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세/프랑스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1) - 크레시 전투

by uesgi2003 2012. 1. 23.

제가 가지고 있는 역사/전사 책이 얼마나 되는지, 어떤 책이 있었는지 가끔씩 잊고 지내는데, 이번에 책을 뒤져보니 공성전에 대한 책만 3권이었고 영국 장궁병에 대한 자료집도 한 권이 있었군요. 덕분에 스캔할 분량이 늘어났습니다. ㅡ.ㅡ

 

예고해드린 것과 같이, 동부전선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다른 시대, 다른 역사를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잠깐 타임머신을 타도록 하겠습니다. 5~6회에 걸쳐서 중세시대에서는 성을 어떻게 공략하고 어떻게 막아냈는지에 대해 설명할텐데, 배경이 되는 무대는 잔다르크로 유명한 백년전쟁입니다. 


제가 중학교 역사 시간에 백년전쟁에 대해 처음 배웠을 때에는 '무슨 전쟁을 100년씩이나 했나?'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었는데, 영국과 프랑스가 정말로 100년 동안 전쟁을 벌였던 역사입니다. 물론 그 기간 내내 싸운 것은 아니고 결정적인 전투는 영국이 대승을 했던 3번, 그리고 프랑스가 마침내 영국을 밀어냈던 1번이 고작입니다. 


 

 

그림 설명: 공성전의 무대가 될 성입니다. 실제있는 성을 배경으로 성을 어떻게 공격하고 어떻게 방어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공성전 이야기를 정리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백년전쟁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백년전쟁 기간 동안의 주요 사건일지 그리고 영국이 첫 번째 대승을 거둔 크레시 전투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국이 대승을 거둔 3번의 전투는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정말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백년전쟁의 사건

 

1328 샤를(Charles) 4세 사망. 카피션(Capetian) 왕조의 장손가문 종식. 발루아(Valois)의 필립(Philip)이 필립 4세로 왕좌계승

1329 영국의 에드워드(Edward) 3세 아끼뗀(Aquitaine - Guyenne)에 대해 경의를 표시했으나 신하로서의 경의는 거부

* 아끼뗀은 남프랑스의 일부로 1137 프랑스와의 혼인으로 잠시 프랑스영토가 되었다가 1154 영국과 혼인하면서 영국 영토가 되었다.

1453 100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 영토로 남아 있게 된다. 아끼뗀은 영국의 왕과 황태자에게 강력한 후원자이자 외가인 셈이다.

1336 에드워드, 영국 제품의 프랑드르(Flanders)로의 수출을 금지

1337 필립, 에드워드의 영지를 프랑스 령으로 선포하고 아끼뗀 외곽을 약탈

1338 에드워드, 자신을 프랑스 왕으로 선포

1346 크레시(Crecy) 전투

1356 프아티에(Poitier) 전투

1358 농민반란

1360 브레타뉴(Bretigny) 평화조약

1369 프랑스에서 전쟁재발

1381 영국에서의 농민반란

1392 프랑스의 샤를 6 정신병 발병. 아르마냐크(Armagnacs) 부르고뉴악(Brugundian) 사이에 분쟁발생.

* 샤를 6세가 정신병을 앓으면서 프랑스에서는 내전(남북전쟁) 일어났고 프랑스의 영토는 내전과 영국의 약탈로 황폐화되었다.

1399 랭카스터(Lancaster) 헨리(Henry), 영국 왕좌에 헨리 4세로 오름

1415 헨리 5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대승

1420 트루아(Troyes) 조약으로, 랭카스터 가문이 프랑스 왕좌의 계승자로 선포. 발루아의 샤를은 거부

1429 쟌다르크(Joan de Arc), 오를레앙(Orleans) 구원

1431 쟌다르크, 루앙에서 처형당함

1435 아라스(Arras) 평화조약, 부르고뉴 영국지원을 포기

1436 샤를 7 파리 장악

1450 프랑스, 포르미니(Formigny) 전투에서 승리. 영국에서 노르망디를 탈환

1453 프랑스, 보르도(Bordeaux) 탈환. 백년전쟁 종전

 

크레시 전투 (1346)

 

 

백년 전쟁의 첫 번째 무대는 1340년 슬루이스(Sluys) 해전이었다. 강력한 해군을 갖춘 영국의 150척 함대는 9시간 만에 190척의 프랑스 함선을 전멸시켰다. (http://cafe.daum.net/GermanY/G8S1/11?docid=198RjG8S11120081102173536)

 

그림 설명: 백년전쟁의 주요 전장터입니다. 프랑스는 중세봉건 국가였기 때문에 독립영토와 영국령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백년전쟁에서 보여준 프랑스 왕과 귀족의 오만하고 무능한 전략/전술로 통일국가로서의 프랑스는 상당히 늦게 태어납니다.

