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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영국

바이킹 (1부) - 영국역사를 바꾼,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바이킹전투

by uesgi2003 2021. 7. 4.

바이킹스 시즌 6 파트 2가 넷플릭스에 조용히 올라왔기에 재미있게 봤는데 마무리가 뭔가가 이상하더군요.

뼈없는 아이바Ivar the boneless의 죽음도 알던 것과 다르기에 2차대전 해전사는 잠시 미뤄두고 바이킹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고 제가 바이킹에 대해 지식도 부족해서 BBC 역사자료를 인용하기 때문에 영국의 시각과 자료입니다. 어차피 바이킹 시즌 6 마무리는 영국이야기였으니까 상관없죠. 

바이킹 역사가 영웅담, 심지어 신화수준이 많기 때문에 자료마다 크게 다를 수 있으니까 재미로만 즐기시기 바랍니다.

지명은 영국으로 통일하겠습니다. 

 

영국역사를 바꾼,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바이킹전투 

이스트 앵글리아East Anglia(영국동부, 동앵글족 영토)에서 학살당한 앵글로-색슨족부터 페나인산맥Pennines 매복전투에서 죽은 노르드Norse왕에 이르기까지, 바이킹시대는 대규모 학살의 연속이었다. 
토마스 윌리암스Thomas Williams가 영국의 운명을 결정지었지만 알려지지 않은 5가지 전투를 설명한다. 

영국역사에서 바이킹시대는 가장 상징적인 전투의 연속이었다. 알프레드대왕Alfred the Great이 대규모 데인족 침략군의 일부에 맞서 역전승한 878년의 에딩턴Edington 전투, 알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Æthelstan이 영국을 통일한 937년의 브루난부르Brunanburh 전투, 하랄드 하르디라디Harald Hardrada의 바이킹군이 참패한 1066년의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 전투는 매우 잘 알려져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마지막전투였던 에딩턴전투입니다. 

바이킹시대는 8세기 말부터 11세기 중반까지 거의 300년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영국에서만 50건 이상의 격전이 기록으로 남았고 습격, 공성과 해전은 훨씬 많다. 그렇지만 주요 전투를 제외하고 다른 전투는 외부에 알려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알려지지 않은 전투 중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초기왕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가 있다. 그 중에 기념도 기억도 하지 않지만 영국의 역사를 만든 5가지 전투를 설명한다. 

1 헨기스트 힐 전투(838년) : 콘월Cornish군의 참패
콘월-바이킹 연합 VS 웨섹스Wessex 에그버트Egbert왕
웨섹스군 승리

 

에그버트왕은 그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825년, 그는 엘렌던Ellendun이라는 곳에서 머시아Mercia군을 격파하고 영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다. “엘렌던의 개울을 흐르던 핏물이 시체에 막히고 악취가 가득했다”는 시가 남아 있다.
에그버트는 다른 왕국정복에 박차를 가했다. 815년, 그는 콘월(지도 붉은 원)을 관통해 진격했고 콘월왕국은 에섹스의 명령을 따랐다. 그렇지만 838년, 콘월은 웨섹스의 지배에 저항할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강력한 지원군 바이킹이 있었다. 

 

에그버트는 카롤루스왕조Carolingian Dynasty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확장해갔지만 카롤루스제국의 내부 분열로 프랑크군대가 철수했고 836년(또는 833년) 카햄튼Carhamton전투에서 에그버트가 데인족에게 패배하면서 콘월이 독립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838년 거대한 선단이 콘월에 도착했고 콘월 원주민과 연합해 에그버트왕에게 도전했다. 에그버트는 콘월로 진격해 헨기스트 힐에 병력을 배치했다. 아마 키트 힐Kit Hill로 보인다. 키트 힐은 힌기스던Hingisdon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타마르Tamar 계곡을 내려다보는 전략요충지다.

