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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2차 시크교도전쟁 (1849) - 2부

by uesgi2003 2015. 7. 19.


국정원의 감청 그리고 직원의 죽음이 다시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진실은 극소수만 알고 있겠죠. 어쨌든 모 사이트의 비교가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2차 시크교도전쟁 (1849) - 2부


1 10, 고프는 아토크Attok가 추투루 싱Chuttur Singh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다면 추투라 싱은 이제 국경지대의 병력을 이끌고 아들에게 합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크교도 첩자가 세포이 병사를 선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프는 물탄 병력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시크군은 뒤에 젤룸강을 둔 배수진을 쳤다. 좌익의 루술Russool마을부터 강변을 따라 고지에 병력을 배치했는데, 고프는 시크군 진영의 중간인 칠리안왈라Chillianwala마을 치기로 했다. 일단 그 마을을 점령한 후에 시크군의 반응에 따라 진격이나 방어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1 13일 오전, 영국군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형이 험난했지만 점심 무렵에 시크군 전방에 접근했고 제24연대가 초병을 몰아내고 마을 위쪽의 무덤언덕을 점령했다. 고프는 무덤언덕 위에 올라 시크군의 진영을 잘 관찰했다. 총공격 명령을 내린 후에야 자신이 시크군의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았다.

고프는 대포를 견인해서 1시간 동안 포격했고 보병이 전진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측의 포대가 시크군 포대와 포격을 주고 받고 있었는데 그대로 두었다가는 콜린 캠벨Colin Campbell사단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참모장교가 다른 포대로 달려가 좌익을 도우라고 명령했지만 이 포대도 이미 6문에서 3문으로 줄어들 정도의 피해를 입고 있어서 명령을 거부했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증원한 포대로 시크군의 포대를 침묵시켰다.



왼쪽이 시크군의 진영입니다.

 

이제 캠벨사단이 앞에 나섰다. 부대 앞의 정글이 너무 우거져서 캠벨은 양쪽 여단을 동시에 통제할 수 없었고 존 페니쿠익여단은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결국 캠벨은 사단장이 아니라 여단장으로 전투를 지휘했고 24여단은 총검만 사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24연대가 총 한 발 안 쏘고도 포대를 쓸어버렸다는 전설을 만들자라고 말했다.

24연대는 페니쿠익여단 중앙에서 전진했고 알버트 쉐코Albert Shako군모를 쓴 25 45벵갈원주민보병연대가 양 옆에서 전진했다.



첫번째 줄이 알버트 쉐코 군모입니다. 

 

양쪽의 부대보다 앞서나가자 전면과 측면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시크군의 반격을 받은 24연대는 장교 26명을 포함해 231명 전사, 236명 부상의 큰 피해를 입고 칠리안왈라로 퇴각했다. 25 45 원주민연대도 마찬가지로 퇴각했다.

캠벨의 다른 여단은 중앙에 61, 좌우에 36 46연대를 배치하고 다른 여단에 비해 나은 지형을 따라 800m를 전진했다. 캠벨이 포대를 지원해주지 않았는지 포병은 없었다. 61연대는 시크군과 80m 거리를 두어서야 상대가 기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열을 정비한 후에 일제사격을 퍼붓고 돌격해 들어가 시크군 포대를 일부 점령했지만 바로 밀려났고, 46연대는 기병의 반격을 막아냈다.

시크군이 61연대의 우측 옆구리를 노렸지만 보병과 기병의 반격을 차례로 막아냈다. 46연대도 제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두 연대는 시크군을 협공해 13문의 포를 노획했다.

 

캠벨사단의 좌측에는 월터 길버트Walter Gilbert사단이 있었다. 29연대가 시크군의 포도탄 세례를 뚫고 시크군 보병과 포대를 공격했는데 시크군 포병은 영국군의 총검을 맨손으로 붙잡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56벵갈원주민연대가 기병에게 밀려나면서 29연대가 고립되었는데 좌우로 선회하며 시크군의 반격을 막아냈다. 기병이 배후에서 다가오자 뒤로 돌아 막아낸 후에 30 31벵갈원주민연대와 함께 시크군 방어선으로 접근하다가 캠벨사단과 합류했다. 56연대는 330명을 잃었고 30연대는 겨우 300명 밖에 안 남았다


우측 멀리에 있던 영국기병이 와해되어 물러났기 때문에 길버트는 이제 우익에 있는 여단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2유럽연대가 중앙에 섰고 70벵갈연대가 우측에 31벵갈연대가 좌측에 섰다. 70연대는 제자리에 멈춰 수비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앞에 나섰던 2연대는 뒤에서 공격을 받는 동시에 시크기병의 공격에 노출되었다.

2연대는 뒤로 반전했고 길버트는 연대장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소령. 적에게 돌격할만한가?” “명령만 내리십시오.” 2연대는 뒤에 있던 적을 순식간에 몰아냈다.

 

31연대가 회전해 나간 자리에 구멍이 생겼고 고프는 예비여단을 급히 보내 그 틈을 메웠다. 기병이 패주했고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기 힘든 지형과 혼전이었지만 고프는 시크군의 방어선 안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고 적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 승세를 굳힐 차례라고 생각했다.

고프는 일단 제자리를 지키다가 이튿날 오전에 공격을 재개할 생각이었는데 일단 칠리안왈라로 후퇴해서 물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부상병을 수습한 후에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실제로 모든 부대가 부상병을 수습한 후에야 움직였다.



영국군 진영에서 바라 본 전장입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고프의 판단이 옳았다. 영국군이 물러가자 시크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뒤에 남긴 모든 포대뿐만 아니라 영국군의 포 4문도 노획했다. 지역 주민까지 합세해 영국군 시체의 군복을 벗기고 훼손했다.

