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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로스앤젤레스 전투 - 일본해군 잠수함 I-17의 기습

by uesgi2003 2016. 11. 11.


닭할매 대선에 이은 두번째 황당무계한 사건의 멘붕에서 벗어나, 2차대전 당시의 비화 하나를 정리합니다. 일본 잠수함 한 척의 기습으로 벌어진 캘리포니아 해안지역의 대공황을 LA 대공습 또는 LA 전투라고 부릅니다. 


내년에는 제발 멘붕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지금 이렇게 분노하면서 다시 기름장어를 선택하는 일은 없어야 할텐데... 뭐... 



로스앤젤레스 전투 - 일본해군 잠수함의 기습


1942223일 저녁 7, 산타 바바라 북쪽 16km의 해변도시 골레타Goleta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그렀듯이 라디오에 모여 방송을 들었다. 라디오에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대통령은 11주 전에 대일본 선전포고를 한 후로 첫번째 대국민 방송이 흘러나왔다.

진주만 기습 후에 서부해안에는 일본침공 우려가 대단했지만 구체적인 정황은 없었다. 루즈벨트는 우리 미국은 과거의 어떤 전쟁과도 다른, 수단과 무기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돌입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세계지도를 펼치고 미국이 돌입한 전쟁의 전선이 얼마나 광활한 지를 먼저 살펴보라고 당부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시민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는 우리를 보호했던 넓은 바다가 이제는 적이 끊임없이 위협하는 전장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연설하는 동안, 진주만을 기습했던 일본해군은 또 다시 기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용한 캘리포니아 해안이 공격목표였다.

 

194221, 2척의 미국 항공모함이 하와의 남서쪽 4,000km 떨어진 길버트와 마샬군도에서 일본군 선박과 해안시설을 공격했다. 일본군의 피해는 미미했지만 진주만에서 궤멸된 줄로만 알았던 미해군이 언제라도 태평양 건너를 공격할 수 있다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경항모 카토리에서 일본 잠수함 부대를 지휘하던 미츠미 시미즈중장도 부상을 입었다. 그는 곧바로 일부 잠수함에게 항모추격을 명령했고 다른 잠수함은 하와이 남쪽을 경계하다가 미국 선박을 요격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27, 시미즈는 경계 중이던 코조 니시노의 I-17에게 부대를 떠나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가서 해안시설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I-17과 함장은 그런 임무에 딱 맞았다. 1939년에 진수한 I-17은 장거리용 대형 B1형 순항잠수함으로 한 번 급유로 20,000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17기의 어뢰, 5.5인치 포와 25mm 대공포말고도 방수 격납고에 숨긴 E14Y1 수상전폭기를 발진시킬 수 있었다. B1형은 현대식 미해군 잠수함보다 더 컸고 당시에는 바다는 지배하는 맹수였다.



니시노는 일본제국해군 잠수함학교를 졸업한 유능한 함장이었다. 전쟁 전에는 캘리포니아와 일본을 오가는 유조선 선장이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를 잘 알았다.

그는 샌디에고에 탐나는 목표물이 많다고 생각하고 220일에 포인트로마Point Loma 앞바다에 도착했다.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수상을 항해하던 중에 미군 경비정 같은 선박을 보았다. 니시노는 항로를 바꾸고 속도를 높였지만 미확인 선박이 계속 추격해오자 결국 잠수했다.


 

222일 오전, 니시노는 수많은 선박이 오가는 샌디에고 앞바다에 머물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시미즈의 명령을 수신했다. 그는 서부해안을 따라가며 포격을 퍼부어 공황을 일으키라며 목표물은 니시노에게 위임했다.

니시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엘우드Ellwood 유정(사진참조)을 선택했다. 그는 엘우드 시설에서 기름을 싣고 정유회사의 초대를 받아 휠러 인 카페를 자주 들렸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이번 방문은 초대를 받지 않았고 커피를 먹을 생각도 없었다.


 

223일 새벽이 되자, I-17호는 산타바바라Santa Barbara해협 서쪽 끝에 진입했다. 니시노는 잠망경으로 기름저장고와 정유시설로 보이는 시설을 발견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수상으로 올라 해변으로 이동했다.

오후 715, 어둠과 안개로 시야가 크게 좁아 든 I-17호는 저장고를 향해 철갑탄 7발을 발사했다. 화염은 보이지 않았지만 몇 발은 명중했다고 생각한 포수는 정유시설을 향해 10발을 더 발사했다. 여전히 2차 폭발이나 화염이 없었지만 니시노는 유전시설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확신했다.

7 35, 해안에 차 전조등이 나타나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니시노는 포격을 멈추고 함정을 몰고 달아났다. 한 시간 후에 I-17호가 항모 3척과 구축함 2척의 추격을 뿌리치고 해협 동쪽 끝을 빠져나갔다.



 

I-17은 대양으로 빠져나가자 북쪽으로 선회한 후에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니시노는 2척의 미국선박을 침몰시켰다고 보고한 후, 312일에 귀국항로에 올랐다.

