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덴마크군의 패배와 만스펠트의 죽음

by uesgi2003 2016. 10. 23.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덴마크군의 패배와 만스펠트의 죽음


1625 1, 두 왕에게서 답변이 도착했다. 구스타브는  만스펠트처럼 약탈로 연명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요구한 50,000명 중 17,000명 급여를 영국이 지불해 달라고 했다. 처음 4개월치 급여가 도착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고 했다

크리스티앙의 생각은 훨씬 관대했다. 30,000명이면 충분하고 영국은 6,000명만 책임지면 되었다. 제임스와 찰스는 당연히 덴마크 제안을 받아들였다. 6,000명 급여도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아직 의회가 군비지출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지만 스웨덴의 제안보다는 훨씬 부담이 적었다. 그리고 일단 원정이 시작되면 스웨덴도 어느 정도는 힘을 보탤 것으로 기대했다.

 

구스타브는 영국의 중재안을 거부했다. 그는 크리스티앙뿐만 아니라 다른 연합국을 믿지 않았다. 설득하려는 영국대사에게서로 다른 생각인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스페인과 로마가톨릭 연합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영광도 그의 몫으로 넘기겠소라고 대답했다.

구스타브는 바로 폴란드와의 전장으로 향했는데 지기스문트가 나중의 원정에서 걸림돌이 되지 않게 미리 처리하고 싶었다.

 

크리스티앙의 제안이 실행에 옮겨졌다. 제임스가 3월에 죽고 2개월 후에 찰스 1세가 매달 30,000파운드 지원을 약속하며 초기 군자금 46,000파운드를 모았다. 만스펠트는 라인강을 따라 팔츠로 들어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덴마크로 향했다.

그렇지만 독일이 과연 크리스티앙을 지지할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저지대 작센은 크리스티앙을 지휘관으로 받아들였지만 반대 의견도 못지 않았다. 상인계급은 아직 황제의 위협을 피부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종교전쟁을 영주의 문제로 생각했다.

7 18, 틸리가 저지대 작센으로 들어오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1596년, 크리스티앙의 즉위식 모습인데 30년 전쟁 참전 당시에는 나이가 들어 젊을 때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페르디난트와 궁정은 틸리만으로 승리를 거두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황제의 권력은 탄탄해졌지만 반대로 동맹은 점차 줄어들었다. 1620년 동맹 중에서 가톨릭동맹만 여전했고 스페인은 브레다 공성전으로 탈진해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스페인은 전쟁보다는 작센 선거후를 달래고 교황을 통해 루터파 대신에 칼뱅파를 공격했다.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덴마크왕에 합류하지 않았는데 작센의 영주는 가톨릭과의 협정을 준수하고 프리드리히왕은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황제가 개신교의 주교구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군 편을 들 수도 없었다.

 

황제 진영은 줄어든 반면에 적은 더 늘어났다. 크리스티앙 4세는 프리드리히보다 막강했고 베슬렌 가블러는 1622년 평화조약을 깨고 다시 동쪽을 위협했다. 프랑스가 내일 당장 참전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틸리군 외에 병력이 더 필요했지만 황궁의 금고는 텅비어서 1개 연대도 고용하지 힘들 정도였다.

어느 날 갑자기 신하 중 한 명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보헤미아의 쇠락한 귀족가문에서 발트슈타인Waldstein의 발렌슈타인Wallenstein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나타났다. 루터파였던 부모가 12세에 죽었고 삼촌이 엄격한 교육을 맡기면서 예수회로 개종했다. 그렇지만 무교에 가까웠고 점성술에 의지했다.



발렌슈타인의 최후에 대한 그림인데 스포이니까 잠시 미루도록 하죠.

 

점성술에 심취한 그는, 하늘이 자신을 점지했다고 믿었고 결혼으로 큰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전쟁이 터지자 황제에 저항하는 모라비아Moravia 영주군의 연대 하나를 지휘했다. 군자금을 탈취한 후에 위험을 무릅쓰고 빈으로 달려갔지만 황제는 명예를 지킨다며 군자금을 다시 저항군에게 돌려보냈다.

