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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이집트

누비아의 흑인 파라오, 이집트를 점령하다 - 2부

by uesgi2003 2016. 12. 26.


기름장어가 한국을 위해 몸을 불사르겠다고 노욕을 부렸다고 하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현지시간) "제가 10년 동안 유엔 총장을 역임하면서 배우고, 보고, 느낀 것이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제 한 몸 불살라서라도 노력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불과 1년 전에는 이런 말을 했던 장어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유엔사무총장 시절에는 복지부동하더니만 한국대선판에서는 불사르겠다는 것일까요? 지난 두 번의 임기동안 학살당하고 팔려나가고 짓눌리는 수 많은 피난민을 위해서는 조금의 의지도 보이지 않던 자가 한국판 대선에서는 불사르겠다고요? 


혹시나 싶어서 해석하면, 우리를 위해 늙은 몸을 불사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기 위해 노욕으로 불타오르겠다는 말입니다. 

기름장어가 되면 최순실과 박근혜, 십상시, 세월호, 천안함, 4대강, 자원외교와 국방 의혹과 비리는 단 하나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누비아의 흑인 파라오, 이집트를 점령하다 - 2부


동쪽의 아시리아Assyria도 세력을 크게 넓히고 있었다. 기원전 701, 현재의 이스라엘인 유다Judah까지 진출하자 누비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두 군대는 엘테케흐Eltekeh(이스라엘 게알랴)에서 맞붙었다.

아시리아황제 센나체립Sennacherib은 누비아군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지만 당시 20살로 추정되는 누비아 왕자는 다행히도 몸을 피했다. 적군을 학살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아시리아가 적국의 왕자를 살려 보낸 것을 보면 완승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승패와 상관없이, 아시리아군은 예루살렘 성문 앞까지 몰려들었고 궁지에 몰린 예루살렘은 이집트군의 구원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아시리아는 열왕기Book of kings 구약성서를 인용하며 이렇게 조롱했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그 후에 아시리아군이 퇴각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전염병? 아니면 달아난 왕자의 누비아증원군? 그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하고 센나체립이 갑자기 포위망을 풀고 황급히 귀국했으며 18년 후에 아들에게 암살당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예루살렘이 살아남으면서 히브리Hebrew사회와 유대교Judaism은 이후 100년 동안 단단한 세력을 마련해서 바빌론왕 네브카드레자르Nebrchadrezzar가 히브리민족을 탄압할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태어나고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지가 된다.




문명 5에서 인상깊은 바빌론왕 네브카드자레입니다. 

 

그리고 엘테케흐에서 목숨을 건진 왕자는 피예의 아들 타하르카Taharqa였고 아시리아는 모든 신이 저주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타하르카가 이집트에 미친 영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적도 그의 자취를 모두 지우지 못했다. 그의 통치기간 중, 나파타Napata에서 테베까지 나일강을 내려가면 경이로운 건축물의 장관이 펼쳐졌다. 그는 이집트 전국에 자신의 상징이나 이름을 새긴 온갖 건축물을 올렸고 지금은 전세계 박물관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그는 주로 신의 대리인으로 양모양의 아문의 수호를 받거나 스핑크스나 전사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대부분의 석상은 얼굴이 파괴되었는데 적이나 경쟁자의 짓이다. 그가 저승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게 코를 부수기도 했다. 두 왕국의 군주라는 뜻의, 그의 이마에 있는 두 마리 뱀도 파괴되었다.


 

아버지 피예는 이집트에 파라오 관습을 부활시켰고 작은 아버지 샤바카는 멤피스와 테베에 누비아 관습을 남겼다. 그렇지만 690년에 즉위해 이집트와 누비아를 향후 26년 동안 통치한 31살의 군주인 타하르카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제25대 왕조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 즉위했다. 삼각주의 군벌은 이미 제압된 상태였다. 아시리아는 그를 예루살렘에서 놓친 후에 더 이상 침공하지 않았다. 이집트는 완전히 그의 것이었다. 신은 그가 평화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허락했다. 통치 6년 차에는 나일강이 범람해 계곡으로 흘렀지만 마을은 건드리지 않고 옥토를 남겼다. 심지어 홍수는 쥐와 뱀을 모두 휩쓸어갔다.