실제 전투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바이킹과 콘월이 전투를 벌였다는 것이 전부이고 콘월의 마지막 독립시도였을 것이다. 영국 남서반도 원주민은 다시는 앵글로-색슨왕국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바이킹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790년대 이후, 바이킹함대는 갑자기 몰려와 수도원과 해안마을을 약탈하고 노예와 보물을 챙겼다. 830년대가 되자, 아예 내륙으로 진출해 소머셋Somerset 카햄튼Carhampton을 약탈하고 앵글로-색슨군을 격파했다. 바이킹이 영국 원주민과 연합한 것은 콘월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콘월은 실패했고 바이킹은 이후에도 연합을 계속 시도했다. 

 

 

참고로 영국의 이민족 정착역사입니다.

 

로마, 바이킹과 노르만족이 영국을 침공했지만 놀랍게도 유전변화는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전체에 정착했다. 

 

1. 빙하기 이후 첫번째 이민족 정착이 시작되었다. 독일과 벨기에에서는 다리를 놓아, 프랑스에서는 배를 타고 도착했다. 

2. 450년, 앵글로-색슨족이 덴마크와 독일 북서부에서 도착하기 시작했다. 

3. 800~950년, 바이킹이 스코틀랜드 북서부 오크니, 아일랜드와 웨일스에 도착했다. 



2 키뉘트Cynwit전투(878년) : 까마귀깃발Ravens과 방벽
오다Odda와 데번Devon군 VS 바이킹 
웨섹스 승리

878년, 에그버트의 손자인 알프레드왕의 상황은 말그대로 암울했다. 군벌 구스룸Guthrum의 바이킹이 웨섹스로 밀려들어 치펀햄Chippenham을 점령했고 알프레드는 도망쳐야했다. 

 

라스트 킹덤의 구스룸입니다. 

왕은 몇 개월동안 습지와 황무지로 피신하다가 소머셋 아텔니Athelney섬에 거점을 마련하고 바이킹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렇지만 우베Ubbe(우바Ubba)가 이끄는 바이킹이 다시 영국 남서쪽에 도착했고 웨섹스왕조의 운명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데번의 왕실귀족Ealdorman 오다가 우베를 가로 막았다. 키뉘트로 알려진 남서쪽 언덕방벽(위치는 불분명)에서 대역전극이 벌어졌다. 알프레드의 기록관 셔본Sherborne주교 애서Asser의 기록에 따르면, 웨섹스군이 바이킹군에 밀려서 방벽으로 퇴각했는데 물도 없이 갇혔다고 한다. 웨섹스군은 굶주려 죽어가기 보다는 명예롭게 죽겠다고 결정했고, 새벽에 언덕을 달려 내려가 바이킹을 공격해 몰아냈다. 우베를 포함해 약 1,200명의 바이킹이 죽었다. 

 

 

라스트킹덤에서의 오다입니다. 


신화적인 인물 라그나르Ragnar의 세 딸이 까마귀깃발을 만들었고 무당이 전투 전에 깃발이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면 승리를 거둔다고 예언했었는데 그 깃발을 웨섹스군에게 빼앗겨 바이킹이 크게 동요했다. 

 

바이킹의 신 오딘Odin에게 전세계의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이어서 바이킹에게는 큰 의미였습니다. 

알프레드는 월트셔Wiltshire 에딩턴Edington에 있는 구스럼군도 격파하고 영국전체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웨섹스군이 키뉘트에서 패전했다면, 알프레드는 우베와 구스럼 사이에서 고립되어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구스룸은 패배 후에 항복하고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바이킹스의 뼈없는 아이바(이바르)와 우바가 영국을 약탈하는 그림입니다. 

바이킹스에서는 아이바가 키뉘트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하고 우바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을 만나는 것으로 끝납니다만, 아이바는 몇년 전에 병으로 이미 죽었다는 기록도 있고 키뉘트전투는 우바가 지휘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 그림만 해도 무려 600년 후에 그려졌고 역사나 전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바이킹의 선박과 무장이 당시 중세기사 모습이고 고증에 어떠한 도움도 안됩니다.  