 

에드워드 3세는 같은 해에 프랑스령의 프랑드르에 육군을 상륙시켜 뚜르네(Tournai)를 포위하지만 공략하기 어려워 필립왕과 휴전을 한다. 프랑스군이 야전이나 해전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알게 된 영국은 백년전쟁 내내 이 전술을 계속 사용한다. 휴전 후 6년 동안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다가 1346 8 26일 크레시 전투가 벌어진다.

에드워드는 기사, 중무장 기병(또는 중무장 보병 Man-At-Arms), 아일랜드 보병, 궁수로 구성된 25,000명을 이끌고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여기에는 장남이자 훗날 흑태자(Black Price)로 알려진 웨일즈왕자 에드워드도 참여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내륙으로 들어가 캉(Caen)을 점령하고 외곽을 약탈했다. 필립 6세는 60,000명의 병력을 모아 영국군에 대항한다. 대회전을 각오한 에드워드는 크레시 마을 부근을 전장터로 고르고 병력을 남동쪽으로 흐르는 낮은 구릉지대를 따라 배치시켰다. 자신은 전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언덕 위의 방아간에 진지를 차렸다.

 

영국군 병력은 이전의 전투와 원정에서 거의 50%를 잃어 13,000명으로 줄어들었고 그 중의 절반은 궁수였다. 병력을 3개의 전투대로 나누어 우익은 워릭(Warwick)과 옥스포드의 공작에게 맡기고 좌익은 아룬델과 노샘프턴(Nothampton) 공작에게 맡겼다. 세 번째 전투대는 약간 후방에 배치하고 자신이 직전 지휘했다. 말과 짐마차는 후방 깊숙이 숨겼다.

 

각 전투대의 핵심은 중무장한 보병들이었고 궁수와 몇 문의 대포(극초기형 야포)가 지원하고 있었다. 대열 앞에는 수 백 개의 작은 구멍을 파서 프랑스 기마대의 돌격을 막으려고 했다.

 

그림 설명: 크레시 전투를 그린 옛그림입니다. 전투의 각 단계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하려다 보니 양군이 매우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래도 프랑스의 석궁병과 영국의 장궁병의 대결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의 정교한 작전준비에 비해, 필립의 군대는 전략전술에 거의 신경쓰지 않은 채로 전투에 돌입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 승리를 확신한 프랑스군은 영국군에게 바로 돌격해 들어갔다. 필립의 병력은 12,000명의 중기병, 17,000명의 경기병, 6,000명의 제노바 석궁용병 그리고 25,000명의 농노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전투는 숫자 싸움이었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자만 할만도 했고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프랑스군의 승리가 확실해 보였다.

 

(우에스기 왈: 일단 원서의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만, 영국과 프랑스의 기병 숫자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프랑스의 기병 29,000명이라면 거의 몽골수준에 가깝고 유럽전체에서도 대적불가 수준입니다. 보통 기사 한 명에게 6명 정도의 보조인력이 붙었고 기병대에 상당한 보병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순수기병은 20%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25,000명의 농노징집병은 말그대로 영주의 영지에 사는 농노들을 무차별적으로 징집한 병력이기 때문에 갑옷은 아예 없고, 무기도 농기구가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갈 때에는 농노징집병도 상당한 전력이 되지만 불리할 때에는 없느니만도 못한, 전장에서는 순진무구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전투에서 이겨도 모든 전리품은 귀족과 기사들 차지이고, 살아서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인 농노들에게 전투력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필립은 전장에 도착하자 병력배치를 위해 멈췄지만 조급했던 전열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후위도 따라 나서면서 대혼란이 벌어졌다. 승리를 확신한 영주와 기사는 전투 후의 전리품에 이성을 잃었고 지휘관이나 왕의 명령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마침 폭풍우까지 몰아쳐서 프랑스군의 대열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해가 다시 떴을 때에는 영국군의 등 뒤에서 프랑스군의 눈을 향해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필립은 제노바 석궁병에게 전투를 시작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들은 전투할 채비를 갖추지 못했다. 오랜 행군으로 지친데다가 폭우로 활시위가 물에 젖어 느슨해졌던 것이다. 필립의 형제에게서 모욕을 당한 제노바 용병들이 마지못해 전투에 나섰고 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에스기 왈: 간단하게 정리한다고 해놓고서는 설명이 길어지는군요. 석궁은 위력이 대단했지만 장궁에 비해 발사속도와 비거리가 매우 불리한 무기였습니다. 위의 그림과 달리 양쪽 진영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석궁부대는 장궁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고 지휘체계의 실수로 장궁의 공격에서 몸을 가릴 대형방패대신에 소형방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사속도, 사거리 두 요소만 간단하게 계산해도 석궁병이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투였습니다.)

