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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덴마크와 스웨덴 참전

by uesgi2003 2016. 10. 13.


미대선 이야기에, 여러 커뮤니티의 하이파이 초보조언까지 여러 일에 신경쓰다 보니 정작 제 역사이야기는 많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이제 스웨덴의 절대영웅 구스타브 아돌프가 등장합니다. 이 양반에 대해 설명하려면 책 한 권 분량이 또 나올텐데, 그냥 무시하고 최대한 속도를 내겠습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덴마크와 스웨덴 참전



제임스왕은 프랑스에게 먼저 접근했다. 독일내전이 국제전으로 번졌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달리 신구교의 갈등이 심각했다. 국가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종교자유를 얼마나 허용할 것인지가 문젯거리였다.

영국은 종교보다 국가정체성이 훨씬 중요했다. 독일은 정 반대였다. 구교와 신교영지를 어떻게 갈라 놓을 것인지가 더 중요했다. 프랑스도 독일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낭트Nantes칙령으로 귀족가문, 도시와 마을이 종교자유를 얻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국가정체성이 약하고 독일보다는 강한 중간이었다.

낭트칙령으로 위그노Huguenot라고 부르는 신교도는 왕실군 대신에 사병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왕권에서 독립한 셈이었다.


개신교에게 사실상의 자치권을 인정한 낭트칙령 원본입니다.

 

루이 13세(그림 참조)의 초기는 모든 것이 와해되는 것처럼 보였다. 선왕의 강력한 힘이 사라지자 마자 귀족 일부는 아예 왕권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노골적으로 충성의 대가를 기대했다귀족에게 눌려 지내던 젊은 루이는 위그노 도시의 특권에 분노를 터트렸다. 군대를 모아 그들에게 왕권을 제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궁정에는 이미 위그노 관용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는 목소리가 흘러 넘쳤고 왕의 결정은 큰 힘을 얻었다. 루이 자신도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다.


 

루이는 페르디난트보다 시야가 넓었다. 독일에서 내전이 터지자 프랑스 대사는 즉시 막시밀리안이 보헤미아에 진군할 수 있게 도왔다. 그렇지만 1622년에 팔츠가 함락되자 루이는 다른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왕가가 승리를 거두면 프랑스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스페인은 오래 전부터 피레네Pyrenees산맥너머, 나폴리, 밀라노, 프랑슈콤테Franche Comté, 네덜란드까지 손아귀에 넣었다. 이제는 프랑켄탈과 팔츠서부에도 군대를 주둔시켰고 다시 한 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루이는 위그노가 문제가 아니었다. 1622년에 위그노와 협상을 한 그는 만스펠트에게 약간의 병력을 보탰다. 1624년에는 리슐리외Richelieu추기경을 재상으로 불러들였다.



라로셸 공성전의 리슐리외 재상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 하나입니다. 

리슐리외는 삼총사에서 악마의 화신처럼 묘사되었습니다만 프랑스 왕권과 국력을 크게 강화시킨 명재상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추기경이었는데도 프랑스 국익을 위해 신교국가와 연합하고 가톨릭 기둥인 스페인을 견제했습니다. 

위그노가 농성 중인 라로셸을 포위하던 중에 위그노를 지원하는 영국함대의 접근을 막기 위해 거대한 목책을 세우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라로셸은 1627년 9월부터 1628년 10월까지 1년이 넘게 농성했고 30,000명의 시민 대부분이 아사 또는 병사해 국왕군에 항복할 때에는 5,000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루이는 국내에서는 위그노를 탄압해 절대권력을 입증하고 국외에서는 오스트리아 왕가의 세력확장을 막아야 했다. 리슐리외는 왕의 뜻을 받들어 위그노반란을 진압하면서도 종교자유를 보장해 구교와 신교의 갈등을 봉합해 프랑스의 분열을 막아야 했다.

리슐리외의 첫번째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는 루이를 설득해 동생과 영국 웨일스공의 정략결혼을 본격적으로 서둘렀지만 영국 가톨릭교도의 자유조건이 보장되지 않아 난항을 겪었다.

결국 두 왕가의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영국은 프랑스 위그노 지원을 위해 라로셸에 함대를 파병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임스와 찰스(웨일스 공)왕은 프랑스가 팔츠수복에 힘을 보태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루이와 리슐리외는 거부했다. 루이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였고 가톨릭 수호를 선포한 왕가를 상대로 선전포고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프랑스 왕으로서 가톨릭진영에는 참전하지 않는 대신에 신교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했다. 네덜란드에 막대한 자금을 약속했고 만스펠트와 영국원정군이 프랑스 영토를 통과해 팔츠를 공격할 수 있게 허락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발테리나Valtelline계곡에 군대를 보내 스페인군이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이동할 교통로를 차단했다. 리슐리외는 나중에 독일 상황이 바뀌었다며 만스펠트군의 영토통과를 거부했다.

 

제임스왕은 프랑스의 태도변경에 대해 항의했다. 결국 만스펠트원정군은 네덜란드 해안으로 직접 항해한 후에 영국보병 12,000명과 프랑스기병 2,000명을 이끌고 팔츠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제임스가 프랑스와의 결혼에 동의한 조건을 미리 의회에 알리지 않았고 의회는 제임스의 자금요청에 동의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추운 땅에 상륙한 원정군은 군수품지원을 받지 못한 채로 한겨울에 죽어갔다.

살아 남은 병력으로는 포위된 브레다Breda를 구원할 수도 없었고 독일국경을 넘어 팔츠로 진군할 수도 없었다.

