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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동부전선 타이거 이야기 (11부) - 타이거 신화 (1)

by uesgi2003 2017. 7. 2.


타이거는 2차대전 수 많은 전차 중에 가장 유명하다. 동부전선 중반 그리고 서부전선 막판, 타이거 부대는 엄청난 활약을 했다. 타이거의 후속인 킹 타이거는 72년 전 당시의 공포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88mm 포의 막강한 화력과 두터운 장갑 덕분에 무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전사학자는 치명적인 내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미국 애버딘 전차박물관에서 88mm 포신 실물을 본 적이 있는데 대단했습니다.

아래 관통력은 철갑탄을 사용할 경우입니다. 88mm 포의 위력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포탄의 위력도 있으니까 그냥 재미로만 보시길.


독일군은 타이거의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정예 중전차부대를 선전에 이용하려고 중전차대대Panzer Abteilungen에 타이거를 집중시켰다. 중전차대대는 군이나 군단차원에 편성된 독립부대로 강력한 돌파력이나 위기를 봉합하는 소방수가 필요한 곳에 투입되었다.

중전차는 1938년 발터 폰 브루우지치Walter von Brauchitsch가 주장했는데 1939~1940년 공세에서 독일전차의 단점이 극명하게 노출되었다. 그렇지만 초반 공세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중전차개발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 덕분에 독일전차는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 초기부터 소련의 강력한 T-34 KV-1 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발터 폰 브루우지치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히틀러와 나치에 협조했습니다. 히틀러가 영국점령에 성공했다면 영국총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전후 전범으로 처형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다급해진 독일은 중전차개발에 박차를 가해 1942년 봄부터 타이거를 투입했다. 원래는 전차연대마다 중전차중대(타이거 9)를 편성하려고 했지만 타이거는 속도와 기동성을 우선하는 전차사단의 전략전술과 맞지 않았다.

타이거를 한 부대에 집중시키고 독립시켜 해결책을 찾았다. 기갑교도사단Panzer Lehr Division과 그로스도이칠란트Grossdeutschland장갑척탄사단, 2개 사단만 타이거 대대를 받았다.

원래 중전차대대는 3호전차 N형도 편성하기로 되어 있었다. 타이거가 적의 전차나 진지를 격파하고 3호전차는 75mm 단포신으로 보병이나 대전차포를 상대하는 역할분담이었다. D 편성이라고 불렀다.

타이거 대대는 타이거 9대와 3호전차 10대의 타이거 중대 3개로 편성되었고 여기에 대대참모 타이거 2대와 경소대 3호전차 5대를 더해서 타이거 29대와 3호전차 35대를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생산과 보급한계 때문에 2대 중대, 타이거 20대와 3호전차 25대 편성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43년에 신설된 기갑교도사단은 국방군 중 최정예전차사단이었지만 제공권을 완전히 잃은 후에 투입된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재편되었습니다. 

결국 루르포위망에서 미군에게 항복했습니다. 


 

1943 3, 실제 전투에서 이런 편성의 심각한 문제점이 밝혀졌다. 소련의 포수가 3호전차부터 노렸기 때문에 3호전차의 손실이 막대했다. 그리고 타이거의 생산량도 급증했기 때문에 급히 편성 E로 변경했다. 중전차대대는 순수 타이거만으로 편성하는 안으로 각 중대는 14대의 전차로 편성하고 참모중대는 3대로 편성했다.

당시 전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45대의 타이거 편성은 불가능했지만 새 중전차대대 편성은 이종의 전차를 혼합하는 것보다 전력과 보급 양면에서 훨씬 유리했다.

타이거 투입 초기에는 중전차 전술도 개발되지 않았고 전차병 훈련도 3~4호전차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극초기 중전차대대는 훈련과 전투경험을 모아 거꾸로 상부에 보고해 전술과 훈련개발을 도왔다.

훈련매뉴얼 타이거 입문서Tiger Fibel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1943 8월에 만들어진 이 매뉴얼은 어려운 기술내용을 재미있는 그림, 비유, 사진과 만화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실전을 치루면서 타이거는 장거리 포격전이나 매복전에서 88mm로 적 전차를 원거리 격파하는데 최고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Tiger Fibel은 설마? 할 정도로 파격적인 구성입니다. 