아문은 분명히 그의 수호신이었다.

 

타하르카는 평화를 누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향력이 무한하다고 믿었고 이집트 확장시기였던 신왕국New Kingdom(기원전 1500년경) 이후 가장 과감한 토목공사를 벌였다.

신앙중심지인 테베와 나파타가 초점이 되었다. 테베부근 카라나크 신전단지 중앙에는 지금도 19m 높이의 기둥이 서 있다. 이 기둥은 누비아 파라오가 아문신전에 추가한 거대한 키오스크의 10개 기둥 중 하나다.

그는 신전부근에 다수의 예배실을 만들고 자신와 어머니 아바르Abar의 거대한 석상을 제웠다. 기존의 건축물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고 테베를 자신의 의지대로 바꾸었다.



 

그는 수백 km 떨어진 상류의 나파타(현재의 수단지역)에도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제벨 바르칼Jebel Barkal산은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도 아문의 탄생지라며 신성하게 여겼다. 타하르카는 신왕국 파라오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에 산 아래에 2개의 신전을 세우고 아문의 여신을 모셨다. 그리고 자벨 바르칼의 정상에는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일부분은 금으로 장식했다.

통치 15년 차가 되자 그는 토목공사 이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집트와 누비아 군대는 매우 강력했고 그의 영향력은 주변국가를 뒤흔들었다. 점차 자신을 세계의 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타하르카의 엄청난 토목공사는 멀리 레바논 해안 일대의 목재상인의 큰 사업이 되었다. 당연히 아시리아왕 에사르하돈Esarhaddon은 이 교역로를 장악하려고 했다. 타하르카는 남부 레반트Levant에 군대를 보내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을 지원했다. 에사르하돈은 반란과 원정군을 격파한 후에 기원전 674년에 이집트 국경을 넘었지만 반격을 받고 물러났다.

누비아는 승전으로 기선을 잡았다. 지중해 주변의 영지는 반란을 일으키며 타하르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671, 아시리아군은 낙타를 몰고 시나이Sinai사막으로 쳐들어와 반란을 진압했다. 에사르하돈은 기세를 흘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나일 삼각주로 향했다.


 

타하르카군은 아시리아군과 맞섰고 15일 동안 양쪽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누비아군이 패배했고 멤피스Memphis까지 계속 밀려났다. 타하르카는 5번이나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건졌고 수도 멤피스를 적에게 넘겨주었다.

에사르하돈은 전통적인 아시리아 방식대로 시민을 학살하고 머리로 탑을 쌓았다. 그리고는 타하르카의 왕비, 궁녀, 후계자, 아들과 딸, 보물, 말과 가축을 모조리 끌고 갔다. 이집트에서 누비아를 뿌리째 뽑아버린 셈이었다.

그는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석비를 세웠는데 거기에는 타하르카의 아들 우샨크후루Ushankhuru가 목줄을 매고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새겨넣었다. 


 

그렇지만 타하르카는 숙적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기원전 669, 에사르하돈은 이집트로 향하던 길에 죽었고 누비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멤피스를 탈환했다. 아시리아의 새왕은 포로로 잡은 반란군을 흡수해 다시 침공해왔다.

타하르카는 승산이 없었다. 그는 나파타로 달아난 후에 다시는 이집트로 돌아오지 못했다.

 

누비아에 있는 타하르카의 석상을 보면, 그가 2번의 패배를 당한 후에도 누비아는 통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말년에 대해서는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아는 바가 없다. 아버지 피예처럼, 그는 피라미드 매장을 원했다.

그는 다른 누비아 파라오가 매장된 엘 쿠루El Kurru의 왕실묘지대신에 나일강 건너편의 누리Nuri를 선택했다. 고고학자 티모시 켄달의 주장대로, 제벨 바르칼에서 볼 때에 그 위치가 이집트의 11일 해돋이와 일치하기 때문에 선택했을 수 있다. 그는 이집트의 부활신앙을 믿으며 영구한 삶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는 누비아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암흑 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