 

제노바인들이 영국군에게 겁을 주려고 큰 함성을 질렸지만 그들은 침착하게 대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제보바인들이 두 번째 함성을 지르고 앞으로 약간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세 번째 함성을 지르고 석궁에 화살을 먹이고 발사했지만 물에 젖은 시위때문에 제대로 날아가지 않았다. 영국군 궁수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마치 눈발이 날리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화살을 쏘았다.

팔다리에 화살을 맞은 제노바인들은 석궁을 내려뜨리고 도망쳤다.

 

이 모습에 화가 난 필립은 기사들에게 "저 놈들이 우리 앞길에 서있으면 그냥 죽여버려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무장한 기사들이 달려들어 재수없이 길목에 들어선 수 백 명의 제노바 용병을 죽였다. 프랑스 기병대는 궁수와 석궁병을 포함한 보병도 함께 편성되어 있었지만 기사는 그들을 혐오하고 전장에서는 기사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석궁병을 공격하라고 명령이 떨어진 다음부터는 기사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영국군을 향해 돌격했고 영국 궁수들은 계속 화살세례를 퍼부어 기사를 떨어뜨리고 말을 쓰러뜨렸다. 더 많은 프랑스 기사가 돌격해 들어갔지만 화살세례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기사가 땅에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에 웰시와 아일랜드 보병이 단검을 들고 그들을 처리했다.

 

보헤미아의 존왕의 일화는 당시 프랑스군에 만연했던 어처구니없는 기사도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늙고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부하에게 거의 사정을 했다. "제발 부탁이네. 나를 전장 한복판으로 데려가주게. 오래된 칼이지만 한 놈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부탁을 받은 두 기사는 왕의 말고삐를 잡고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 영국군의 또 다른 희생물이 되었다.

일부 기사는 화살세례를 벗어나 영국군 우익까지 다가가 공격했다. 웨일즈 왕자는 에드워드에게 전령을 보내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자신이 알아서 싸우라고 해라. 신의 뜻대로 우리가 이긴다면 모든 영광과 명예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라며 거절했다.

 

11시간 동안 16번의 돌격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전장에서 물러났다. 에드워드는 추격하지 못하게 하고 날이 밝을 때까지 제자리를 지키게 했다. 승리의 주역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영국 장궁병들이었고 참패의 소식은 프랑스 국민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최고로 여겼던 기사들이 평민 궁병에게 전멸을 당하다니! 기사가 일반 보병에게 학살을 당하다니! 군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이었다.

프랑스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1,500명 이상의 영주와 기사 그리고 약 30,000명의 병사가 전장에 버려졌다. 영국군의 피해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2명의 기사를 포함한 200명이 전사한 것이 고작이었다. 크레시 전투는 기병대가 전장을 좌우하는 결정타라는 기존의 상식을 완전히 뒤바꿨다. 보병과 궁수가 제대로 배치되고 지휘된다면 중기병을 이길 수 있게 되었고 1346 8 26일부터 기사는 천천히 그 효용가치를 잃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크레시에서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귀족들은 영국 기사와 중장기병에게 참패를 당했다고 애써 믿었고 심지어 영국군은 말에서 내린 기사가 보병들 사이에서 숨어서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프랑스군이 패배할 이유가 없다고 결론내렸다.

1347년부터 1354년까지, 유럽전체 인구의 33%를 죽인 흑사병으로 황폐해진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조약을 준수했다.

 

(우에스기 왈: 프랑스 귀족은 평민들에게 당한 패배를 애써 외면했기 때문에 이후 두 번의 전투에서도 참담한 패배를 당합니다. 영국 장궁병에 대한 자료는 독립된 이야기로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