니시노의 보고를 종합하면 I-17의 캘리포니아 기습은 대성공인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330일에 요코스카 해군기지에 도착하자 마치 지옥을 기습한 영웅처럼 환영받았다. 일본신문은 미본토의 첫번째 공격을 찬양했고 캘리포니아 해안을 포격하는 기념엽서를 수백만 장 배포했다.



 

I-17의 대국민 선전가치는 얼마가지 않았다. 418, 제임스 두리틀James Doolittle중령이 지휘한 미육군항공 B-25B 폭격기 16대가 도쿄 일대를 폭격했다. 그리고 미국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보고한 전과도 착각으로 드러났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I-17 기습은 해프닝에 가까웠지만 두리틀 공습은 실제로 일본에 큰 피해와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상자 450명이 발생하고 초계정 5척이 침몰했습니다.  

대신에 불가능한 폭격이었기 때문에 16대 중 소련으로 향한 한 대를 뺀 나머지 모두 중국에 추락했고 승무원 3명 전사, 8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 8명은 처형되거나 병으로 모두 죽었습니다.

두리틀 공습은 영화 진주만 마지막 부분에 제대로 재현되었습니다. 


I-17의 엘우드 유정시설 포격은 영웅적인 모험이었지만 전술적으로는 연료와 탄약낭비에 불과했다. 포탄 대부분은 목표물과 전혀 상관없는 바다, 해변, 들판 등에 떨어졌다. 몇 발이 500달러 정도의 피해를 입혔을 뿐이고 사상자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소수의 항공기와 구축함이 달아나는 I-17을 추격했을 뿐이고 미해군 태평양함대는 최전선에 그대로 머물렀다.




 

그렇지만 니시노와 I-17의 두 번째 목표는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샌디에고부터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해안지대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일본군이 언제라도 미국해안에 나타날 수 있다는 공포였다.

24시간도 안되어서 ‘L.A. 대공습이라고 부르는 웃지 못할 사건이 터졌다. 224일 목요일, LA 조간신문 일면은 엘우드 포격기사가 장식했는데, 저녁 7시 정도에 제37 해안포여단 사령부는 유정과 군수공장 부근에 섬광이 보인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후 718, 공습경보가 울리고 포병이 급히 포대에 배치되었다. 공격정황이 없자 1023분에 경보를 해제했는데 자정 이후에 대공황이 벌어졌다.



 

서부방어사령부의 보고에 따르면 225일 오전 144, 해안레이더가 LA 180km 지점에서 미확인 비행물체를 포착했다. 급히 대공포부대에 경보가 울렸고 215분에는 다시 미확인 비행물체가 급히 도시로 접근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LA 전역에 소등명령이 내려졌고 도시를 담당한 제37 해안포대는 접근하는 비행체를 보이는 즉시 격추시킬 준비를 마쳤다. LA 밤하늘은 송곳과 같은 탐조등 빛줄기가 그물망처럼 드리워졌고 예광탄에 이어 대공포탄이 계속 하늘로 올라갔다.

레이더에 잡힌 비행물체는 갑자기 사라졌고 오전 36분에는 산타모니카 상공에 붉은 섬광을 단 비행체가 나타나자 다시 대공포가 내륙을 향해 포탄을 날렸다.


 

오전 721, 지역경보센터는 모든 경보와 소등명령을 해제했다. 대공포부대는 1,400발의 기관총탄과 포탄을 발사했지만 단 한 대의 비행체도 격추시키지 못했고 실제 공습도 없었다. 오히려 엄한 시민 사상자만 발생했는데 소등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3, 심장병으로 2명이 죽었다.

이런 저런 소문이 걷잡을 수 없게 퍼지면서 대혼란이 일어났고 지역 언론은 오히려 선정적인 기사를 뽑아 혼란에 한 몫을 했다. 타임즈만이 사진기자를 보내 탐조등과 예광탄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LA 대공습은 일본군이 아닌 미군이 올린 열기구를 착각하면서 시작되었다. 225일 오전 1시 정도에 37 해안포여단에서 일본 전폭기를 요격하기 위해 풍속과 풍향을 재는 관측 열기구를 올리고 지상에서 측정할 수 있도록 섬광탄을 달은 것이었다.

 

일본군은 LA 전투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219일에 명령 9066이 발동되어 군보안시설 부근의 외국인을 모두 소개시켰고 일본 혈통의 주민은 전쟁 기간 내내 내륙시설에 구금되었다.

산타바바라 시민은 첫번째 본토공격에서 살아남은 미국인이라고 자랑했고 엘우드의 복수를 하자전쟁채권을 발행했다. 채권으로 폭격기 플라잉 산타 바바란과 전투기 엘우드 어벤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폭격기는 불발에 그쳤고 전투기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폐기되었다.



현재 엘우드 정유시설과 저장고는 모두 없어지고 샌드파이퍼 골프클럽과 바카라 리조트 스파가 들어섰다. LA 대공습은 외계인 음모론자와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었는데 스티븐 스필버그의 1941 영화 그리고 최근의 배틀:LA가 개봉되었다



참조자료입니다. 








일본해군만 수상전폭기 탑재 잠수함을 만든 것이 아니라 세계각국이 시도한 하이브리드 방식이었습니다. 영국해군은 일본해군보다 훨씬 일찍 시도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