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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이집트

누비아의 흑인 파라오, 이집트를 점령하다 - 1부

by uesgi2003 2016. 12. 6.


요즘 웃기고 울리고 분통터지는 일이 시간마다 벌어지니 역사이야기 정리가 많이 늦어졌습니다. 제 디지탈 서재인 아마존 킨들에는 역사서적이 수십 권 쌓여만 갑니다만...


누비아의 흑인 파라오, 이집트를 점령하다 - 1부


기원전 730, 피예Piye는 국경을 넘어 이집트를 침공하기로 했다. 그는 지휘관에게 마구간에서 최고의 말을 골라내라고 명령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세웠던 찬란한 문명은 일개 군벌에게 무너져 내렸다. 피예는 20년 동안 누비아Nubia(현재의 수단)를 통치했고 이집트의 진정한 군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람세스Ramses 2세와 투트모세Thutmose 3세의 후계자를 자임했다.

피예는 하(하류)이집트Lower Egypt는 그의 장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예는 짐은 하이집트가 짐의 손가락을 맛보게 하겠다(복종의 입맞춤)”고 기록했다.


 

군대는 나일강 북쪽으로 배를 몰았다. 상이집트 수도인 테베Thebes에 내린 피예는 나일강에서 목욕하며 성전을 다짐했다. 피예는 양머리의 태양신 아문Amun(사진 참조)을 숭배했기 때문에 카르나크Karnak신전의 성수를 병사들에게 뿌렸다. 자신도 아문에게 제물을 바쳤다.




아문의 지원을 굳게 믿은 지휘관과 병사는 진로에 있는 모든 적을 공격했다. 1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이집트의 모든 군벌이 항복했다. 델타지역의 군벌 테프나크흐트Tefnakht는 전령을 보내 자비를 베풀기 바라오. 수치스러워 얼굴을 대면할 수 없구려. 당신의 화염을 상대할 수 없구려라고 알렸다.



 

피예는 신전에서 의식을 치르고 보석과 말을 챙겼다. 그리고는 군대를 거둬 누비아로 그대로 돌아갔고, 자비를 바라며 엎드려 떨고 있던 이집트인은 어리둥절해했다. 피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피예는 기원전 715, 35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었고 신하들은 그의 바람대로 이집트식 피라미드에 가장 좋아하던 말 4마리와 함께 매장했다.

이후 오랜 동안 그런 대접을 받은 파라오가 없었는데도 그의 얼굴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위대한 정복을 묘사한 석판은 깎여 나갔다. 누비아 수도의 신전에 두 다리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피예의 피부가 검은 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흑인 파라오에 대한 상상도입니다. 

 

피예는 이집트를 25년 동안 다스린 25대 왕조의 첫번째 흑인 파라오였다. 흑인 파라오는 만신창이로 분열된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현재의 카르툼Khartoum에서 지중해까지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 전국에 온갖 기념건축물을 남겼다. 아시리아Assyria의 침공을 막고 예루살렘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까지 그들의 역사는 어둠 속에 있었다. 현대 고고학자들은  흑인 파라오가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흑인 파라오는 2,500년 동안 나일강 남쪽에 번성했던 아프리카 문명출신이며 그 기원은 이집트 1대 왕조보다 오래되었을 수 있다.

 

이집트보다 더 많은 수단의 피라미드는 누비아 사막에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수단의 인종청소나 피난민 행렬과 전혀 상관없는 세상에 있는 것 같은 피라미드를 조용히 지날 수 있다. 북쪽에 멀리 떨어진 카이로나 룩소르Luxor(첫번째 사진)에는 관광객이 흘러 넘치는 반면에 엘 쿠루El Kurru, 누리Nuri, 메로에Meroe의 피라미드(두번째 사진참조)는 찾는 사람이 없어 찬란했던 고대 누비아 문명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수단정부는 나일강을 따라 수력발전댐을 건설해 160km 길이의 호수가 미발굴지대를 영원히 덮어버렸다. 많은 고고학자가 수몰 전에 누비아 유물을 발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대세계는 인종을 차별하지 않았다. 피례가 역사적인 정복을 하던 당시에는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았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 미술품을 보면 인종과 피부색을 확실하게 표현했고 검은 피부를 천시한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유럽이 19세기에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든 후부터 서양학자가 누비아의 피부색을 거론했고 부정적인 영향을 남겼다.

나일강 중앙지역에 도착한 탐험가는 쿠시Kush라는 고대문명의 유물인 신전과 피라미드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탈리아 의사 주세페 페를리니Giuseppe Ferlini는 누비아 피라미드를 도굴했고 다른 탐험가도 그의 뒤를 따라서 보물을 발견하려고 피라미드를 도굴했다.