독일어 버전은 여기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lexikon-der-wehrmacht.de/Waffen/Merkblatt/Die_Tigerfiebel_Handbuch_des_deutschen_Tiger_Panzers_.pdf

 

타이거의 첫 데뷔전은 의외로 참담했다. 1942 9, 러시아 북부전선의 라도가Ladoga호 남쪽에 처음으로 4대가 투입되었는데 지형을 무시한 황당한 결정이었다. 진흙과 습지에 투입된 4대는 모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그 중 한대는 그대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다.

3개월 후, 라도가호, 미슈키노Mishkino와 크라스닐 보르Krasnyl Bor전투에 다시 중전차대대 502를 투입해 이번에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1943 3 19~31일 기간 동안, 타이거 4대와 3호전차 3대는 소련전차 48대를 격파하고 단 한대도 잃지 않았다.

1943 1 12~3 31, 중전차대대 502는 소련전차 160대를 격파하고 타이거는 9대를 잃었다. 이 기간 동안 중전차대대는 충분한 보급과 수리를 받았고 돌격포와 전차엽병 부대의 지원도 받았다.



표트르대제가 습지를 메워 상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는데 혁명이후에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습니다. 타이거의 데뷔무대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1943 10 10, 중전차대대 503은 쿠르스크Kursk 일대에서 78일 연속으로 격전을 벌였고 소련전차 501, 대전차포 388, 야포 79, 항공기 7대를 격파했다. 타이거 18대를 잃었는데 6대는 122mm 57mm 포를 맞아, 한대는 보병의 화염병 근접공격으로 불탔다. 4대는 서스펜션과 트랙에 포탄을 맞았지만 회수해서 수리했다.

타이거의 내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전투에서는 겨우 2대만 문제를 일으켰다. 두대모두 구동계의 문제로 자폭처리되었다. 중전차대대 503 78일의 격전 중에도 항상 10~12대의 타이거를 유지했다.

타이거는 아프리카전선에도 투입되었다. 1942 11~1943 1, 중전차대대 501 타이거 29대가 투입된 후에 전선전체에서 활약했다. 그렇지만 최악의 환경과 무리한 가동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적은 타이거 숫자는 10대 정도로 줄어들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패전하면서 소련에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었고 대규모 공격과 방어작전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 되었다. 소련은 독일군의 길고 얇게 형성된 방어선을 압도적인 무기, 병력과 보급으로 마음껏 공격할 수 있었다.

1944년 여름, 소련은 바그라티온Bagration작전으로 독일 중앙집단군을 궤멸시켰고 사분오열된 독일군은 소규모 반격으로 소련군의 진군을 잠시 막는 정도로 쇠락했다. 소련은 JS-2T-34/85와 같은 신형 중전차로 독일 주력전차인 4호전차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타이거와 킹타이거를 장거리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렇지만 1944년 말 당시에는 타이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승무원의 훈련과 경험 덕분에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바그라티온과 중앙집단군의 몰락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물론 쿠르스크는 더 자세하게 연재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소련의 숫자는 독일의 전술을 압도했다. 물자부족으로 중전차대대의 비전투 손실도 급증했다.

쉼없는 기동. 9 26, 단 한대의 타이거도 움직이지 않는다. 모두가 타이거는 무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용되고 있다. 보병과 함께 투입되면 문제가 생긴다. 타이거는 돌격포가 아니다! 장전수 손실이 극심하다. 중상자 9! 13대여야 할 회수전차가 겨우 5대뿐이다. 부품은 갈수록 귀해지고 있다. 병력손실 때문에 정비창은 타이거 수리경험이 없는 신병들이다. 부품도 없고 용접기도 없다

중전차대대 506, 랑게Lange소령. 1944 1 15.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전차대대 5063개월 동안 겨우 14대만으로 적전차 213대와 대전차포 194문을 격파한 반면에 타이거는 2대만 잃었다.

1 14, 랑게 부대의 타이거는 한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2대는 340km를 주파한 후에 주저 앉았다. 나머지 타이거는 250km를 달린 후에 고장났기 때문에 승무원이 자폭시킬 필요가 없었다.

패전이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타이거는 그 지역의 전세를 뒤집거나 소련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1945 4 19, 소련군은 베를린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했다. 베를린 서쪽에는 중전차대대 503의 킹 타이거가 있었고 2차대전 최후의 전차전 중 하나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