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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잊혀진 비극, 바탁 학살 (2부)

by uesgi2003 2017. 2. 21.


북쪽 산맥 계곡에 있는 바탁은 900개의 가옥과 9,000명이 살던 흔한 도시였다. 목재산업 호황덕분에 그 일대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었다. 1813년에 세운 성 네델랴의 동방정교 교회가 바탁의 중심지였다. 교회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당시의 일반적인 건축물이었다.

바탁은 원래 혁명중심지가 아니었지만 봉기소식이 퍼지자 거의 모든 성인남성이 무기를 들고 동참했다. 그래봐야 농기구와 구식 수석총Flintlock이 전부였다. 더구나 바로 옆의 마을인 도스파트, 넵로코프와 체피노는 무슬림 거주지역이어서 그렇지 않아도 바탁에 적대적이었다.

도스파트 출신의 아흐메드 아가Ahmed Aga가 민병대를 이끌고 바탁진압을 시작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미천하고 무식하며 잔인한 사람이었다.



 

59, 아가는 5,000명을 이끌고 바탁에 접근해 항복과 전멸 중에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바탁 독립군은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최후통첩에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했다. 결전을 선택한 사람들은 어둠을 틈타 도시를 빠져나갔고 항복을 선택한 사람들, 대부분 여성, 아이와 노인은 민병대의 선처를 기대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남은 시민은 민병대에게 항복의사를 밝혔고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가는 총 한방 쏘지 않고 바탁에 진입했다. 바탁에 들어선 아가는 약속을 어기고 도시에 불을 지르고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3일 동안 벌어진 학살, 강간과 약탈 끝에 바탁의 모든 집에는 시체가 쌓였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사람을 죽였고 은신처를 찾지 못하면 건물에 불을 질러 죽였다.


 

아가는 바탁을 독립군에 대한 표본으로 삼기로 했다. 아가는 독립군과 같은 피가 흘렀지만 오히려 더 잔인하게 대했다. 종교나 성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다. 학살을 피해 시민이 성네델랴 교회로 몸을 피했는데, 아가는 입구를 막아 교회를 봉쇄한 후에 민병대가 지붕을 뜯어내고 안에 있는 시민에게 사냥하듯이 총탄세례를 퍼부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던지 기름을 적신 천과 나무를 던져 넣고 불을 질렀다. 교회는 순식간에 엄청난 화염을 쏟아냈고 아직 살아있던 시민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불타는 시민이 문으로 몰려갔지만 입구는 단단하게 막혀 있었다.

잠시 후, 비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학교와 큰 집으로 몸을 피한 시민도 모두 학살당했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이 다행일 정도였다. 여성은 온갖 모욕을 당한 후에 살해당했다.

민병대는 3일 후에 도시를 빠져나갔고 그 뒤에는 머리가 잘리거나 숯덩어리로 변한 시체가 거리에 널렸다. 아가는 만행을 숨기기 위해 모든 건물을 무너트리라고 명령했다.



불가리아 다른 지역의 만행입니다만 비슷한 상황이라 옮겨옵니다. 그리고 머리가 잘려 쌓인 시체는 여러분을 위해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산으로 급하게 피신한 독립군은 식량이 떨어졌고 부근의 페로우쉬티차와 브라치고보 마을도 민병대와 오스만 정규군에게 함락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페로우쉬티차는 민병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오스만군의 포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을주민은 항복대신에 73년 마사다Masada 저항을 따르기로 했다. 교회에 모인 주민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탁에서 달아난 독립군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면 민병대의 사냥감이 되었다.

지역 지도자 벤콥스키Benkovski는 끝까지 저항하며 세르비아 국경을 넘다가 불가리아 부족의 배신으로 524일에 온몸이 벌집이 되어 죽었다. 죽는 순간에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독재자의 심장에 남긴 고통은 영원하리라.”

 

독립군 지도자 보텝이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봉기는 이미 실패했다. 516, 그는 200명을 이끌고 불가리아로 들어가려고 했다. 오스트리아 증기선을 빼앗아 타고 코즐로두이에서 병력을 더 모았지만 곧바로 오스만 기병대와 민병대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보텝은 가장 앞 열에 서서 독립군의 사기를 높였다. 61, 날이 저물자 방어선을 둘러보다가 오스만 저격병에게 죽었다.

4월 봉기는 3주도 안되어서 끝이 났다. 무기를 들고 동참한 8,000명의 독립군은 거의 모두 살해당했다. 포로가 된 지도자는 형식적인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수만명의 시민도 학살되었다.

