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라면을 좋아해서, 끓여먹기도 하지만 밤에 미드보면서 부숴먹는 재미때문에, 어제도 라면을 패키지 포장으로 2개를 사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안철수씨 해프닝이 있고나서 처음으로 라면값을 제대로 봤습니다. 그 이전에는 대충 마음가는 라면을 집어왔고 그 가격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죠.
제가 어제 산 라면 가격을 며칠 후에는 기억할 수 없는 것이, 마트마다 브랜드마다 시기마다 가격이 크게 차이나기 때문입니다. 어제산 5+1 삼양라면이 3100원이었는데 다음 번에 다른 마트에 가면 3600원으로 원상복귀되었을 수도 있고 '맛있는 라면'으로 지르게 되면 5개가 3000원대 후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철수씨가 라면 값을 모른다고 해서 비난이 있기에 좀 생각해봤습니다.
요즘 세계 역사상 가장 기이하면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던 러시아 건국의 영웅 표트르 대제에 대한 책을 다시 읽고 있는데, 저자가 워낙 해박하다보니 러시아의 문화와 인물뿐만 아니라 17세기 당시 유럽의 배경에 대해 저절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태양왕(Sun King)이라는 엄청난 별칭과 함께 프랑스 역사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이끌었던 루이 14세의 일화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업적이 아닌 뒷담화를 좀 해볼까 합니다.
쿠르스크전에 대해서는 이번 주 세미나가 끝나고 바로 연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다는 것말고도 그에 대해 알아봐야겠죠?
루이 14세는 1638년~1715년 그리고 4살 때부터 (비록 어머니와 재상의 섭정을 받기는 했어도) 왕에 즉위했으니까 무려 72년 동안 유럽의 최강대국 프랑스를 통치했고 유럽역사상 가장 긴 통치기간입니다.
무려 23년 동안이나 후손이 없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왕위 후계자로 결정된, 속칭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었지만 어린 시절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스트렐치Streltsy의 난을 겪으면서 친인척이 거의 모두 죽고 추방 길에 올랐듯이, 루이도 9살 때에 귀족이 왕권에 도전한 프롱드루 Fronde의 난을 겪고 파리에서 도망쳐야했습니다.
보통은 어릴 때부터 특권을 맛보거나 공포를 겪게 되면 폭군이 되거나 허수아비가 되기 마련인데 프랑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루이는 어릴 때부터 남달렀던 모양입니다.
그는 귀족의 반란으로 이리 저리 쫓겨다니면서 아버지 (리슐리에 재상Richelieu)나 어머니(마자랭Mazarin 재상) 때와 달리 자신이 직접 철권통치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당시에도 작은 키였던 163cm 정도였고 다리근육에 자신이 있어서 항상 타이트한 스타킹을 신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바로 옆의 그림처럼요.
그리고 어릴 때에 천연두를 앓아서 곰보자국이 많이 남았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나 흔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군주라면 자신만의 궁전을 짓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루이는 좀 큰 것을 짓기로 했습니다. 약간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크기라는 것이 맞는 알이죠.
무려 36,000명의 인부와 6,000마리의 말을 동원해서 지은 베르사이유 궁전입니다. 태양의 신 아폴로를 표방하던 그답게 하찮은(?) 평민의 막대한 희생(사고와 말라리아)에도 불구하고 무려 24년 동안 궁전을 지었습니다.
저는 유럽여행을 좋아하지 않아서 가보지도 못한 놈이 여러분에게 베르사이유 궁전을 설명하자니 쑥쓰럽지만... 당시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면 이랬다고 하는군요.
궁전 안에는 300m 길이의 거대한 복도, 회의실, 도서관, 황실용 개인 아파트, 여성용 거실과 개인 예배당 등이 좁은 복도, 계단, 벽장과 부엌으로 얽혀있었다. 장식을 보면 베르사이유는 로마제국 이후에 가장 사치스럽게 미술과 조각기술을 공들인 궁전이라고 할 수 있다.
궁전 어디에나 아폴로의 상징인 불타는 태양이 장식된 높은 천정과 큰 문이 있어서 거대한 궁전의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벽은 도안이 그려진 벨벳, 대리석, 양탄자로 덮였고 겨울에는 벨벳 그리고 여름에는 꽃 무늬 비단 커튼이 창문을 장식했다.
