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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프랑스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 (2) - 푸아티에와 아쟁쿠르 전투

by uesgi2003 2012. 1. 24.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2) – 푸아티에 전투 (1356)

1355년 흑태자 에드워드가 수백 개의 남프랑스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된다. 그 다음 해에도 중부까지 깊숙이 들어가 약탈을 하던 그는 9 17일에 푸아티에 근처에서 존 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만나게 된다.

에드워드는 병력을 언덕 위에 배치했는데 양 옆은 포도밭 담과 도랑으로 가려져 있어서 프랑스군은 잡목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따라 접근해야 하는, 방어하기 아주 좋은 지형이었다. 그는 기사와 중장기병을 3개 전투대로 나누어 길에 배치하고 궁수를 밀집형태로 만들어 크레시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측면 지원을 하게 했다.

 

그림 설명: 국사 교과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문구가 '그래서 농민은 더욱 빈곤해졌다'라고 하는데, 중세 유럽의 농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통일국가 또는 국민의 개념이 없던 봉건주의, 패권주의의 시대라 농노는 단순한 경제기초였을 뿐입니다.

이 당시 기본적인 전략전술은 적의 생산시설(밭과 과수원)을 약탈하거나 농노를 죽여서 기초부터 흔들어놓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림에서와 같이 약탈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나마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었고 주요 강대국의 통로였던 독일 지방은 말도 못할 참담한 상황이 오랜 기간 계속됩니다.

심지어는 자국 군대에게 약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공성전 이야기와 함께 다시 설명될 것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니까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영국군의 8,000명의 기병, 3,000명의 궁병, 그리고 1,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12,000명의 병력을 배치시켰다. 당시의 영국으로는 기병의 비율이 너무 높은데, 이것은 프랑스 전역의 약탈이 주목적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랑스군은 16,000명의 기병, 2,000명의 석궁병을 포함한 총 3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3배의 병력을 동원한 프랑스는 승리를 자신하며 전장으로 향했다. 식량이 완전히 바닥난 영국군은 며칠째 음식을 먹지 못한 병사가 있을 정도여서 프랑스군이 길목만 막고 있어도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가치관으로서는 이런 승리는 명예와 거리가 멀었다.

궁지에 몰린 에드워드는 존에게 약탈품과 포로 일체를 넘겨주고 7년 동안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휴전을 제의했지만 존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영국군이 크레시에서 말에서 내린 기사가 보병과 함께 싸워 이겼다고 믿은 존은 대부분의 기병에게 말에서 내리고 2m의 기마창을 60cm 정도의 보병창으로 바꾸게 했다. 기병대와 보병을 3개 전투대로 나누었고 기병 전투대는 앞에 서게 했다. 그는 전술이나 기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병력을 계속 밀어넣었다. 말에서 내린 기사는 밀집대형의 보병에게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300명이 프랑스 기병이 돌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된다. 잡목 뒤에 서있던 궁수는 달려오는 기사를 근거리의 정확한 사격으로 모두 쓰러뜨렸다. 영국 궁수의 공포스러운 위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계속 전진해서 영국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다녔던 프랑스 기병은 결국 영국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지만 영국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줬다.

도팽(Dauphin)의 부대가 와해되는 모습을 지켜본 오를레랑(Orlean) 공작의 부대는 영국 궁수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앞의 두 부대의 실패에도 겁을 내지 않은 존 왕은 12,000명의 본대를

이끌고 마지막 공격에 나섰다.

 

에드워드는 영국군이 프랑스군의 단호한 공격을 더 이상 막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400명의 기병과 궁수를 프랑스군의 배후로 돌려 뒤에서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본대를 이끌고 달려나가 “신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 돌격!”을 외치며 얼마나 세게 프랑스군과 부딪혔던지 그 소음이 10km 떨어진 푸아티에까지 들렸을 정도라고 한다. 배후로 돈 영국군이 등 뒤에서 공격을 하자 프랑스군의 대열이 무너지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측근과 함께 전투를 벌이던 존왕은 이름에 걸맞는 귀족이 항복을 권하자 아들과 함께 항복했다.