 

이 그림은 너무 나갔죠. 바이킹의 주인공 나그나르 로드브로크, 아이바와 우바입니다. 

무슬림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3 홀름Holme전투 (902년) : 습지에서 최후를 맞이한 애설월드Æthelwold 
에드워드Edward왕 VS 조카와 바이킹 
바이킹의 전략적 승리

899년에 알프레드가 사망한 후에도 앵글로-색슨과 바이킹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알프레드의 아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위기가 닥쳤다. 알프레드의 조카 애설월드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고 바이킹영지(데인로Danelaw라고 부르는 북쪽과 동쪽 지역)으로 달아났다. 그는 이교도의 왕 또는 데인족 왕으로 환영받았다.

 

아하! 라스트 바이킹에서 이 사람이었군요. 라스트 바이킹을 다시 보면 훨씬 재미있겠습니다.

 

그 당시의 영국지도입니다. 


902년 여름, 애설월드는 이스트 앵글리아East Anglia를 떠나 원정을 시작하며 영국남부를 습격했고 웨섹스 크릭레이드Cricklade와 브레이든Braydon까지 진출했다. 에드워드는 곧바로 병력을 모아 사촌을 추격했고 애설스탠은 다시 이스트 앵글리아로 퇴각했다. 

홀름에서 벌어진 전투는 참전한 모두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에드워드는 험지전투를 피하고 퇴각하려고 했지만 켄트Kent별동대가 명령을 거부했다. 에드워드는 7번에 걸쳐 전령을 보내 명령을 내렸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명령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기록은 “방패로 충돌하고, 칼과 창을 크게 휘둘렀다”는 것이 전부다. 그렇지만 발이 빠지는 습지대에서의 전투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는 악몽이었을 것이다. 켄트군이 방패와 무기를 던지고 대열을 무너트리며 달아났지만 습지에 빠져 진흙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렇게 켄트 왕실귀족 시게울프Sigewulf와 시게헬름Sigehelm 그리고 켄트귀족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에드워드왕은 나름 이득이 있었다. 애설월드가 죽었다. 애설월드는 승패와 상관없이 죽었기 때문에 에드워드의 적법성에 시비를 걸 장애물도 사라졌다. 에드워드는 이후 수십 년 동안 공세를 이어가며 영국남부의 바이킹영지를 모두 정복했다. 

 

인물을 정리하다 보니 바이킹스보다는 라스트 킹덤을 더 보고 싶어지는군요.

라스트 킹덤에서 장자The Elder왕 에드워드입니다. 

 



4 스테인모어Stainmore전투 (954년) : 블러드엑스Bloodaxe(블로됙스)의 최후일전 
에릭 블러드액스와 웨섹스 이드리드Eadred왕
노섬브리아 합병 

전투라고 부를 수 없는 규모였지만, 노섬브리아왕국은 스테인모어전투를 끝으로 합병당했다. 

노섬브리아는 866년, 요크York함락과 함께 바이킹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90년 동안, 스칸디나비아문화가 영국 북부의 삶에 깊게 자리 잡았고 언어, 의복, 신앙과 정체성을 바꿔 놓았다. 노섬브리아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자긍심 높은 원주민이었고 웨섹스의 강압보다는 외국 바이킹을 차라리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10세기 중반, 노르웨이의 전왕 에릭 블러드액스가 노섬브리아 왕좌를 차지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에릭왕은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형제를 거의 다 죽이고 노르웨이왕이 되었고 그런 별명을 얻었다. 잔인하고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영국왕실에서 자란 형제에게 축출당했다. 에릭은 영국으로 달아났고 그 과정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노섬브리아가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는 노섬브리아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능했고 캐슬포드Castleford에서 웨섹스군을 학살해 이드리드왕의 분노를 사, 948년에 축출당했다. 

 

에릭 블러드액스는 바이킹스에서 많이 난감한 캐릭터인 하랄드 1세 하르파그리Fairhair의 아들 중 한 명입니다. 하랄드 1세에 대해서도 실제 위치에 대해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하랄드도 바이킹스와 달리 장수를 누리고 죽었다는군요. 

