중앙으로 돌아 전선 전체를 붕괴시키려고 했다.



플레쉐는 화살표라는 프랑스어인데 이런 형태의 방어시설을 말합니다.

바그라티온 플레쉐는 바그라티온이 만든 장애물과 참호를 말합니다




프랑스군이 바그라티온 플레쉐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군 야포가 급히 달려와 프랑스군의 공격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의 절대적인 위기였지만 바그라티온은 제대로 방어를 했고 제2 연합척탄병사단과 네베롭스키의 27사단의 분투로 프랑스군의 전진을 허용하지 않았다.

플레쉐를 둘러싼 양측의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중 몇 안되는 혈전이었다. 장애물 앞에는 시체가 쌓였고 간신히 점령하면 곧바로 반격이 이어져서 물러났다가 다시 점령하는 줄다리기 양상이 계속 되었다.

 

러시아 흉갑기병Cuirassier이 돌격해서 악마처럼 우리 보병을 덮쳤다가 30문의 포대로 향했다. 기병이 지나갈 때에 사격을 퍼부었지만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포도탄도 돌격을 막지 못했다. 재빨리 대포 밑에 숨지 못한 포병은 칼을 맞고 쓰러졌다.

그렇지만 아군 기병이 새로 투입되면서 러시아 기병이 물러나면서 우리 곁을 다시 지나갔다. 우리는 다시 적에게 사격을 했고 총검으로 퇴로를 막아보려고 했다.“

 

방벽을 하나 점령했다고 해도 그 너머에서는 러시아군의 저격수와 포도탄이 기다리고 있었고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10여 명씩 쓰러졌다.

바그라티온은 프랑스군이 심각한 피해를 견뎌내며 침착하게 전진하는 것을 보고 브라보라고 찬사를 보내다가 다리에 파편을 맞고 쓰러졌다. 러시아군은 세메놉스카야 개울 너머로 후퇴했고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

 

프랑스군도 6시간에 걸친 전투로 완전히 탈진한 상태인데다가 플레쉐에 들어섰다고 해도 러시아군쪽으로는 완전히 개방된 상태라 일방적으로 포탄에 두들겨 맞았다.

적이 그렇게 완강하게 버티던 방벽 하나를 마침내 차지했다. 겨우 휴식을 취했지만 달콤한 장미정원이 아니었다. 20문의 포가 우리를 향해 쉴새없이 포문을 열었다.”

 

다른 한편에 있던 포니아토프스키도 투치콥Tutchkov에게서 우티차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전력이 이미 바닥난 상태라 초반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하고 소모전에 붙잡혔다.

프랑스군은 보로디노 마을을 확보한 후에 다음 목표인 대방벽을 노렸다. 네와 다부는 바그라티온과의 전투에 정신이 없었고, 외젠은 다부의 병력을 일부 받아서 대방벽을 향했다.

대방벽은 러시아군 중심이었기 때문에 특히 공들여 구축했고 라젭스키Rajevsky가 방어를 맡고 있었다.

공병장교가 기병의 돌파를 막을 수 있게 너비 150m 정도의 구덩이를 파자고 했고 이제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면 되었다.”

 

러시아군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오전 1030, 강력한 포격을 등에 업은 프랑스군이 화려한 복장과 함께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초병을 밀어내고 방벽 앞의 구덩이에 들어가 잠시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 경사면을 올라왔다.

라젭스키의 기록을 보자.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적이 사거리에 들어오자 포문을 열었고 포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포격 직후에 참모 한 명이 내게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프랑스 척탄병 몇 명이 방벽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이렇게 기록했다. “연대에 전진명령이 떨어졌다. 경사면 위로 올라서자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포도탄이 전열을 거의 쓸어버렸다. 우리는 계속 뛰어 오르며 굴러오는 탄을 피했지만 소대전체가 사라지며 대열에 큰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적이 막 포를 쏘려는 순간에 방벽 안에 뛰어들었다. 포수는 지렛대와 꽂을대로 맞섰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칼로 한 명을 죽였는데 러시아군처럼 집요한 적은 처음 만났다.”

 

방어선이 무너지자 라젭스키와 22살의 쿠타이솝Kutaisov장군이 바로 반격에 나섰다. “적을 양쪽에서 공격해 밀어냈고 부상당한 보나미Bonamy장군을 포로로 잡았다. 우리는 쿠타이솝이 죽었고 예르몰롭이 부상당했다. 다시 방벽을 되찾았지만 군단전체가 겨우 700명만 남았고 (낙오병과 경상자가 복귀한이튿날에도 1,500명이 넘지 못했다.”

보나미는 15군데나 부상을 당했고 그의 부대는 완전히 궤멸했다. 프랑스군은 다시 집결해서 공격태세를 갖췄지만 우바롭Uvarov의 기병 5,000명이 보로디노 너머까지 돌격해 들어가 보병과 기병을 흩어놓았다가 다시 밀려났다. 우바롭이 적시에 공세를 펼친 덕분에 프랑스군 좌익이 흔들렸고 러시아군은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방벽에서 혈전이 벌어지는 동안, 프랑스 우익은 플레쉐를 점령한 후에 세메놉스카야 마을을 공격해서 러시아 전선에 구멍을 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라는 나폴레옹에게 급히 제국근위대Imperial Guard를 투입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나폴레옹은 거절하고 여전히 제국근위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그는 우바롭의 돌격이 당황스러웠고 보로디노 이후의 전투도 생각해야했다. 대신에 근위대 포병과 청년근위대Young Guard(그림 참조)의 폴란드 3개 연대를 지원했다



급히 세메놉스카야로 달려간 포대는 대열을 필사적으로 메우는 러시아군을 쓸어버렸다. 녹색제복의 러시아군은 마을 뒤의 경사면에 쓰러졌다.

오스테르만Ostermann의 부대가 적의 맹포격을 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군단은 궤멸되었다. 장군에게 말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 주변에 몇 발의 포탄이 떨어져서 말이 쓰러졌고 우리는 흙을 뒤집어썼다. 골리친Golitzn공이 중상을 입었고 바크메티엡Bakmetiev장군은 다리를 잃었고 오스테르만도 부상을 입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 지를 바로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러시아의 좌익을 맡은 바그라티온이 다리에 부상을 입고도 계속 지휘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장군 장 합Jean Rapp도 바그라티온 방벽공격을 이끌다가 엉덩이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양쪽에서 70명의 장군이 사상당할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러시아군 포대(그림 참조)는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보병전력이 심각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기병이 그 틈을 메우고 러시아군의 기병에 반격해야했다. 말을 타고 대기하는 기병은 러시아군의 더 없이 좋은 목표물이 되었다. 러시아군의 포격이 있을 때마다 기병대에는 피투성이의 통로가 생겼다.

흉갑기병 대위의 기록을 보자. “우리 연대는 하루 종일 제자리에서 포격만 받았다. 주변에는 죽어가는 동료가 가득했다. 중대를 돌며 상황을 점검했는데 여전히 사기가 높았다. 젊은 장교에게 말을 걸었더니 그저 물 한잔만 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 순간에 포탄이 날아와 그를 찢어놓았다.” 



보로디노전투 7년 전에 있었던 전투로 전술을 바뀌지 않았으니 보병전술을 보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그리고 왜 고급장교의 피해가 컸는 지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