밤에는 수 천 개의 양초가 수 백 개의 유리 샹들리에와 은제 촛대 위에서 흔들렸다. 개인 아파트에는 바닥 위에 푹신한 양탄자가 깔렸고 벽에는 안드레아 델 사르토, 티션, 라파엘, 루벤스와 반 딕의 큰 그림이 걸렸다. 루이의 침실에는 모나리자가 걸렸다.
르 노트르가 설계한 정원도 궁전만큼이나 장관이었다. 수 백만 그루의 꽃, 덤불과 나무가 풀길, 테라스, 램프와 계단, 연못, 샘, 분수와 폭포수를 따라 아주 정확하게 배치되었다. 8각형 샘의 물 에서 1,500개의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는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샀다. 다양한 색상과 꽃말을 가진 꽃들 사이에는 낮게 다듬어진 울타리가 있었고 꽃은 거의 매일마다 교체되었다.
루이는 궁전의 서쪽 면에 있는 거울의 방 Galeries des Glaces의 큰 창문에 서서 그랑 카날 Grand Canal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풀, 돌, 물과 조각의 장관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큰 십자가 모양으로 건설된 물길은 1.5km 이상 뻗어나갔다. 여기에서 왕은 보트를 타고 즐겼다. 여름 밤에는 궁전의 모든 사람이 베니스 도게가 선물한 곤돌라에 올라 별 아래에서 궁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과 밤 공기를 즐겼다.
베르사이유의 그랑 카날 사진입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아랍왕족따위는 상대도 안되는 막대한 재력과 권력을 지닌 사람이니까요.
유럽대륙의 다른 군주들은, 심지어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나라까지도 루이를 모방한 궁전을 지어서 우정을 증명하거나 도전했습니다. 비엔나, 포츠담, 드레드덴, 햄톤과 상테페르스부트크에는 큰 건물이 올라가고 베르사이유의 영향을 받은 치장을 했는데 100년 후에 조성된 워싱턴의 긴 도로나 멋진 가로수길도 프랑스 건축가가 베르사이유를 차용해서 설계한 것입니다.
루이는 튤립과 오렌지를 너무 좋아했다고 하죠? 그래서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지 않는 해에는 4백만 송이의 튤립 봉우리를 수입했을 정도이고 오렌지 온실도 모자라서 자신의 방에 오렌지 화분을 놓았다고 합니다.
루이는 개인적인 사치를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었을까요? 아니면 뒷담화답게 온갖 오물로 뒤덮인 프랑스 거리를 다니기 싫어서 궁전을 옮겼다는 주장을 믿어야할까요? 베르사이유를 짓게 된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분석됩니다.
루이는 어릴 때 겪었던 파리의 참상이 평생의 트로마로 남았고 파리를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러시아의 표트르도 같은 상처로 모스크바를 혐오하고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궁전(아래 사진)을 짓고 천도까지 했었습니다. 궁전에 난입한 병사들이 자신의 눈 앞에서 친인척을 난도질한 끔찍한 기억이 남아 있는 크레믈린 궁이 좋을 리가 없었죠.
그렇지만 이런 상처 하나 때문에 나라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대공사를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귀족과 구습의 계속된 공격을 이겨내고 철권통치를 한 사람들이라면 큰 구상을 가지고 궁전을 지었을 것입니다.
루이는 정치와 세력판도를 태양계(자신이 태양왕)처럼 재편할 생각으로 베르사이유 궁전을 터무니없이 크게 짓고 귀족일가를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귀족들은 가족을 데리고 베르사이유에 입주하면서 가문의 영지는 관리가 안되어서 세력을 키울 기반이 사라지게 되었고, 정치와 사교의 핵이 궁전에 안들어가면 지방의 소귀족으로 몰락하게 되니 안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대단했던 귀족가문도 베르사이유에 들어와 루이 곁에 있을 때에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루이는 귀족들이 허례허식에 얽매여 다른 일에는 신경쓰지 못하게 만듭니다. 복잡한 의전과 오락 두 가지의 올가미를 던집니다.
