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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리슐리외의 등장

by uesgi2003 2017. 3. 5.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리슐리외의 등장


발렌슈타인의 실패는 독일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독일의 다른 도시가 슈트랄준트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슈트랄준트는 황제수비대의 주둔을 거부하고 개신교와 자유를 지켜냈다. 페르디난트황제의 명령은 사제와 군대를 통한 통치였다. 슈트랄준트는 이런 형식의 강압보다는 외국과의 협력을 선택했다.

 

독일의 상황은 크게 변하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않았다. 슈트랄준트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항구도시 라 로셀La Rochelle이 외국함대와 병력의 지원을 받아 개신교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과 달리, 프랑스 중앙정부는 단순한 사제와 군대이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저항은 성공하지 못했다.

1625년,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다. 찰스는 약속을 어기고 영국 구교를 탄압한 데다가 영국전함이 프랑스 상선을 대거 나포해 루이는 몹시 화를 냈다. 찰스는 한 발 더 나아가 프랑스 개신교도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리슐리외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로셸항 입구를 가로막는 루이 요새를 허물겠다는 오래 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리슐리외는 요새를 허물고 위그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여 대외정책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루이는 이 의견을 받아들 일리가 없었고 리슐리외는 왕의 분노와 내전의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만 했다.

위그노 도시의 대표단이 영국대사 2명과 함께 평화협상을 제안했지만 루이는 요새를 허물라는 조건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다.

 

구교는 내전을 크게 반기며 왕에게 막대한 군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리슐리외는 사제단의 알현을 미루고 대신에 위그노Huguenot(프랑스 칼뱅파 개신교) 대표단과 왕의 회담을 주선해 가까스로 말뿐인 합의라도 이끌어냈다. 사제단의 마차가 왕궁에 들이닥쳤지만 이미 늦었다. 왕은 위그노가 충성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고 궁정은 위그노에게 요새를 허물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영국 왕이 문제였다. 그는 루이에게 영국이 바라는 그대로 독일내전에 참전하라고 요구했고 위그노 수호자를 노골적으로 자처했다. 루이는 당연히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루이의 의심은 다시 시작되었다. 외국은 간섭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영국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 남부의 위그노 도시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루이 요새는 결국 허물지 않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찰스는 루이의 태도변화에 크게 실망했고 다시 영국전함이 프랑스상선을 나포하면서 1627년 초반에는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7월, 영국함대가 병력을 태우고 로셸 앞에 나타나 섬에 상륙했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수비대는 항복조건을 내걸었다. 



그날 밤에 동풍이 불며 군수품을 가득 채운 프랑스 함대가 구원에 나섰다. 영국함대는 봉쇄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수비대는 다시 저항을 시작했다.

원정군 사령관 버킹햄Buckingham은 별 수 없이 몇 주를 보내며 본토의 지원군만 기다렸다. 찰스는 의회승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지원군을 보낼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역풍이 불어 함대가 출발도 못할 때에 프랑스 구원군이 섬에 상륙했고 영국 원정군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풀고 귀국했다.


 

이 정도가 되자 리슐리외와 루이는 완전히 한 몸이 되었다. 외국과 내통하는 프랑스 도시는 반드시 처벌해야 했다. 로셸 성벽 앞에 30,000명이 집결했고 로셸은 슈트랄준트와 같이 육로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11월 말부터는 영국의 해상지원을 봉쇄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로셸 앞바다에 선박을 침몰시켜 접근을 막았다. 구교에서 금고를 풀어 군자금을 지원했다.

1628년 5월, 겨울폭풍에도 중단하지 않은 공사가 마무리 되었고 때마침 나타난 영국함대는 그냥 선수를 돌려야했다.


 

로셸의 상황은 참담했다. 시장 장 귀통Jean Guiton은 여전히 의지를 꺾지 않았지만 나날이 항복을 원하는 시민이 늘어갔다. 그가 외출할 때에는 중무장한 병력이 호위를 해야 할 정도였다.

