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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잊혀진 비극, 바탁 학살 (1부)

by uesgi2003 2017. 2. 7.


제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온갖 반인류범죄에서 자유로운 국가가 없습니다. 터키역시 예외가 아닌데, 당시의 문명이나 철학이 지금과 다르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사과와 반성은 제대로 해야겠죠. 


잊혀진 비극, 바탁 학살 (1부)



학살이라는 말대신에 요즘에는 인종청소나 인종말살Genocide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데, 어떤 용어를 사용하던 역사는 대규모 살해의 연속이었다. 현대에 접어들어서도 참사는 끊이지 않고 있다. 현대역사의 첫번째 학살은 1915년 오스만제국의 일부인 아르메니아Armenia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876년 작은 불가리아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이 첫번째였다.


지배자인 오스만 투르크는 무슬림이었고 불가리아는 동방정교Eastern Orthodox였기 때문에 불가리아의 독립운동은 바로 성전으로 번졌다. 오스만의 술탄 압둘라지즈Abdulaziz의 군대는 불가리아인 15,000명을 죽였고 서방세계는 말로만 오스만을 비난했다.



무슬림 민병대를 피해 운좋게 피신한 시민과 독립군이 불타는 마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미국도 거의 관심이 없었고 1876625, 맥가한MacGahan이 바탁Batak에서 벌어진 참사를 처음으로 보도했다. 런던의 데일리뉴스 기자였던 그의 보도는 지금까지 남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기사에는 정치압박, 종교처형, 반인류범죄 등의 내용이 모두 담겨 있는데도 바탁학살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서냉전 으로 최근에 와서야 동유럽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고 율리안식과 그레고리식 달력의 혼선이 있었고 터키와 불가리아가 바탁을 서로 다르게 불렀던 이유때문이다.



왼쪽이 맥가한 기자입니다. 그의 기사는 http://www.attackingthedevil.co.uk/related/macgahan.php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스만이 이 지역을 합병하고 이슬람화에 주력하는 동안 차르제정 러시아가 종교, 인종과 정치이유로 발칸민족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16세기 말부터 비극의 무대가 마련되었다.

불가리아의 4월 봉기April Uprising50년 전에 벌어진 그리스 봉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여기에서 추방된 망명객이 루마니아 자치지역 수도인 부쿠레슈티Bucharest의 종교회의에 참석해 영감을 주었다.

18725, 망명단은 모스크바의 지원약속에 힘입어 불가리아 혁명중앙위원회Bulgarian Revolution Central Committee(BRCC)라는 망명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혁명지도자로 흐리스토 보텝Hristo Botev을 선택했다. 보텝은 공산주의자라고 해도 광적인 혁명가보다는 지식인에 가까웠다.



불가리아 바탁의 위치입니다. 



왼쪽이 보텝입니다.

 

BRCC는 다뉴브 강 건너의 지우르지우(지우르게보, Giurgevo)에 사령부를 차렸다. 불가리아에서는 페리를 타고 건너갈 수 있었다. 중앙위원은 조직력이 부족했고 1875년 대중봉기에서 그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9월부터 시작된 첫번째 움직임은 순식간에 김이 빠졌다. 이듬해 봄에 다시 봉기를 일으키기로 하고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4개 지역으로 나누었다. 각 지역의 지도자를 사도Apostles라고 불렀는데 1873년에 처형된 동방정교 승려 바실 렙스키Vasil Levski를 추앙하는 의미였다. 사도 중에는 게오르기 벤콥스키Georgi BenKovski가 가장 현실적이었다.

 

이스탄불의 오스만 정부는 그렇지 않아도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봉기에 귀중한 군전력을 투입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지역의 무슬림 민병대가 진압임무를 맡게 되었는데 문제는 민병대의 군사훈련은 물론이고 명령체계가 없어서 통제력이 없었다.

불가리아인은 바쉬 바주크스Bashi-bazouks(정신나간 놈들)라고 부른 민병대는 오스만 제국의 온갖 추악한 임무를 수행했다. 각 지역에서 모인 다양한 민족이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여기에 참가했는데 그 중에는 불가리아인도 많았다.

이들은 오스만군대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와 말을 알아서 장만했고 약탈로 연명했다. 기본 무기는 몽골족이 전한 굽은 칼인 야타간Yatagan이었다. 변절자들이 항상 그러듯이, 무슬림 개종자 민병대는 그 누구보다 기독교 동족을 혐오했다.



지금도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소수민족에게 자행되는 민병대의 광기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성이 광기의 주요 목표였습니다. 

 

BRCC는 처음부터 아마추어의 실수를 거듭했다. 먼저 그들은 기밀을 유지하지 않고 흥미를 보이는 모든 사람을 회의에 초대했고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사상논쟁에 시간을 더 보냈다. 결국 구체적인 군사명령체계를 만들지 못했고 각 지역의 사도가 알아서 위원과 지휘관을 임명했다.