 

그림 설명: 위는 존왕이 직접 영국군과 전투를 벌이는 그림이고, 옆은 존왕이 포로가 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클릭해서 큰 그림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군은 또 한 번 참패를 당했다. 영국군의 피해가 2,000명인 것에 비해 프랑스군은 거의 25,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존은 1360년 평화협정에서 3백만 황금 크라운을 지불하고서야 포로신세에서 풀려났다. 푸아티에에서 달아난 프랑스군은 도적떼로 변해 약탈을 하며 고향으로 향했고 포로가 된 귀족은 가혹한 세금으로 몸값을 마련하는 바람에 프랑스 전역은 농민의 반란으로 엉망이 되었다.

 

 

 (우에스기 왈: 전투기록을 보면 몇 만 명이 죽거나 다치는 것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은데, 완전히 사지에 몰려서 포위된 경우 그리고 포로가 된 후에 학살을 당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그 정도의 사상자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승자의 역사라, 승자가 부풀린 전과를 그대로 인용해서 엄청난 인명손실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푸아티에 전투와 같이 퇴로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는 경우에는 패전과 함께 달아나 흩어진 숫자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프랑스는 태양왕 루이14세나 나폴레옹의 시대를 빼고는 지독히도 싸움을 못하는 국가였던 모양입니다. )

 

브레타뉴 평화협정과 함께, 영국왕은 프랑스 왕좌와 노르망디 공작직위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끼뗀의 공작령은 계속 유지했고 칼레(Calais)를 합병했다.

 

아쟁쿠르 전투 (1415)

 

푸아티에 전투 후, 50년 동안 내부문제로 영국은 프랑스 영토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헨리 5세가 왕위에 오른 1413년부터 양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하더니 1415 8월에 12,000명의 병력을 데리고 프랑스에 상륙한다.

헨리는 아르플레르(Harfleur)를 공략하는데 성공했지만 많은 수의 기사와 중장보병이 죽거나 병에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원거리 공격을 하는 궁수만이 온전한 상태여서 영국군의 규모는 6,000명으로 줄어들었고 궁수가 5,000명이었다. 헨리는 칼레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본국에서의 지원군을 기다리기로 했다. 헨리의 계획을 눈치챈 프랑스군은 칼레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기로 한다. 아쟁쿠르 성 부근에서 지치고 병든 영국군은 약 30,000명의 프랑스군과 만나게 된다.

 

아쟁쿠르 전투는 쉐익스피어의 연극으로도 나왔을 정도로 유명하다. 프랑스군은 이번에도 숫자만 믿고 전투를 벌였고, 전투를 피하고 싶었던 영국군은 앞의 두 전투와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업는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야전은 영국군이 장궁병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전장이었다. 영국군이 얼마나 장궁병을 선호했던지 내전이었던 장미전쟁에서는 공성전을 거의 하지 않을 정도였다. 반대로 프랑스군은 궁수를 야전보다는 성벽 뒤에 숨는 방어전에 사용했다.

두 나라는 양쪽이 숲으로 막혀있는 들판에서 2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문제는 농사를 짓기 위해 뒤엎은 들판에 일주일 동안 비가 내려서 완전히 진흙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병력이 부족한 헨리는 선왕의 전투방식대로 방어태세를 택해 중무장 보병을 3개의 전투대로 나누고 좌우에 궁수를 배치했다.

그리고 궁수들 앞에는 날카로운 말뚝을 박아 프랑스 기병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헨리는 궁수들에게 "프랑스가 너희를 잡으면 가운데 손가락을 잘라 절대로 활을 못 잡게 만든다더라"라고 말해 그들의 결의를 북돋웠다. 