모라비아군은 발렌슈타인을 노골적으로 욕했지만 이 사건으로 그의 이름이 황궁에도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발렌슈타인은 가톨릭연합군에 참가해 명성을 높였다.

 

황제의 지위가 확고해지자 발렌슈타인도 세력을 크게 넓혔다. 페르디난트는 정치와 군사 모두에서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쓰지 못했다. 발렌슈타인은 그 덕분에 자신의 몫으로 패배한 영주의 영지를 챙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헐값에 영지를 사들였다. 얼마 안가 보헤미아에서 가장 큰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발렌슈타인은 다시 곤경에 처한 황제에게 병력지원을 자원하고 나섰다. 황제가 군자금을 지원할 필요가 없었고 약탈 때문에 원성을 사지 않아도 되는 최고의 병력이었다. 약탈이나 외부의 지원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만스펠트의 경우와 정 반대였다.

그가 2~50,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그가 최대한 많은 병력을 동원한 것은 사실이다.

 

발렌슈타인은 틸리의 지원요청을 냉정하게 거부하며 덴마크군과의 전투에만 집중했다. 자신이 힘들고 모으고 무장시킨 병력을 소모전에 투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계산에 따라 움직였다.

자질만 충분하다면 종교를 묻지 않았고 미천한 가문출신의 지휘관도 채용했다. 전공을 따져 명예와 보상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보인 사람을 중용했다.

발렌슈타인은 독일에 연고가 없었고 황제와도 별다른 연고가 없었다. 그는 보헤미아, 슬라브족 출신이었다. 이제 독일내전은 틸리, 발렌슈타인, 크리스티앙과 구스타프 등의 외국인이 주도하는 국제전이 되었다.

 

겨울내내 평화협상이 벌어졌지만 황제와 가톨릭동맹은 이전의 협상조건에서 더 이상 양보하지 않았다. 개신교 행정관을 보장하는 것은 양심에 어긋났다. 저지대 작센 영주도 물러서지 않았다.

황제와 궁정은 겉으로는 공정한 척 했지만 분쟁은 늘 가톨릭에 유리하게 결정했다. 덴마크왕과 개신교 영주는 개신교 영지의 종교자유를 보장하라며 황제의 조건을 거부했다.

 

1626년 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번에는 가톨릭 진영이 훨씬 유리했다. 발렌슈타인의 병력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불어났다. 그와 틸리는 개신교의 60,000명을 상대로 70,000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개신교 진영은, 덴마크 크리스티앙, 만스펠트, 브룬스비크의 크리스티앙, 요한 에르네스트John Ernest, 베슬렌 가블러가 주축이었다.

틸리와 발렌슈타인은 주변에 신경 쓸 영주나 도시가 없어서 상당히 자유로웠던 반면에 크리스티앙은 많은 시어머니와 군자금 조달에 시달렸다.

 

영국의 찰스 1세는 크리스티앙에게 매달 30,000 파운드 지원을 약속했지만 의회는 멀리 떨어진 독일내전에 영국의 국고를 쓰고 싶지 않았다. 겨우 140,000 파운드 지출만 합의하고 의회가 해산되었고 왕이 약속한 1,000,000 파운드는 사라졌다.

다급해진 영국대사가 네덜란드로 건너가 매달 5,000 파운드 지원을 받아내고 다시 의회를 열어 국고지출을 요구했다. 의회는 오히려 더 강경한 태도를 보여 겨우 46,000 파운드만 지출했고 찰스가 덴마크로 보낸 유일한 군자금 지원이었다.

 

크리스티앙과 연합군은 1621년과 1622년 만스펠트가 겪은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전략목표가 아니라 군수품이 최우선 목표가 될 판이었다.

첫 번째 고난은 만스펠트를 덥쳤다. 엘베 강 부근에서 겨울을 보내고 브란덴부르크 선거후 영지에서 잠시 머물다가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마주쳤다. 발렌슈타인군을 막을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가 틸리에게 향하게 내버려둘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발렌슈타인은 야전을 상당히 싫어했다. 특히 신병이 많은 경우에는 더더욱 야전을 기피했다. 그는 엘베강의 데사우Dessau다리를 장악하고 요새화시킨 후에 만스펠트의 대응을 기다렸다.

