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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해적에서 제독이 된 프란시스 드레이크경

by uesgi2003 2015. 5. 27.


얼마 전의 무적함대 영국원정에 등장했던 드레이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배경을 설명하다 보니 드레이크 자신보다는 오히려 호킨스 이야기가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이 기회에 영국 해적질 역사를 함께 알아보는 것도 좋겠죠.


영국은 해적까지도 국가에 절대적인 보탬이 되었는데, 우리는 북한보다 더 악랄한 군비리가 고구마 줄기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해적에서 제독이 된 프란시스 드레이크경

 

해적질은 죽음과 고통을 수반한 끔찍한 단어다. 상형문자 시대부터 해상도적이 함께 기록되었고 인류를 괴롭혀왔다. 꼭 큰 바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름 모를 좁은 강에도 통나무 뗏목을 탄 도적이 조악한 무기를 들고 이리 저리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인질과 물건을 납치하고 빼앗아 거래하거나 몸값을 받았다.

무려 4,000년 전의 지중해 해상족Sea People부터 최근의 소말리아Somalia 해적까지, 힘의 공백이 있는 공간에는 해적이 스며들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도시의 뒷골목부터 태평양까지, 정부와 국제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마다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리고 해적질(사략질)을 중앙정부에서 일부러 방치하거나 오히려 육성지원한 시기도 있었다.


 

1540년경, 종교갈등으로 분열된 영국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적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태어났다. 로마교회는 수 백년에 걸쳐 무슬림과 전쟁을 벌인 후에 분열되었다. 허영과 거짓으로 가득 찬 교회에 반대하는 개신교Protestant가 유럽대륙에 생겼고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대사 선포의 권능과 효력에 대한 95개조 반박Ninety-Five Theses on the Power and Efficacy of Indulgence1517년에 비텐베르크성 교회문(사진 참조)에 내건 후에 논쟁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1534년 헨리Henry 8세는 교황의 영향을 거부하고 성공회Church of England의 수장이 되었다. 영적인 목적보다는 개인의 사욕과 왕조를 위해서 그런 것이지만 말이다.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자 앤 불린Anne Boleyn과의 사랑놀이와 튜더Tudor 왕조 후계자를 위해 아라곤의 카랄리나Cartherine of Aragon 그리고 딸 메리Mary를 버렸다. 안타깝게도 앤에게서 엘리자베스Elizabeth만 얻었다.

 

헨리는 1536년에 앤에게 엉터리 죄목을 씌워 처형하고 제인 시모어Jane Seymour와 다시 결혼했다. 1537년에 결국 아들 에드워드Edward를 얻었지만 아내를 잃었고 에드워드도 겨우 15살의 나이에 후계자없이 죽었다.

개신교도와 드레이크에게는 불행하게도 메리 튜더가 왕위에 올라 구교복귀를 선언해 영국은 다시 종교갈등에 빠졌다.

 

1549, 로마 구교파가 에드워드의 종교개혁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어린 드레이크의 개신교가족은 데논Devon 농장을 버리고 달아났다. 평민출신이어서 어릴 때의 기록이 불분명한데, 드레이크는 지역 선장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나중에 유산을 물려받았고 신세계 해적으로 출발하는 디딤돌삼았다는 주장이 있고, 아버지가 플리머스Plymouth의 윌리엄 호킨스William Hawkins의 집에 맡겨 해적질을 배우게 했다는 주장이 있다.

 

호킨스 가문은 대서양 동쪽에서 바람과 시장을 따라 장사를 하는 작은 상선단을 운용하고 있었다.국제분쟁이 일어나면 교역은 상당히 위축될 수 밖에 없었고 호킨스 가문은 작은 해적단으로 변신했다.

1558, 드레이크는 호킨스의 아들 존 호킨스 함대에 몸을 실었고 무기사용법, 선박운용술, 물류, 항해와 지도력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1558년에 개신교도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르자 사략선Privateer이 공공연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처녀여왕Virgin Queen, 엘리자베스 1세는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왕국내의 갈등을 봉합했고 스페인의 펠리페Philip 2, 교황, 왕위를 노리는 수많은 청혼자와 싸워 이겼다. 영국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심지어 해적도 중요한 국가자원으로 활용했다.

