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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1부)

by uesgi2003 2017. 1. 29.


일본여행에 이사까지 겹치면서 전사 이야기 정리가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나이 먹고 이사를 하려니 정말 힘들군요. 그래도 복층이라 1층에서 좀 여유있게 음악과 영화를 즐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독일군 동부전선 전차전력의 1943년 상황

 

1941~42년의 동부전선 전차전은 독일군이 주도권을 가졌다. 독일군은 숙련도가 높고 연합전술을 제대로 활용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전에서 성공했다. 1940년 개전당시, 독일국방군의 자원은 한정적이었지만 1941~42년에는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합병국에서 수천대의 차량과 막대한 연료를 노획했기 때문에 전력은 배가되었다.

그렇지만 독일군은 바르바로사Barbarossa작전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고 작전이 실패하자 전차생산량, 인력보충, 병참과 지휘권갈등과 같은 내부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동부전선 개전 6개월 후부터는 독일군의 기갑전도 점차 위력을 잃어갔다.

적군Red Army은 스탈린의 대숙청의 여파와 독일군의 대공세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1942년 말부터는 전선을 굳혔다. 소련은 전쟁 전에 수립한 5개년 산업화계획 덕분에 지연전에 잘 적응했고 후반기인 1943년부터는 적군 이 스탈린그라드를 지켜내고 주도권을 차지했다.





 

1943년 초, 독일군 군Heer와 무장친위대Waffen-SS 기갑부대는 주로 5종류의 부대로 구성되었다.


• 전차사단. 기동연합작전에서 선봉을 책임졌다. 대부분 (서류상으로는 152대이지만 그보다 훨씬적은) 전차연대 1, 기계화보병연대 2, 기계화포병연대 1(10.5cm 24문과 16cm 12), 정찰대대 1, 대전차대대Panzerjäger(마더Marder 유형의 자주포 14), 기계화공병대대 1, 통신과 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 장갑척탄병사단. 보병전력으로 전차사단을 지원했다. 장갑척탄병은 돌격포대대 또는 전차대대 1개와 보병대대 6개로 구성되었다.

• 독립중전차대대schwere-Panzer-Abteilungen. 군단차원의 전차부대로 전선돌파에 투입되었다. 1942년에는 타이거 9대와 3호전차 10대의 1개 대대로 구성되었다가 1943년 편성 E 체계에 따라 타이거 14대의 3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 돌격포Sturmartillerie 부대. 보병부대를 지원했다. 각 대대는 3호돌격포 StuG III 22대와 StuH 42 9대로 구성되었다.

• 대전차자주포 Panzerjäger 부대. 전선전체에서 대전차전투를 지원했다. 초기 대전차부대는 보통마더 유형의 대전차자주포 27대의 3개 중대로 구성되었다가 1943년에는 중자주포schwere Panzerjäger-Abteilungen가 투입되면서 호르니세Hornisse 45대로 구성되었다.

 

1943 1 1, 독일군은 21개 전차사단과 6개 기갑척탄병사단, 41개 전차대대를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그리고 2개 중전차대대, 타이거 40대와 3호전차 40, 그리고 몇 개 중대의 전차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약 3,200대의 전차가 있었지만 격전을 거듭하면서 실제 전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분석에 따르면 가동전차는 겨우 1,475대로, 서류상의 전력의 46%에 불과했고 1,328대는 수리대기 중이었다. 실제 상황은 더욱 비참했다. 새로 투입된 7 전차사단과 정예 9 전차사단만이 100대 이상의 전차를 가동했고 대부분의 사단은 3~40대의 전차만 움직였다.

3, 4, 8 13 전차사단은 겨우 20대만이 움직여서 사단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14, 16 24 전차사단 그리고 3, 29 60 장갑척탄병사단은 제 6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되어 있었다. 스탈린그라드에는 94대의 전차, 31대의 돌격포가 있었지만 기름보급을 받지 못해 전멸직전이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동부전선의 실제 전력은 800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1941 6월 개전 당시와 달리, 1943년부터는 대규모 기동을 할 수 없었다.

 

1943년 초, 장포신 5cm KwK 39 L/ 60(첫번째 사진참조)를 장착한 3호전차 L, M, 장포신 7.5cm KwK 40 L/ 43를 장착한 4호전차 G형이 독일군의 주력전차였다. 3호와 4호 중전차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면 소련 T-34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다.

독일 중전차는 T-34의 첨단 경사장갑이 없어서 철판을 덧대었고 무게가 늘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300마력 Maybach HL 120 TRM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3호와 4호전차는 V-2 디젤엔진 500마력의 T-34보다 출력이 낮았기 때문에 기동력은 더욱 낮아졌다.

3호전차의 토션바 서스펜션이나 4호전차의 스프링 서스펜션은 T-34의 크리스티Christie 서스펜션의 주행성능을 따라가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3/4호전차인데도 겨우 300대에 불과했고 전력의 32%는 단포신(두번째 사진참조)을 장착한 구형 3/4호 전차였고 나머지 20%는 전력에 거의 도움이 안되는 2호와 Pz 38t 경전차였다.

소수의 중형전차가 동부전선을 지탱했다. 극소수의 타이거 전차가 가동 중이었고 1월부터 판터 중전차가 투입되고 있었지만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3.7 cm KwK 36 단포신을 장착한 3호 전차는 (1943년 장갑이 20–70 mm로 보강된 T-34를 상대하려면 철갑탄을 사용해도 100m 거리까지 좁혀야했습니다. 전선에서 장포신 장포신 울어댔던 이유입니다. 