베르사이유에서의 하루는 왕을 중심으로 분단위로 세밀하게 움직였습니다. 아침 8시에 침대커튼이 걷어지고 "폐하 시간이 되었습니다"라는 알림과 함께 복잡한 의전 그리고 태양계가 움직이게 됩니다. 그는 장미물과 와인 증류수로 몸을 닦은 후에 면도를 하고 옷을 입었는데 이 모든 것은 가장 운이 좋은 충복이 했습니다. 공작이 잠옷을 벗고 반바지를 입을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아첨꾼들은 왕에게 셔츠를 누가 대령할 것인지에 대해 말싸움을 했습니다. 그들은 왕에게 의자형 변기 chaise percee를 대령하는 특권을 놓고 다퉜으며 왕이 배변을 하는 동안 몰려들어 구경을 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의자입니다. 양변기의 시조입니다. 영화 광해를 보신 분은 우리나라도 왕들이 매화틀을 사용한 것이 바로 생각날겁니다.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경악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당시 문화의 결정체인 베르사이유가 그 정도였다면 유럽의 다른 궁전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300년 후의 우리 후손은 집에서 배변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미개했다'라고 웃을 겁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화장실 유무가 아니라 귀족들의 태도입니다. 씻기고 입히고 구경(?)할 수 있는 특권은 이너 서클(Inner Circle)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태양계로 진입하고 싶은 소행성(소귀족)은 그가 신부와 함께 기도하고 식사할 때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왕이 궁전, 정원, 극장, 사냥에 나서면 그 뒤를 따라다닙니다.
루이는 눈에 보이는 의전으로 귀족을 분열시키고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습니다. 왕과 가까이 앉는 사람도 엄격하게 제한했고 그나마도 치사하게 의자가지고 권력을 구분했습니다. 리클라이너급은 루이가 썼을 것이고, 등받이가 있는 의자와 없는 의자 그리고 입석으로 나누었죠. 그러다 보니 아첨꾼이 늘어가게 되는데 루이의 저녁식사가 지나가면 아첨꾼들은 모자를 벗어 바닥을 문지르며 정중하게 "폐하의 저녁이 가신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귀족을 숨도 못쉬게 조였으니 풀어주는 공간과 시간도 있어야겠죠? 베르사이유에서는 매일 저녁 음악, 춤과 행운이 오가는 도박판이 벌어졌고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연회가 열렸습니다. 가장무도회가 종종 열렸는데 궁전의 모든 사람이 로마, 페르시아, 투르크, 인도 복장을 하고 3일 동안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관계는 개방되었습니다. 거대한 궁전에는 슬그머니 들어갈 수많은 방 그리고 모습을 감출 가로수 길이나 동상 등, 사랑을 나눌 무대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왕도 이런 불륜을 막지 않고 오히려 즐겼습니다.
루이는 상당히 많은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지만 어릴 때에 결혼한 스페인공주 마리아 테레사와의 혼인관계는 지켰던 것도 재미있습니다. 밖에서 어떤 짓을 했던 지간에 아내 옆에서 잠들었고 한 달에 두 번은 성관계를 했다고 하는군요. 여왕이 고해를 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본능이 부르면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주변에 야심만만한 기혼여성이 왕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메트레상티트르 Maitresses en Titre(왕의 정부)가 유명했는데 이 분들입니다.
루이즈 드 발리에르 Louise de La Valliere
마담 드 몽테스팡 Madame de Montespan
마드모아젤 드 퐁탕쥬 Mademoiselle de Fontanges
마담 드 몽테스팡은 12년 동안 정부로 지내면서 7명의 아이를 낳았을 정도입니다. 앞에서 설명했었죠? 기혼이라고요. 남편이 몰랐을 리가 없고 남편 마르퀴즈 드 몽테스팡가 "고 마담 드 몽테스팡"이라고 불러서 왕이 유령을 만난다고 비꼬았을 뿐, 큰 반발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태양의 뜻에 저항할 수 없어서 수치를 참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역사공부를 하신 분은 의문이 생길겁니다. 역사의 반전이 일어나는 주요 원인인 복잡한 후계자 다툼은 어떻게 하려고??? 여왕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낳았고 정부와도 그렇게 많은 아이를 낳았다면???