국고에 거미줄이 칠 정도로 압박을 받자, 엘리자베스는 해적Sea Dog에게 구교 도시, 선박 그리고 육상교역로까지 약탈해도 좋다는 동의를 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때부터 해적여왕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리게 되었다.

 

호킨스 가문은 메리의 치하에서도 작은 해적질을 했지만 아주 조심스러웠다. 유럽의 구교 교역선을 약탈했다가는 교수형이 기다렸다. 엘리자베스는 1562년에, 존 호킨스에게 비공식적으로 아프리카와 신세계 해안을 약탈해도 좋다고 승인했는데 스페인이 독점한 노예무역로에서 활동해도 좋다는 허가였다.

호킨스는 3~4척의 배를 끌고 기니Guinea만을 따라 약탈하거나 노예교역을 했다. 노예가 너무 많을 때에는 포트루칼 상선을 강제로 이용해 노예를 싣게 하고 함대에서 가장 작은 선박에는 귀중품을 싣고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호킨스는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서인도제도West Indies로 가서 지역 부호에게 노예를 팔았다. 펠리페 2세의 명에 따라 스페인 관리가 교역을 막으면 인질을 잡거나 아예 도시를 봉쇄하고 몸값을 받아냈다. 몸값을 받은 후에는 비슷한 금액의 노예를 내려놓아서 스페인 법을 교묘하게 피했다.

15639, 호킨스는 노예대신에 서인도제도의 귀중품을 가득 싣고 귀국했다.



카리브제도가 서인도제도입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에 상륙했다고 믿어서 서인도제도라고 불렀습니다. 

 

1562~1563년의 막대한 수익은 여왕까지 흔들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포루투칼과 스페인 외교사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호킨스의 다음 항해를 지원했다. 루벡의 예수Jesus of Lubeck (700)호를 호킨스의 기함으로 내주었고 호킨스는 156410월에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로 항해했다.

이번에도 드레이크는 그와 함께 바다로 나서 해적과 교역을 배웠다. 특히 해적의 협상술에 대해 배웠고 스페인 식민지의 약점과 로이 데 마요Rio de Mayo의 개신교 피항지 캐롤라인Caroline요새의 위치도 파악했다. 그는 중앙 아메리카 정글에서 도망노예Negro Cimarron 무리도 만나 좋은 관계를 맺었다.


 

호킨스는 성공적인 항해를 마친 후에 다시 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가져온 막대한 이익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해적질에 대한 구교 외교관의 항의 때문에 더 이상 노골적인 투자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500파운드 채권공모를 추진해서 호킨스의 새 항해를 지원했는데 그가 서인도 제도에 들어가면 투자는 모두 무효가 되는 조건이었다. 호킨스와 투자자 모두에게 불행하게도 1566~67년 항해는 채권이 몰수되어 이익을 거의 내지 못했다. 스페인이 영국의 노예판매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항해성과가 점점 나빠졌다.

 

서인도 제도가 닫히고 이익이 크게 줄어들자 호킨스는 새로운 모험을 기획했다. 엘리자베스는 2척의 배(루벡의 예수와 비슷한 크기의 추종자Minion)를 내주었다. 4척의 더 작은 선박을 추가한 호킨스는 드레이크에게 첫 번째로 50톤 주디스Judith의 지휘를 맡겼다.

드레이크가 처음으로 함장을 맡았지만 고난의 연속이었다. 열병과 선상반란 직전까지 몰린데다가 아프리카 해안의 노예시장은 그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호킨스가 선원과 칼싸움을 하는 일도 있었다.

내륙으로 들어가 노예를 잡아도 신세계에서 구매자가 나서질 않았다. 펠리페 2세는 서인도 제도에 요새를 짓고 대포와 수비병을 배치해서 식민지를 강화했다. 호킨스는 리오 델라 아차Rio de la Hacha와 카르타헤나Cartagena에서 격전을 치뤘고 156810월에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노예는 수십 명에 불과했고 약탈품도 빈약했기 때문에 귀국일정을 조금 미뤘다가 폭풍을 만나 멕시코 만으로 도망쳐야 했다. 호킨스는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ua(지금의 베라 크루즈Vera Cruz 부근)을 점령한 후에 파손된 선박을 수리하고 있었다.