바탁의 학살자, 아가는 술탄의 훈장을 받고 민병대에서 두 계급 승진했다.

 

의외로 전세계는 불가리아에서 벌어진 학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수감된 동방정교 신부 게오르기 틸렙Georgi Tilev의 편지내용이 이스탄불 외국인 거류지에 전해지면서 조금씩 소문이 퍼졌다. 신부의 편지는 이스탄불의 미국인 선교사의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영어로 번역해 오스만군과 민병대의 만행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데일리뉴스 통신원 에드윈 피어스, 타임즈 통신원 안토니오 카이로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기사를 작성했지만 피어스의 기사만이 623일에 게재되었다.

데일리뉴스의 기사는 유럽과 미국 언론을 모두 놀라게 만들었다. 영국정부는 틸렙의 편지내용을 검증해야 한다며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피했다.

 

만약 미국대사 호레이스 메이너드Horace Maynard가 불가리아 조사팀을 꾸리고 있을 때에 맥가한이 이스탄불에 도착하지 않았다면 학살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었던 맥가한은 인권에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공교롭게도 메이너드의 총영사가 맥가한의 친구였다.

뉴욕 헤럴드 통신원으로 런던에 있다가 학살소문을 들은 맥가한은 헤럴드에 취재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고 피어스의 데일리뉴스에게 이스탄불 취재를 후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때마침 이스탄불은 술탄 메흐메드 무라드Mehmed Murad 5세의 개혁추진으로 혼란에 휩싸였고 이 기회를 노려 조사팀과 맥가한은 무난하게 불가리아로 향할 수 있었다. 82, 조사팀은 바탁에 도착했다.

 

런던과 이스탄불에서 떠돌던 소문은 실상과 비교하면 동화수준이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거리는 썩어가는 시체와 뼈가 나뒹굴고 있었고 들개가 시체조각을 찢어 먹고 있었다. 맥가한은 생존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직접 목격한 참상을 기록했다. 그의 노트는 오스만 정부의 감시를 뚫고 일주일만에 런던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맥가한이 만행이라고 단언한 학살소식은 런던시민에 이어 전 유럽과 미국에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그는 구역질나는 참상 그대로를 전하며 조금도 축소하거나 미화시키지 않았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외교문제를 무릅쓰고 오스만 정부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맥가한은 바탁 시민 9,000명 중에 1,200명만이 생존했다고 기록했다. 87일 뉴스데일리 기사에서 처음으로 학살규모가 계산되었다.

바탁에는 더 이상 눈물도 절규도 없다. 흐느낌도 비명도 없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도 들리지 않는다. 밭에서는 곡식이 썩어가며 농부는 여기 교회마당에서 썩어가고 있다.”

유럽의 다른 통신원들이 그 뒤를 이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오스만 정부의 만행을 비판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렇지만 두 나라 정부는 외교문제로 비화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831일에 메흐메드 무라드 5세가 강제퇴임되고 압둘하미드Abdulhamid 2세가 즉위하면서 바탁학살은 더 이상 뉴스소재가 아니었다.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는 합스부르크제국을 견제하고 오스만제국을 무너트릴 생각으로, 불가리아 학살을 이유로 들며 오스만제국을 침공했다. 맥가한은 1877년의 침공에 대해 이렇게 비꼬았다.

투르크인을 뺀다면 나보다 오스만제국을 더 무너트린 사람이 있을까

그는 데일리뉴스의 후원을 받아 러시아군 종군기자로 참전했고 대단한 전장기록을 남겼다. 종군 1년이 지나기도 전에 그는 다른 러시아 병사들처럼 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불가리아는 1878년 평화협정에 따라 독립을 쟁취했고 맥가한은 건국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미국정부는 1884년에 그의 시신을 송환해서 오하이오 뉴렉싱턴에 안장했다.

1901년 그의 무덤에는 불가리아 해방자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미국인은 그를 잊었지만 불가리아는 그를 절대로 잊지 않았다.

1978, 냉전이 최고조였을 때에도 바탁시민은 그의 석상을 세워 그를 기렸다. 1893년 콜럼비아 엑스포에서 한 미국인이 불가리아 관리에게 맥가한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당신은 워싱턴, 링컨이나 그랜트에 대해 아나요? 당신이 그들을 불멸의 위인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도 맥가한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불가리아 엘레나에 있는 그의 두상이며 아래는 불가리아 맥가한 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