이제 소문으로 들리는 영국 원정군만이 희망이었다. 하원이 막대한 돈을 주고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을 샀고 찰스는 모처럼 자신의 생각대로 군대를 모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사령관 후보였던 커밍햄이 암살되었다.


 

커밍햄은 프랑스 원정실패로 대중의 신뢰를 완전히 잃은 상태였습니다. 왕과의 친분덕분에 요직에 중용되었는데, 육군중위 존 펠톤에게 살해당합니다. 존 펠톤은 자신의 불행을 영국정부와 커밍햄의 무능과 부패라고 생각하고 그를 살해했습니다.

 

9월, 찰스가 그렇게 바라던 영국함대가 프랑스로 건너갔지만 조금의 도움도 주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로셸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11월 1일, 왕은 성문 안에 들어섰고 프랑스 도시의 독립시도는 완전히 끝났다.

찰스는 구스타브 아돌푸스Gustavus Adolphus는 말할 것도 없고 크리스티앙Christian 4세 근처도 가지 못했다. 영국 자체도 내전의 소용돌이 때문에 스웨덴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리슐리외는 성공하고 발렌슈타인은 실패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슐리외는 발렌슈타인과 달리 국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군대는 규율잡힌 정규군이었고 국민은 중과세의 고통을 참고 견뎠다. 그리고 리슐리외는 종교전쟁의 기치를 들지 않아 로셸과 다른 위그노 도시의 연합을 막았다.

슈트랄준트는 자신들에게 독일 개신교 전체의 운명이 걸린 것을 알고 있었지만 로셸은 프랑스 개신교 전체와 공감대를 이루지 못했다.



 

루이는 로셸의 모든 권리를 취소하며 성벽을 허물고 교회를 구교로 넘겼다. 리슐리외의 중재로 선왕이 인정했던 종교의 자유는 건드리지 않았다. 도시 안에는 왕의 군대 외에는 다른 구교 군대를 들이지 않았다.

왕의 절대권력에 감히 도전할 도시가 없었다. 이렇게 프랑스는 다른 국가보다 강력해졌고 구교와 위그노가 분열하지 않는 한은 프랑스에 도전할 외국세력도 사라졌다. 프랑스는 이미 영국의 간섭을 물리쳤고 스페인과도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제는 독일내정에 발을 들여 놓을 차례였다.

 

독일에서는 슈트랄준트의 뒤를 따르는 도시가 나왔다. 영국수비대의 도움을 받던 슈타데Stade는 4월에 틸리에게 성문을 열었지만 글뤼크슈타트GluckStadt는 여전히 저항 중이었다. 발렌슈타인이 틸리를 손수 지원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덴마크전함이 해로를 열었고 발렌슈타인은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1629년 1월, 수비대가 몰려 나와 공성군의 진지를 뒤엎었다.

발렌슈타인은 덴마크와의 평화협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스웨덴과 덴마크군 모두를 상대하기 보다는 스웨덴만 상대하는 것이 쉬웠다. 다행히도 크리스티앙도 이 생각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1629년 5월 22일, 덴마크군은 황제군과의 전투를 포기했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영지(유틀란트 등)를 모두 돌려 받는 대신에 제국내에 가지고 있던 모든 대주교구를 포기했다. 그리고 저지대 작센에 더 이상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구스파브는 1629년 2월에 크리스티앙을 만나 스웨덴군을 주력으로 덴마크-스웨덴 연합군을 만들고 자신이 사령관을 맡아 독일원정에 나서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습니다.

황제군은 뤼베크Lubeck 조약에 덴마크가 신교군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넣지 못하고 다급한 평화협상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뤼베크조약으로 큰 힘을 얻었지만 루이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여전히 외국세력의 간섭을 몰아내지 못했고 독일국민의 공포나 저항을 진정시키지도 못했다. 더구나 막시밀리안과 구교 사제가 발렌슈타인에 대해 가진 반목을 풀지 못했다. 중심역할을 해야 할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입지를 보존한 상태에서 군대와 사제 모두를 달랬다는 정도에 만족했다.