지우르지우의 사령부는 각 지역을 조율하고 연합시키지 못한 결정적인 패착을 두었다. 각 지역은 1876513일 봉기여부에 대해서도 각자 알아서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독립군의 준비상황도 너무 심각했다. 그들의 애국심만으로는 오스만 민병대의 현대식 총과 대포에 맞설 수 없었다.

 

독립군은 농부, 교사와 신부가 대부분이었고 군복대신에 전통적인 불가리아식 짧은 자켓, 펑퍼짐한 판탈롱, 농촌 블라우스, 허리띠, 가죽 띠로 묶는 레깅스를 착용했다. 머리에는 오스만 민병대와 같은 펠트 모자를 썼다. 민병대와 너무 비슷해서 모자에 새 깃털을 꽂고 사자 앰블렘을 달아서 구분했다.

독립군은 장기전에 대비할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서 주변에서 긁어 모아야 했고 러시아는 자처하던 수호자 역할에서 물러나 응원만 할 뿐이고 실제 도움은 주지 않았다.

 

독립군은 체트닉스Chetniks라는 지원병의 체타Cheta(지역공동체) 단위로 구성되었다. 체트닉스는 소총, 검이나 단검, 권총과 총탄 모두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심지어 거대한 낫Scythe를 들고 나타난 농부도 있었고 총탄을 만들기 위해 마을의 모든 납을 뒤지기도 했다.



폴란드의 독립투쟁에서도 등장하는 추수용 낫입니다. 게임에서는 그럴듯하지만 전투무기로는 오히려 작은 낫이 더 효과적일겁니다.


사령부는 암시장에서 대포를 구입해 민병대에 맞서려고 했지만 구하지 못했고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주조공장과 기술 모두 턱없이 열악해서 중세시대의 원시적인 대포가 고작이었고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2~3발만 발사하면 포신이 터졌고 주변의 사람이 다쳤다. 독립군이 민병대에 밀리지 않은 것은 부대깃발이 전부였다.



불가리아에 사자가 있었나요? 어쨌든 독립군은 사자문양을 상징으로 삼았고 이 깃발은 '자유아니면 죽음'이라는 의지를 새겨넣었습니다.

 

BRCC는 남과 북의 산악 요새거점 두 곳을 집결지로 골랐다. 일단 봉기를 시작하면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에서 지원병이 대거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다. 사령부는 이스탄불과 연결된 철로와 전신을 끊고 적을 도시와 마을에서 몰아낸다는 무척 허황된 전략을 세웠다. 심지어 오스만 수비대가 있는 마을은 아예 통째로 불을 지른다는 전술을 선택해 오히려 동족의 심한 반발을 샀다.

군자금, 전략거점, 도피처 등이 없었기 때문에 BRCC는 초반에 모든 승부를 걸었다.

 

무장봉기의 기본인 기밀유지가 안되어서 오스만 관리가 이미 정보를 입수했고 산악경비대가 코프립시티차Koprivshitatsa로 들어가 지역 지도자를 체포하려고 했다. 토도르 카블레시콥Todor Kableshkov은 약속된 봉기일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일을 벌이기로 했다.

독립군은 경찰서를 습격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지역 지도자에게 봉기시작을 알렸다. 봉기시작을 알리는 편지에 죽은 경찰의 피로 서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피 편지는 곧바로 사도 게오르기 벤콥스키Gerogi Benkovski(사진 참조) 손에 들어갔다. 군사재능이 있었던 그는 지역 독립군을 모아 닥치는 대로 주변의 오스만인을 죽였다. 200명의 기병을 모아 다른 마을로 향했는데 구체적인 목적지도 없이 일단 출발부터 했다.



 

독립군의 승리소식이 퍼지면서 불가리아 전체가 들썩였지만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이었다. 오스만 관리가 입수한 정보보다 10일이나 먼저 봉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오스만 수비대를 기습한 효과가 있었던 반면에 나머지 지역은 그 기세를 따라잡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었다.

그리고 사령부가 암시장에서 주문한 현대식 무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오스만 관리가 주요 도로를 이미 차단했기 때문에 기대했던 외국 지원병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벤콥스키의 기병대가 주력부대가 되었는데 전투를 거듭할수록 늘어가는 빈자리를 채울 지원병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령부와 지역 사도의 어설픈 준비로 불가리아 전체에서 겨우 저 정도 지역만 봉기에 참여했습니다.

 

오스만 수비대는 기습충격에서 바로 벗어났다. 민병대가 동원되었고 이스탄불은 전신을 복구하고 정규군을 이동시켰다. 독립군은 오스만군은 물론이고 민병대의 상대도 되지 못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내려 독립군의 화약과 군수품이 상당부분 유실되었다.

민병대는 무자비한 진압을 펼쳤고 독립군은 민병대에게서 고향을 지킬 힘이 없었다. 시민과 독립군 모두 북부 산악지대의 엘레지크Eledjik로 피신했다. 민병대는 추격에 나서 그 일대를 포위하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모두 죽이거나 체포했다. 독립군은 용감하게 마지막까지 맞서 불가리아의 알라모Alamo라는 성지를 남겼다.



 

그렇지만 바탁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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