영국군은 2,331명이라는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고프가 야영지에 들어서자 환호성이 터질 정도로 사기는 여전했다.

 

이후 4일 동안 집중호우로 양쪽 모두 움직일 수 없었다. 고프는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했고 쉐르 싱도 아버지 추투르의 증원군을 받았다. 영국군은 칠리안왈라에 방벽을 쌓고 수비를 강화시켰는데 런던정가는 4문의 포를 내준 것과 칼사군에게 밀려난 것에 대해 고프를 심하게 비난했다.

그렇지만 영국과 벵갈병사는 그 누구도 흰색 군복을 입은 노인장군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언론의 보도내용입니다. 

 

24일 오전, 쉐르 싱은 루술을 버리고 구즈라트 방향으로 후퇴했다. 그는 방어태세를 취하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 시크군은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새로운 병력과 함께 고프를 칠리안왈라에서 몰아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고 이제 고프는 물탄에서 풀려난 병력으로 이전의 피해를 완전히 복구했다.

물탄병력은 18일 만에 370km를 달려왔는데도 훌륭한 상태였다. 영국군은 2월 21일 오전 7시에 시크군 진영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오전 9시 직전에 시크군의 포대가 포문을 열었고 고프도 급히 견인포를 배치해 응사했다. 영국 포병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침착하게 응사했고 결국 시크군 포대를 압도했다. 영국군 전체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양쪽 끝에 배치되었던 시크기병이 다시 나섰다. 보병연대는 방진형을 취했고 영국기병이 나서 시크기병을 보병대에게서 떼어냈다. 



걸작영화 워털루에서 방진대형을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기병은 전차와 같아서 보병대열을 좌우 또는 뒤에서 덮치며 파죽지세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보병의 밀집방진대형을 만나면 그 힘을 잃게 됩니다. 중장갑기병이 자살공격으로 대열에 뛰어들어 구멍을 내고 흐트러 놓으면 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방진대형이 하나 둘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기병은 어느 한 대형을 무너트리더라도 이미 그 기세는 사라진 후가 됩니다. 


영국기병은 시크기병과 교전을 벌이지 않고 교묘하게 거리를 두고 끌어들이며 견인포에게 맡겼다. 우익에서도 영국보병이 초토 칼라Choto Kalra에 접근 중이었는데 시크기병이 덤벼들었다가 포화에 물러났다. 길버트는 예비 여단을 투입해 시크군의 반격을 막은 후에 바라 칼라Bara Kalra도 점령했다. 



원래 계획대로 였다면 시크군은 마른 강바닥을 따라 내려와 길버트와 캠벨사단의 사이를 파고 들었어야 했는데 캠벨사단의 포격에 막혔고 반격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시크기병대는 칠리안왈라에서와 달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3 경용기병Light Dragoons연대가 6문의 포대를 호위하던 시크기병을 유인해서 제60 왕실보병King’s Royal Rifle Corps의 일제사격으로 기병을 궤멸시켰다.

우익에서는 제9 왕실창기병Qeen’s Royal Lancers연대가 훨씬 많은 기병에게 돌진했다. 2분 정도의 격전 만에 시크기병은 본진 너머로 멀리 달아났다.


 

오후 12 30분이 되자 제2 유럽연대의 일부가 탄약상자 근처에서 부주의하게 담뱃불을 붙이다가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는 일을 빼고는 전투가 완전히 끝났다. 영국과 벵갈보병대도 3km 정도를 추격하다가 멈추고 기병에게 나머지 소탕을 맡겼다.

기병은 일체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칠리안왈라에서 부상병에게 한 짓을 몇 배로 철저하게 되갚았다. 영국군은 766명을 잃었고 53문의 시크군 대포를 노획했다.

 

영국군의 추격은 3 8일까지 이어져서 라왈핀디Rawalpindi에 이르렀고 시크군은 모든 포로를 돌려보내며 협상을 제의했다. 무슬림 마을을 약탈하던 칼사군도 보급품이 떨어지자 3 14일에 항복했다.

일부는 영국군 앞에 무기를 던지며 더 이상 란지트 싱은 없다고 울부짖었다. 영국군은 시크군의 당당한 태도를 존중했다.

무슬림은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고 영국은 펀잡지역을 합병해 인도전체를 완전히 차지했다.

 

영국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 2차 시크전쟁을 승리했다. 영국군의 지휘체계는 많은 문제점을 보였고 정찰이나 기병전력도 한심스러웠다. 영국은 고프의 자랑에도 불구하고 찰스 네피어Charles Napier로 교체했다.

고프는 1/2차 시크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많은 논란을 낳았고 귀국한 후에 의회의 박수를 받으며 은퇴해 귀족작위와 2,000파운드의 연금을 받았다. 그는 동인도회사에서도 같은 금액의 연금을 받았다.

콜린 캠벨은 펀잡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1854년 크림전쟁에서 맹활약을 한 후에 1857년 인도반란Indian Mutiny에서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칼사군은 1차 전쟁과 달리 비정규군이 많았고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마지막 운명을 맞이했다. 영국군은 칼사군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고 칼사군은 해체되었다. 영국은 바로 시크연대 5개를 모병했고 이후 인도에서 일어난 각종 반란에 시크연대를 투입했다. 시크연대는 영국군이 인도에서 보유한 원주민 부대 중 가장 용감하고 훈련이 잘 된 병력이었다. 




시크군은 1/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의 귀중한 전력 중 하나였습니다. 두 번째 사진에서는 영연방군에서 제일 용맹스러운 구루카병과 시크병이 함께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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