과학, 문화와 경제가 부흥하던 르네상스 직후의 시기이지만 사람만큼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50세까지 살 수 있었지만 보통은 30~40세에 인생을 마쳤을 정도입니다. 겨우 절반의 신생아가 첫 해를 넘길 수 있었고 궁전이나 오두막이나 똑같이 유아가 죽었습니다.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사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아이 중에 황태자Dauphin만 살아남았습니다. 영국의 앤 여왕은 후계자를 필사적으로 남기려고 16번이나 출산했지만 단 한 명도 10살 넘게 살지 못했습니다. 표트르 대제와 두 번째 아내 예카테리나 사이에서는 12명의 아이를 출산했지만 앤과 엘리자베스 두 딸만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태양왕도 왕위를 물려받을 독자, 장손자과 증장손자를 14개월 만에 홍역으로 모두 잃었습니다.
실제로 17세기 내내 유럽의 인구는 계속 감소했습니다. 1648년에는 1,180만 명으로 추산되던 인구가 1713년에는 1,020만명으로 감소했는데 대륙전체를 정기적으로 휩쓴 페스트와 유행병이 원인이었죠. 1665년 런던에서는 10만 명이 죽었고 9년 전의 나폴리에서는 13만 명이 죽었습니다. 스톡홀름은 1710~1711년 사이에 1/3이 넘는 인구가 죽었고 마르세이유는 1720~1721년에 절반의 인구를 잃었습니다.
이런 정도였으니까 본능말고도 왕가를 위해서도 많은 후손을 남겨야했을 겁니다. 정말로 그런거죠? 루이 어르신???
루이를 위해 애써 쉴드를 쳤으니까 이제 한 번은 까야되겠죠? 그는 정부에 대해 무자비할 정도로 홀대를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여성의 정신과 육체에 대해 무신경했는데... 예를 들면 1673년, 전쟁에 나서면서 여왕과 정부를 동반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왕, 루이즈 드 발리에르와 마당 드 몽테스팡을 모두 한 마차에 태웠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원정텐트 안에 3개의 침실을 두었는데, 누구의 침실인지 알 수 있겠죠? 오토캠핑가서 조용히 사랑을 나누라는 주의를 주죠? 조용한 밤에 천막은 전혀 방음이 안되니까요. 태양왕에게 전쟁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임신한 여성에 대해서도 일체의 배려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만삭이었던 마당 드 몽테스팡을 데려간 것도 황당한데, 보통 때도 5~6시간 연속으로 마차 여행을 하면서 임신한 여성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고 내리 몰았다고 합니다. 임신한 여성을 놀이기구에 몇 시간 연속으로 태우는 미친 행동이었죠.
루이의 식탐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연회가 열릴 때이면 폭식을 했는데 황녀 팔라틴은 "폐하가 4종류의 수프를 따로, 꿩 2마리를 모두,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스트리 한 접시 가득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달걀을 드시는 것을 자주 봤다. 폐하와 '남자분'[루이의 동생]은 모두 삶은 달걀을 지나치게 좋아하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포크가 도입될 때였는데 손자가 포크를 사용하려고 해도 "나는 칼과 손가락 말고는 다른 걸 사용해 본 적이 없어"라며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포크를 사용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꾸지람을 주던 때라 태양왕과 귀족 포크가 하나도 없었고 손으로 마구 집어 먹었습니다.
그는 프랑스 국민의 절대 다수인 평민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폴로의 현신을 주장하던 그이니까 당연한 일일텐데... 어쨌든 그에게 평민의 고통에 대해 간언을 하는 신하가 있으면 다음부터는 근처에 못오게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당대 최고의 영웅이었고 배경도 비슷했던 루이 14세와 표트르 대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근대화를 위해 유럽의 모든 국가와 군주를 만나려고 노력했었고 심지어 차르가 직접 해외 순방에 올랐었는데도 당시 최강대국인 프랑스는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가까이는 스페인과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럽대륙을 쥐고 흔들었고 영국, 합스부르크 제국, 네덜란드 등이 견제를 했습니다. 프랑스는 그들의 등 뒤에 있던 투르크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투르크와 적대관계였던(일방적으로 당하던) 모스크바 공국(러시아)는 자연스럽게 반 프랑스 연대에 가담하면서 프랑스를 적대시했습니다. 표트르는 실제로 영국와과 네덜란드의 문화를 동경했고 루이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혹시 두 사람을 비교해보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제 개인적인 공부로는 표트르 대제의 절대적 우위입니다. 루이14세는 프랑스 국민의 희생으로 프랑스 역사의 절정기를 지냈다면,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국민의 희생으로 러시아 역사의 절정기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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