 

1625, 리슐리외는 이탈리아 공략강도를 높였다. 베니스와 사부아Savoy와 동맹을 맺어 발렌티나를 점령한 후에 사부아에 지원군을 보내 스페인 동맹국인 제노바를 점령했다. 밀라노에서 스페인군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국내의 위그노 문제가 크게 터졌다. 국왕과 재상의 엄호를 받은 구교도가 신교영지를 침입하기 시작했고 낭트칙령은 공공연하게 지켜지지 않았다. 함대까지 보유했던 위그노 귀족 쑤비스Soubise는 브리타니Brittany에 정박해 있던 왕실 전함을 공격해 끌고가는 대형사고를 저질렀다.

 

대형 상업도시 라로셸La Rochelle(지도 참조)로 들어간 그는 신교시민이 뜻을 함께 한다며 왕을 상대로 사실상 전쟁을 선포했다.

독일내전을 틈타 스페인을 상대하려던 리슐리외의 계획은 일단 중단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용해 전함을 빌렸고 문제의 발단인 쑤비스를 영국으로 달아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로셀로와 위그노 시민은 항전을 계속했다. 페르디난트는 이 덕분에 독일내전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국내문제로 발목을 잡히고, 영국은 과도한 약속으로 헤매는 동안, 덴마크와 스웨덴은 자국으로 점차 다가오는 독일내전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앙 4세(그림 참조)는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홀슈타인Holstein 영주이기도 했던 그는 작센 저지대 연합의 일원이었고 북해 해안을 오랜 동안 노리고 있었다. 글룩슈타트Glückstadt에 요새를 세워 함부르크의 상업통행을 막았고 아들 한 명은 베르뎅의 주교구를 얻은 후에 브레멘의 대주교구도 손에 넣었다.


 

그는 종교분쟁을 이용해 북해로 이어지는 독일 강을 장악해 덴마크제국을 만들고 싶었다. 다른 루터파 지도자처럼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원정을 완강히 비난했다. 프리드리히가 달아나자, 황제의 보복으로부터 개신교를 보호하려던 차에 영국 제임스에게서 팔츠 공동방어 제안이 들어왔다.

영국과 덴마크가 실제로 움직였다면 만스펠트의 만행도 줄어들었을 것이고 팔츠는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군사행동보다 중재를 우선했고 실망한 크리스티앙은 팔츠를 내버려두었다.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입지가 처음과 달리 확고해지면서 덴마크도 다른 주변국가처럼 황제의 힘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스웨덴왕 구스타브 아돌프Gustavus Adolphus(그림 참조)는 문무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열정과 도전을 즐기는 보기 드문 지도자였다.

1611년 왕좌에 올랐을 때에 덴마크군이 침공해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2년만에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협상을 마무리 지었고 1617년에는 발트해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는 이제 우리 허락없이는 단 한 척도 발트해를 지나지 못한다고 선포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러시아보다 더 강력한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촌인 폴란드왕 지기스문트Sigismund(14세기 신성로마제국황제와 동명이인)는 스웨덴왕위에서 밀려난 데다가 가톨릭교도로, 구스타브가 스웨덴왕위를 불법점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PC 게임 문명을 즐긴 사람은 아! 하고 탄식할 바로 그 분입니다. 


 

러시아와 휴전하자 마자 폴란드와 전쟁이 벌어졌다. 입지가 단단해진 페르디난트는 매형인 지기스문트의 스웨덴 원정을 지지하고 있었고 구스타브도 독일인 어머니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독일에 관심이 많았다.

1618년 여름, 베를린을 몰래 방문한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거후의 딸 마리아 엘레오노라의 마음을 얻어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다시 철저히 신분을 숨기고 하이델베르크까지 여행한 그는 춥고 황량한 본토와 완전히 다른, 비옥한 라인강 계곡을 직접 확인하고는 독일 영토에 욕심을 냈다.

그는 귀국한 후에 대단한 열정으로 폴란드를 상대했다. 1621, 리가Riga를 함락시키고 1622년에는 폴란드에게서 휴전협상을 받아냈다.

 

1624, 신성로마제국은 이제 스웨덴의 영토와 종교에 거대한 위협으로 발전했다. 덴마크왕과 달리, 구스파브는 프리드리히의 보헤미아 원정에 별 기대는 하지 않았어도 내심 지지했었다. 이제 황제군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메클렌부르크Mecklenburg와 포메라니아Pomerania 해안까지 장악하면 발트해도 위험해졌다. 그대로 두면 러시아와 폴란드에게서 힘들어 빼앗은 모든 것이 사라질 판이었다.

 

16248, 영국대사 로버트 안스트루더Robert Anstruther는 덴마크왕에게, 제임스 스펜스James Spens는 스웨덴왕에게 향했다. 두 대사는 양국이 팔츠수복전에 동참하고 독일을 내전발발 이전으로 되돌려 놓자는 제안을 가지고 갔다.

안스트루더는 작센 저지대 영주들을 차례로 방문해 우호적인 답변을 받은 후에 영국에 있던 만스펠트 원정군 소식과 함께 덴마크왕에게 전달했고 덴마크는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구스타브는 훨씬 신중했다. 신성로마제국이 불편한 모든 사람, 동쪽 헝가리왕 베슬렌 가블러부터 서쪽 프랑스왕 루이까지 모두 참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처남인 브란덴부르크 선거후 게오르크 빌헬름George William과도 참전에 대해 협의하고 있었다.

 

구스타브는 전쟁수행 방식에 대해서도 제안했다. 그는 총사령관, 상당한 병력과 군자금, 발트해와 북해의 항구 하나씩을 요구했다. 크리스티앙이 받아들인 말 뿐인 약속은 믿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식으로 가톨릭교도인 루이가 신교국가와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견제했다. 프랑스군은 자신이 이끌 순수 신교군과 멀리 떨어진 독일 남부나 이탈리아에서 참전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