이드리드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리자 952년, 노섬브리아가 다시 그를 불러들였지만 954년에 다시 축출되었다. 그는 페나인산맥을 넘어 스테인모어를 점령한 후에 아일랜드해로 출발했다가 마커스Maccus백작에게 죽었다. 

스탄디나비아의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릭은 중과부족의 병력으로 적에게 맞섰고 바이킹군벌에게 어울리는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아내가 의뢰해 만든 시에서는 발할라Valhalla에서 발키리Valkyries의 환영을 받고 오딘Odin의 옆자리에서 축배를 드는 장면이 있다. 독립 노섬브리아의 마지막 왕을 위한 묘비명으로 제격이었다. 

 

즐기는 역사게임에 이 사람이 에릭 블러드액스였군요. 역시 공부해야 합니다. 



5 데인즈 우드Dane’s Wood전투 (1016년) : 숲속의 학살
크누트 스베인손Cnut Sveinsson VS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Edmund Ironside
크누트와 에드문드의 평화협상 

1016년은 피투성이의 해였다. 앵글로-색슨왕 에드먼드가 선왕인 에셀레드 2세Æthelred the Unready의 뒤를 이어 덴마크왕자 크누트 스베인손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두 사람은 한 해에만 7번 이상 격돌했는데 마지막 전투인 데인즈 우드전투는 기록되지 않았다. 

 

팜랜드사가로 변해버린 빈란드사가의 크누트입니다.

크누트의 아버지 스베인 포크비어드Svein Forkbeard는 1013~14년 겨울동안만 영국왕위에 올랐다. 스베인은 갑자기 사망(살해로 추정)했는데 869년에 바이킹에게 순교한 이스트 앵글리아왕 성 에드먼드St Edmund의 유령 때문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영국왕위는 웨섹스왕조에게 넘어갔다. 그렇지만 크누트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016년, 크누트와 에드먼드는, 소머셋 펜셀우드Penselwood, 윌트셔 셔스톤Wiltshire Sherston, 런던, 미들섹스 브렌트퍼드Middlesex Brentford, 켄트 오트포드Otford에서 격전을 치뤘고 무승부인 셔스톤만 제외하고 에드먼드가 승리를 거뒀다. 크누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크누트는 다시 한 번 아산둔Assandun(에섹스 아싱던으로 추정)에 병력을 모았고 웨섹스귀족 에드릭 스레레오나Eadric Streona의 배신(개전과 동시에 도주)으로 압승을 거뒀다. 영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드노스EadnothIt주교가 전사하고 왕실귀족 누구 누구.... 영국귀족 전부가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꼭 돈내기 전 그리고 싸우기 전에 신발 묶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산둔전투는 양측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고 크누트는 왕위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에드먼드는 아직 죽지 않았고 데인즈 우드전투를 더 치른 후에야 무기를 내려놓고 협상을 하게 된다(그림 참조). 아산둔전투는 바이킹 음유시인 오타르 더 블랙Ottar the Black이 만든 크누트사가의 한 구절로만 남아있다. “왕자여, 강력한 Danaskógar 북쪽에서 검으로 명예를 얻었구려. 전사들은 마구 죽였을 것이오.” 

 


Danaskógar는 덴마크인 숲을 의미하며 영국에는 이런 이름의 숲이 없었다. 에드먼드는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방향으로 퇴각했고 딘숲Forest of Dean에서 휴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에드먼드군을 추격해 딘숲에 들어온 크누트군은 딘이라는 말을 들었고 덴마크 고어로 잘못 옮겨서 데나Dena(덴마크인)가 되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평화협상을 맺었고 에드먼드는 몇 개월 후에 죽고 크누트가 영국왕이 되었다. 

 

바이킹스 시즌 6를 다시 보려고 정리를 시작했는데... 정작 라스트 킹덤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