페르디난트는 조약서명 후에 가장 먼저 발렌슈타인에게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공작직위를 주었다. 귀족과 영주는 특권을 침해당했다며 분노했다.

 

사실 뤼베크조약은 대세에 지장이 없었다. 페르디난트는 조약에 앞서 1629년 3월 29일에 이미 회복령Edict of Restitution이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독일남부에서의 긍정적인 상황변화에 고무된 그는 북부 개신교 영지를 간단한 서명 하나로 뒤바꾸려고 했다.

마그데부르크와 브레멘 대주교구, 민덴, 베르덴, 할버슈타트, 뤼베크, 라체부르크, 미스니아, 메르세부르크, 나움부르크, 브란덴부르크, 바헬베르크, 레부스와 카민 주교구, 120개의 교구를 가톨릭 사제교구로 만들었다.

 

 

리슐리외의 최우선 목표는 독일이 아니라 스페인이었지만 결국에는 신성로마제국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의 만토바Mantua와 몽페하Montferrat공작이 후계자없이 죽으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혈통의 느베르Nevers공작이 그나마 후계자 후보였는데, 스페인은 밀라노Milan부근에 프랑스 혈통을 두고 싶지 않았다.

스페인은 다른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페르디난트가 그 영지를 압류하라고 요구했다. 리슐리외가 로셀에 발목을 잡힌 동안, 스페인군은 만토바를 점령했고 사부아Savoy공작은 스페인을 적대하던 태도를 바꿔 스페인을 도와 느베르공작을 공격했다.



붉은 원이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과 이탈리아 영주국의 각축장이었습니다. 

 

스페인이 황제의 이름을 빌어 이탈리아 내정에 간섭하자 독일 팔츠를 공격했던 것보다 훨씬 큰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의 경우 그래도 황제라는 이름은 법과 질서를 의미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황제는 오히려 반감을 사는 외국세력일 뿐이었다.

이탈리아 귀족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베니스와 교황은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고 1629년 3월에 리슐리외는 루이를 앞세워 알프스를 넘어 사부아를 토벌하고 스페인군의 느베르 포위망을 풀었다.

 

리슐리외는 이탈리아에 본격적으로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로셀봉기를 시작했던 수비스Soubise의 형제인 로한Rohan공작은 랑그도크Languedoc와 쎄벤느Cevennes의 위그노 봉기를 선동했다. 이들은 로셀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스페인에 도움을 청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스페인군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리슐리외는 급히 귀국해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고 무자비하게 남부의 봉기를 진압했다. 이번에도 종교자유는 보장하되 정치자유는 철저하게 진압했다.

 

리슐리외는 다시 이탈리아로 향했다. 1629년 여름, 프랑스군 20,000명은 알프스를 넘어 만토바를 포위했다. 독일에서 한숨돌린 페르디난트는 이탈리아 전투에 참전할 수 있다고 오판했다. 스피놀라가 20,000명을 동원한 후에 카살레 공격을 권유했다.

1630년 봄, 리슡리외는 다시 이탈리아에 들어섰다. 추기경인 동시에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스페인군을 상대하지 않고 사부아공을 먼저 공격했다. 알프스 협로를 장악한 후에 피에몬테Piedmont를 점령하고 카살레 구원에 나서 스페인군의 포위망을 풀었다. 그렇지만 리슐리외는 여우와 같이 교활했다. 만토바를 무리해서 탐내지 않고 당분간은 스페인과 황제의 손에 남겨두었다.



프랑스의 카살레 포위그림입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군을 정면상대할 단계가 아니었다. 대신에 외국 주둔군부터 무너트리기로 했다. 네덜란드 개신교진영은 이탈리아전쟁으로 스페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에 나서 브라반트 북부를 합병했다.

북부에서는 구스타브가 폴란드와 평화협상을 끝내고 독일참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사절단이 구스타브를 방문해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했다.

리슐리외는 스웨덴을 부추기는 동시에 스웨덴의 확장을 견제했다. 구스타브가 스페인전력을 다시 네덜란드로 끌어들이는 정도면 충분했고 그 이상의 성공은 바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