 

프랑스군 지휘관 달브레(d'Albret)도 병력을 3개 전투대로 나누었지만 들판의 폭이 1km 정도였기 때문에 종대로 배치시켰다. 앞의 두 전투대는 말에서 내린 기사와 중무장 기병이었고 세 번째 전투대는 기병과 석궁병이었다. 달브레는 현명하게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투에서처럼 돌격하지 않고 영국군이 다가와 자멸하기를 기다리기로 하면서 서로 대치하면서 몇 시간이 흘렀다.

 

그림 설명: 위의 그림이 영국군 헨리5세이고 아래는 전장에 가기 전의 프랑스군 모습입니다. 일부러 찾은 것은 아닌데, 묘하게도 전투결과를 미리 볼 수 있는 분위기입니다.

 

프랑스군의 작전을 파악한 헨리는 적의 공격을 도발하기로 한다. 그는 병력을 1km 전진시킨 다음에 멈추고 궁수들 앞에 말뚝을 새로 박았다. 프랑스 기병은 적이 눈앞에 온 것을 보고, 그리고 그 숫자가 얼마 안 되는 것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결국 작전이나 규율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첫 번째 전투대가 달려나갔고, 후위의 기병대도 양쪽으로 나뉘어 달려나갔다.

물을 잔뜩 머금은 들판은 기병의 말굽에 진흙뻘로 변해 기병의 발목을 잡았고 중장갑의 첫 번째 전투대도 진흙에서 발을 빼내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다. 영국 장궁병은 빽빽하게 들어찬 프랑스군을 향해 근거리 사격을 퍼부었고, 1,200명의 기병 중 영국군 진영 앞까지 갈 수 있었던 숫자는 겨우 120명 정도였다. 그나마 말뚝에 막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진흙밭에서 벗어나기 위해 갑옷을 벗기도 했지만 오히려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다. 그리고 아직도 진흙에서 헤어나지 못한 병사들은 궁수들이 다가가 근거리 사격을 하거나 도끼로 죽였다.

프랑스군은 완전히 궤멸할 때까지 계속 공격해 들어갔다. 전투는 겨우 3시간 밖에 안 걸렸고 프랑스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헨리 5세는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었고 그를 죽이겠다고 칼에 맹세한 20명의 프랑스 기사의 공격을 받았다. 요크 공작을 죽이고 다가선 달렝꽁(d'Alencon) 공작의 철퇴에 맞아 기절을 하기도 했다. 달렝꽁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전에 근위병이 막아 간신히 살아났다.

프랑스군은 25,000명이 죽었고 1,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작전을 제대로 세웠지만 기사들의 혈기를 막지 못했던 지휘관 달브레도 전사했다. 영국군의 손실은 수 백명에서 최대 1,600명을 넘지 않았다. 아쟁쿠르 전투는 다시 한 번 중세기사의 무적전설을 과거로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서야 성을 이용한 방어전만이 살 길이라는 교훈을 얻었고, 이후의 전투는 프랑스군과의 지리한 공성전의 연속이 된다. 그리고 1453 7월에 있었던 가스티용(Castillon)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궁수의 지원을 받아 장장기병과 창병으로 진지에 틀어박힌 프랑스군을 공격한다. 프랑스군은 대포사격으로 영국군의 전진을 막고 반격에 나서 약 4,000명의 영국군을 죽였다. 겨우 100명만이 죽은 프랑스군은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0월에 보르도를 점령해 백년전쟁을 끝낸다. 그리고 영국령으로 남아 있던 채널 아일랜드와 칼레도 1558년에 합병한다.

 

그림 설명: 가스티용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 영국 귀족입니다.

 

영국군은 포병(궁수)를 이용한 기동전으로 진화했던 반면에 거듭 참패를 겪은 프랑스군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역방어전()으로 맞서면서 중세의 축성과 방어전술 그리고 공성기술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부터는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공격에 나선 영국군과 성을 방어하는 프랑스군을 역사재현 형태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