마침 스페인 함대가 이들을 발견했고 드레이크의 주디스 그리고 호킨스가 갈아 탄 추종차호만 달아날 수 있었다. 다시 폭풍을 만난 두 배는 따로 영국으로 귀국했는데 400명의 선원 중 겨우 100명만이 돌아갈 수 있었다

(스페인에게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만약 호킨스와 드레이크의 항복을 받아 들였다가 두 사람을 처형했다면 무적함대의 영국원정은 무난하게 성공했을 것이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정권은 완전히 무너져 세계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드레이크는 스페인의 무적함대 원정을 가로막는 공헌을 하게 됩니다.)

 

드레이크는 참담한 실패를 처음으로 맛보았다. 그는 주디스에 실린 약탈품 일부를 횡령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잠시 갇혔는데 자신은 호킨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선원과 약탈품을 나눴다고 주장했다. 호킨스는 드레이크가 일부러 추종자호를 버렸다고 주장하면서 드레이크를 모욕했다.

드레이크는 이 일을 계기로 독립하게 되었다.

 

드레이크는 독립항해를 기획해서 오명을 벗고 입지를 강화해야 했다. 그 당시 해적단의 수장이었던 윌리암 호킨스의 투자를 받았던지 아니면 정말로 주디스에서 횡령을 했던지 알 수 없지만 1569, 2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아프리카와 카리브해를 오갔다.

그는 이 항해를 정찰항해라고 부르며 해적질을 삼가고 강력한 스페인 해군과의 마찰을 피했다. 대신에 스페인 식민지의 약점과 동맹을 찾아다녔다. 어쨌든 남은 이익으로 25톤의 연락선 백조Swan호를 구입했고 2척을 더 투자받아 다시 스페인 식민지로 나섰다. 이번에는 지난 번 정찰정보를 바탕으로 해적질이 목적이었다.

 

드레이크는 가장 큰 배를 파나마만의 카티바Cativa봉 부근에 정박시킨 후에 다른 2척으로 부지런히 부근을 훑었다. 그 지역의 프랑스 해적과 동맹을 맺고 차르게스Chagres강을 거슬러 올라가 스페인 하역지를 공격했는데 스페인 전함이 달려오자 약탈품 대부분을 버리고 전함이 따라올 수 없는 얕은 지역으로 도망쳤다.

스페인 해군이 해적이 출몰한 다른 지역으로 사라지자, 드레이크는 창고, 도시와 상선을 마구 공격했다. 배가 물에 가라 앉기 직전까지 약탈품을 실은 드레이크는 꿩요새라고 이름붙인 본거지에 많은 양을 숨기고 본국으로 향했다


막대한 성공을 거둔 드레이크는 플리머스에 바로 입항하지 않고 여왕의 동의를 구했다.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의 노골적인 해적질을 처벌해야 했지만 100,000파운드가 넘는 약탈품과 드레이크의 특별한 보석선물을 외면할 수 없었다.

드레이크는 여왕의 총애를 받는데 성공했고 이렇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적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몫을 육지와 해상운수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그대로 은퇴할 수도 있었지만 파나마만의 부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서쪽 해안을 다라 금은을 채굴한 후에 파나마만으로 실어보냈고 다시 노새에 실어 동쪽 해안의 놈브레 데 디오스Nombre de Dios항에 모았다가 매년 스페인 함대에 실어 본국으로 수송했다. 놈브레 데 디오스의 수비병이 변변치 않아서 한 번 시도해볼만한 목표였다.

 

15725, 드레이크는 73명을 2척의 배에 싣고 꿩요새로 갔다. 놈브레 데 디오스에 대한 야습은 성공했지만 이미 스페인 함대가 보물을 싣고 떠난 후였고 드레이크도 다리부상출혈로 정신을 잃었다.

드레이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부상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함대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황열병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노리며 기다렸다.

15734, 자유노예와 동맹해적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노새수송단을 공격했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상당한 동료와 보물을 버리고 떠나야했다.