주세페 페를리니가 도굴한 메로에 피라미드

 

프로이센 고고학자 리하르트 렙시우스Richard Lepsius는 연구목적으로 발굴했지만 쿠시유물은 코카서스 인종의 것이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심지어 처음으로 이집트를 지배했던 누비아 왕조에 대해 밝혀냈던 하바드 이집트학자 조지 라이스너George Reisner조차 흑인 아프리카인은 자신이 발굴한 기념건축물을 세울 수 없다는 오류를 범했다. 그는 피예를 포함한 누비아 군주가 밝은 피부색의 이집트-리비아인이며 아프리카 원주민을 통치했다고 믿었다. 아프리카 흑인과 피가 섞이면서 쇠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후 수십년 동안 많은 역사가가 이런 저런 주장을 반복했다. 쿠시왕국Kushite(그림참조) 파라오가 실제로는 백인이었다든가 혼혈이었다든가 실제로 누비아문명은 이집트문명에서 파생되었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명망이 높은 이집트학자 카이트 셀레Keith Seele와 게오르크 슈타인도르프George Steindorff1942년 저서 When Egypt Ruled the East에서 누비아 파라오왕조와 피예의 영광을 단 3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렇지만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라고 결론내렸다.

그 당시에 대한 왜곡된 사관도 문제였고 이집트의 영광을 종교처럼 추종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고대사는 이렇게 무지한 상태로 남겨졌다. 한 스위스 고고학자는 수단에 간다고 주변에 말하자 수단은 유물이 없기 때문에 이집트로 가라는 강요에 가까운 조언을 받았을 정도였다.


 

50년 전부터 이런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1960년대 아스완댐의 수위가 올라가면서 고고학자의 필사적인 유물탐사가 진행되었다. 2003, 찰스 보넷Charles Bonnet이 나일강의 세번째 급류지점 부근을 수십년 동안 탐사한 끝에 케르마Kerma 주거지를 발견해 국제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곳에서는 누비아 파라오의 거대한 석상 7개가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보넷은 그 이전에도 도심지를 발굴했는데 많은 인구가 농사, 목축업과 귀금속 교역을 벌인 것도 밝혀냈다. 보넷은 이집트와 완전히 별개의 고유한 왕국이었습니다. 고유한 건축과 매장관습을 가지고 있었죠라고 말했다.

이 강력한 왕조는 기원전 1785년경에 이집트의 중기왕국 쇠퇴기에 맞물려 부흥했다. 기원전 1500, 누비아 제국은 두번째와 5번째 급류 사이를 장악했다.


 

투트Tut부터 클레오파트라에 이르는 고대 이집트 왕이 흑인 아프리카인이라는 구체적은 증거는 없지만 누비아 문명이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이집트 왕국과도 교류하며 결혼했다. 투트왕의 할머니인 18대왕조 여왕 티예Tiye는 누비아 가문출신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집트인은 남쪽에 그렇게 강력한 이웃을 두고 싶지 않았다. 특히 서아시아 지역의 지출 때문에 누비아의 금광에 의존하게 되면 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18대 왕조(기원전 1539~1292) 파라오는 누비아에 군대를 보내고 나일강을 따라 요새를 건설했다. 누비아족장을 행정관으로 임명하고 귀족의 아이를 테베로 불러 교육시켰다. 누비아 지도층은 이집트의 문화와 신앙관습을 수용했고 이집트의 신 중에 아문을 숭상했으며 이집트의 매장문화와 피라미드 건축기술을 배웠다. 누비아는 이집트에 몰입된 최초의 민족이었다.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의 이집트학자는 이것을 열등민족의 증거로 생각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누비아는 지정학의 흐름을 제대로 판단했다.

기원전 18세기가 되자, 이집트는 분열되고 리비아족장이 북쪽을 장악했다. 그들은 정치기반이 단단해지자 아문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기 시작했고 카르나크의 승려는 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했다.

이집트 승려는 남쪽에서 해답을 찾았다. 남쪽에는 이집트에 발을 들여 놓은 적이 없으면서도 이집트의 전통신앙을 그대로 따르는 민족이 있었다. 고고학자 티모시 켄달Timorthy Kendall의 말대로 누비아인은 교황보다 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다.

 

누비아 왕조 아래 이집트는 다시 통일되었다. 피예가 715년에 죽고 동생 샤바카Shabaka가 이집트 수도 멤피스Memphis를 장악하고 25대 왕조를 이었다. 피예가 투트모세 3세의 이름을 빌었듯이 샤바카도 6대 왕조 페피Pepi 2세의 이름을 빌리고 파라오식 통치를 했다.

샤바카는 적군을 처형하지 않는 대신에 나일강 제방건설에 투입해 홍수를 막았다. 그는 테베와 룩소르 신전에 대대적인 건설을 시작했다. 카르나크에서는 자신의 핑크색 석상을 세웠는데 두 왕국의 군주를 의미하는 2마리의 코브라 왕관을 표시하게 만들었다.

그는 건축물과 군대를 통해 자신은 누비아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머물겠다는 것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