 

독일군은 소련에 22개 돌격포 대대와 7개 대전차자주포 대대를 투입했다. 서류상으로는 900대의대전차 전력이었지만 이미 7개 대대는 스탈린그라드에 갇혀 있었고 나머지도 전차사단과 마찬가지로 3~50% 전력으로 약화되어 겨우 250대만이 가동 중이었다.

그리고 돌격포와 대전차 자주포는 보병을 지원하며 대전차방어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독일군 특유의 기동전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독일군은 르제프Rzhev에서 마르스Mars(지도참조), 스탈린그라드에서 우라누스Uranus 대반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자 제 9(르제프 돌출부 방어, 5개 전차사단. 1개 장갑척탄병사단과 3개 돌격포 대대)과 돈Don 집단군(6개 전차사단, 2개 장갑척탄병사단, 3개 돌격포대대)으로 전차전력을 집중시켰다.

발터 모델Walter Model 9군은 1942 11~12월에 벌어진 소련의 르제프 공격을 막기 위해 중앙집단군Heeresgruppe Mitte의 모든 전차전력을 긁어 모았다. 돈집단군의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도 연초부터 위기에 몰려 로스토프Rostov로 향하는 소련군을 막고 코카서스의 A집단군 퇴로를 확보하기도 벅찼다. 

만슈타인은 1943년 내내 가장 먼저 보급과 충원을 받았지만 나머지 전선, 특히 북부의 레닌그라드와 중앙 오렐Orel 전선은 전차전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방치되었다.

동부전선에는 여전히 4개 전차군이 존재했어도 허울에 불과했고 가동 중인 전차는 100대 정도가 고작이었다.




마르스 작전은 독일군의 필사적인 벨리키예루키 저항으로 유명합니다.  83보병사단, 7,000명 정도가 갇혔고 1개월 정도의 고전 끝에 약 3~4,000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겨우 150여명이 후방으로 생환했습니다. 벨리키예루키 전투는 이미 오래 전에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와 상황이 비슷해서 미니 스탈린그라드로 불리는데, 소련군은 이 도시를 탈환해서 모스크바를 노리는 독일군의 돌출부를 차단했습니다. 




 

독일군은 1942 6~12월 기간에 동부전선에서 1,256대의 전차를 잃었고 1,365대를 보충했다. 전차전력은 약간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북아프리카 전선이 위기에 몰리면서 전체 전차 생산량 중 60%만 받았고 나머지 40%는 북아프리카 전선이나 훈련용으로 돌려졌다.

기동전에서는 최소한 10% 이상의 예비전력이 있어야 했지만 동부전선의 전차사단은 딱 손실분만큼만 보충받았다. 전투손실뿐만 아니라 기동손실도 상당했기 때문에 전차사단의 실제 전력은 서류와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독일에서 합격한 예비전차는 기차에 실어 슐레지아Silesia의 자간Zagan(독일어는 Sagan, 지도참조)로 보냈다. 다시 이곳에서 러시아 최전선이나 빈의 창고에 보관했다. 육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s Heeres(OKH)는 전차의 행선지와 우선순위를 결정했는데 오류가 많았다. 예를 들어 레닌그라드 전선에 보낸 타이거는 지형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기 힘들었다.

보통 교체용 전차는 10~20대 단위로 특정 사단에 발송되었다. 소량을 계속 투입했기 때문에 전선은 유지되었지만 전차사단의 전력은 늘 최저수준에 머물렀다.


 

더구나 병참을 고려하지 않고 개전했기 때문에 독일군의 보급은 전차사단의 발목을 잡았다. 1941~42년의 대성공은 역으로 최전선의 전차사단과 동유럽의 군수기지의 거리를 크게 벌렸고 전투에 투입하기에도 부족한 차량을 보급에 돌려야 했다.

예를 들어 코카서스에 있던 A 집단군은 겨우 한 가닥의 철도에 생사를 걸었기 때문에 평소에도 연료와 부품보급난에 시달렸다. 뱌즈마Vyazma에서 출발한 기차가 르제프부터는 맞지 않아서 9군은 겨우 하루에 두 번의 보급기차만으로 주코프의 마르스 반격에 맞서야 했다.

 

소련이나 영미와 달리 생산과 부품의 규격이 정해지지 않은 것도 독일군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예비부품이 없는 경우에는 전차 여러 대를 희생시키고 부품을 확보하는 제살 깍아먹기가 전체 전선에서 일어났다.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린 전차는 3~6개월마다 정비창에 들어가 서스펜션과 엔진수리를 받아야 했다. 현장에서도 작은 수리를 거쳐 몇 개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사소한 문제가 누적되다 보면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전투 중 파손되거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전차는 독일로 보냈고 최소한 몇 주 동안은 다른 전차를 부품대용으로 희생해야 했다. 전차사단은 그렇게 상당수의 전차를 부품용으로 전용했다.

 

가동 중인 전차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포탑선회 모터가 탔는데도 부품이 없으면 그냥 수동으로 선회를 했고 제대로 소련군 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겨울 혹한이 닥치면 이렇게 한계상황까지 사용한 전차가 가장 먼저 이탈했다. 소련군의 반격에 밀려 크게 후퇴할 때마다 길에는 많은 전차가 남겨졌다.

1942년 말에 소련군이 B 집단군의 돈강 전선을 돌파해 보급기지를 점령하자 고장나지 않은 차량도 연료부족으로 버려졌다. 전투하다가 잃고 후퇴하다가 잃고 연료부족으로 잃은 차량이 급증하면서 1942~43년 겨울의 독일군 전차전력은 붕괴직전까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