15738, 드레이크는 약탈품을 가지고 플리머스로 귀환했다. 겨우 절반만 돌아왔지만 그들은 평생의 부를 챙겼고 스페인은 드레이크를 잡는 즉시 죽이라는 수배령을 내렸다.

 

드레이크의 재산은 왠만한 영국귀족을 넘어섰고 해운업 투자도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심지어 궁전에서도 그와 사업을 하고 싶어했고 여왕을 동반한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1575, 그는 아일랜드 반란진압 작전에 제독으로 임명되어 참가했고 3척의 전함을 제공해 부를 과시했다.

드레이크는 만족하지 않았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평민에 불과했고 그의 부를 질투하는 사람들은 그의 뒤에서 도적취급을 했다.

 

파나마만 운송과정을 모두 경험한 드레이크는 아예 태평양 항로를 노리기로 했다. 157712, 드레이크는 여왕을 설득해 스페인 수송항로를 공격하기로 했다.

4척의 배에 170명을 싣고 전례없이 과감한 해적질을 시도했다. 자신에게 항명하는 함장 한 명을 처형하는 고난 끝에 마젤란 해협을 빠져나왔지만 태평양 폭풍을 만났고 펠리칸Pelican(나중의 유명한 골든 하인드Golden Hind)80명만 살아남았다.

남미 해안에 상륙해 먹을 것을 구하다가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여러 명이 죽었고 드레이크는 얼굴에 화살을 맞기도 했다. 선원들 사이에는 선상반란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157812, 드레이크는 무방비상태인 (지금의 칠레) 발파라이소Valparaiso항을 점령하고 짐을 잔뜩 실은 라 카피타노La Capitano를 노획해 그동안의 손실을 모두 만회해 선원의 불만을 모두 잠재웠다.

15791~4, 드레이크는 무방비로 열린 스페인의 남미식민지를 약탈하고 다녔다. 이 지역은 단 한 번도 해적의 공격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서인도제도와는 다르게 무장병력이 제대로 없었다.

드레이크는 엘 드라케El Draque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불을 뿜고 칼을 휘두르며 구교도를 죽이는 용이라는 뜻이었다.


 

31, 드레이크는 누에스트라 세뇨라 델라 콘셉시온Nuestra Senora de la Concepcion호(사진 참조)와 마주쳤다. 갑판 앞까지 금은과 보석을 가득 실은 이 갈레온Galleon은 드레이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보물창고였다.

스페인 상선으로 위장한 펠리칸은 조용히 다가가 일제포격을 퍼부어 주돛대를 부러트린 후에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수송선에 올라 장악했다.

이 약탈은 현재까지도 영국이 노획한 배중 가장 금액이 큰 것으로 남아있다.



90문의 포로 무장해서 드레이크의 펠리칸 정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을텐데 아마도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보물을 더 많이 싣느라 전투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드레이크는 북쪽의 조용한 지역으로 올라가 지금의 캘리포니아에서 펠리칸을 수리한 후에 스페인 함대를 피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580926, 드레이크와 57명의 선원은 플리머스에 도착해 세계일주는 스페인만 할 수 있다는 자랑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항구에 2,500만 파운드 가치의 약탈품을 내려놓았다.

몇 주 후, 여왕은 그에게 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해적으로 출발한 드레이크는 영국의 제독이 되었다. 해적이 아닌 지휘관으로 1587년에는 카디스Cadiz를 기습해 전사에 남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했고 1589년에는 리스본Lisbon에서 참패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페인의 영국원정을 막는 절대절명의 순간에도 해적질을 참지 못해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스페인을 상대할 수 있는 예산을 마련해주었고 펠리페 2세는 식민지에 병력을 배치하고 태평양 항로까지 경비하느라 이중의 출혈을 겪었다.

 

영국의 고귀한 귀족사회는 그를 절대로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평민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이었고 스페인과의 전쟁에 힘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바르바로사와 함께 악랄한 해적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이무이한 인물이었다



1595년 산 후안San Juan(지금의 푸에르토 리코)에서 스페인함대에게 참패를 당한 후에 존 호킨스도 질병으로 죽고 드레이크도 질병으로 죽은 후에 파나마에 수장되었습니다. 그의 관은 지금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