 

4 25, 만스펠트가 나타났다. 만스펠트군은 진지에 틀어박힌 발렌슈타인군에게 달려들었다가 피해만 입었다. 기회를 옅보면 발렌슈타인은 역습을 명령했고 대승을 거뒀다.

만스펠트의 참패만으로도 부족해서 브룬스비크의 크리스티앙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덴마크군이 단독으로 가톨릭동맹군을 상대해야 할 판이었다. 만스펠트는 바이마르Weimar의 요한 에르네스트 병력을 받아 슐레지아Silesia로 달려가 베슬렌 가블로와의 전선을 간신히 이었다.

발렌슈타인은 틸리에게 병력 일부를 떼어준 후에 나머지를 이끌고 그 뒤를 추격했다.


 

만스펠트도 데사우다리를 노렸지만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선봉부대를 얕잡아 본 만스펠트는 계속 돌파하려고 하다가 실패했고 발렌슈타인의 본대가 도착하면서 참패를 당했습니다. 만스펠트는 12,000명 중 최소한 4,000명 이상을 잃었고 발렌슈타인은 20,000 2,000명을 잃었습니다.

 

덴마크왕의 처지가 난감해졌다. 영국의 군자금은 도착하지 않았고 병력은 굶주려 폭동직전이었다.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는 기세를 몰아 튀링겐Thuringia을 돌파해 보헤미아로 들어가서 베슬렌 가블로, 만스펠트군과 개신교 연합군 진영을 확실히 다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틸리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8 27, 그는 덴마크군을 따라 잡았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격전 중에 급여를 받지 못한 병사들이 먼저 전투를 포기했다. 크리스티앙은 전장에서 도망쳤고 영국왕이 약속만 지켰다면 승리를 거뒀을 것이라고 불평했다.




 

크리스티앙은 발렌슈타인이 만스펠트를 추격한 틈을 타서 틸리군에게 7월 말부터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덴마크군이 계속 남진하자 발렌슈타인도 틸리의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4,300명을 지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치고 굶주린 연합군은 숫자가 크게 불어난 틸리군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폭우가 쏟아져 퇴로 막히자 루터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크리스티앙은 유리한 지형을 틸리에게 내준데 다가 22문의 포 중에서 겨우 2문만 전투에 사용했습니다. 

압도적인 지원포격을 등에 업고 한 연대가 덴마크-저지대 작센군의 중간을 끊었고 크리스티앙의 반격명령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틸리는 기병을 투입해 전투를 마무리지었고 크리스티앙 친위대만이 버티다가 전멸당했고 나머지 병력은 북쪽으로 달아났습니다. 

크리스티앙은 말을 네 마리나 잃어가며 친위기병대와 달아났습니다. 

덴마크 연합군은 20,000 명 중 절반에 가까운 병력을 잃었고 틸리는 20,000명 중 1,000명도 안되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루터전투는 가톨릭 진영에 독으로 작용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개신교 영주에게 더욱 가혹한 복구령을 선포했고 결국에는 스웨덴의 구스타프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발렌슈타인이 헝가리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만스펠트가 베슬렌 가볼리와 합류한 후였다. 발렌슈타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방어전술을 선택했다. 유리한 지형을 요새화시킨 후에 적의 움직임을 기다렸다. 

베슬렌 가볼리는 오스만 투르크군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호응이 없었다. 그는 데사우다리의 참패를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평화협상을 벌였고 만스펠트를 헝가리에서 추방하라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만스펠트는 베니스로 가던 중에 중병에 걸렸다. 온갖 역경을 헤쳐 온 모험가답게 자신을 일으켜달라고 부탁한 후에나는 이제 죽네라는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단결하라, 단결하라. 남자답게 버텨라는 말을 되뇌였다. 

그렇지만 그의 죽음덕분에 개신교진영은 큰 골칫거리를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