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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동부전선 타이거 이야기 (11부) - 타이거 신화 (2)

by uesgi2003 2017. 7. 4.

 

능숙한 승무원이 킹타이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전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였다. 클로슈테르도르프Klosterdorf (지도 참조) 북동쪽 고지를 선점한 킹타이거 314호는 접근하는 소련 T-34/85를 기다렸다가 15분 만에 모조리 격파했다. 314호도 교전 중에 손상을 입고 후퇴했지만 단 한대의 킹타이거로 소련의 진격을 막았다. 

비슷한 시간, 그루노프Grunow에서는 중전차대대 503의 킹타이거 5대가 압도적인 소련군과 교전을 벌였다. 탄약이 떨어지기 직전에 3대의 킹타이거가 증원되었다고 해도 약 105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제1 벨로루스 전선군이 베를린 작전 중에 입은 피해 중 14%는 킹타이거 8대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카츄샤 포격에 한대만 잃었다. 

 

 

 

 

 

 

 

당시 소련군의 작전계획이었는데 킹타이거 몇 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워낙 전설적인 전투였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아래 지도는 중전차대대 503의 이동경로입니다. 

 

 

 

 

 

 

전투 직후에, 킹타이거 소대 3대는 볼레르슈도르프Bollersdorf 반격에 나서 JS-2 30대와 T-34/85 100대가 집결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진 격전에서 JS-2 전부와 상당수의 T-34를 격파했다. 소대장인 쾨르네르Korner 전차는 단독으로 39대를 격파했고 다른 동료 하레르Harrer는 25대를 격파했다. 

그날 늦은 오후에 다른 킹타이거 4대가 T-34 30대를 더 격파하고 소련보병의 공격까지 막아냈다. 킹타이거의 격전은 밤까지 이어졌다. 조명탄이 환하게 밝힌 전장에서 킹타이거는 공격해오는 소련군 전차를 정확하게 하나씩 격파했다.

4월 21일부터는 베를린 시가전에 투입되어 소련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며 그날 하루에만 15대를 격파했다. 모두 초근접전의 전과였다. 

 

무장친위대 상급분대지도자SS-Oberscharführer(준군사 조직인 나치계급) 쾨르네르Körner는 증원전차를 이끌고 볼레르슈도르프 부근의 언덕으로 향했다. 그 부근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 중인 JS-2와 T-34 전차를 발견했다. IS-2 중전차는 나무 부근에 밀집해 있었고 T-34/85 100대는 외곽에 긴 대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쾨르네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JS-2 대열 중 선두와 후미부터 격파했다. 대형 중간의 전차는 나무에 걸려 포탑을 급히 선회할 수 없었다. 쾨르네르의 킹타이거 3대는 일방적으로 JS-2 전차를 격파했다. 쾨르네르는 최고분대지도자 하레르와 함께 63대를 격파했다. 만약 탄약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소련군 전차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참전하지 않은 나머지 킹타이거는 베르노이헨Werneuchen으로 후퇴했다. 쾨르네르 소대는 킹타이거 한대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소련군 T-34 30대를 격파한 후에 보병의 공격도 고폭탄과 기관총으로 막아냈다. 

밤에 JS-2 전차가 세번째 돌파를 시도하자 조명탄을 밝힌 후에 차례로 격파했다. 이튿날에도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막았다. 지연후퇴를 거듭하다가 21일에는 중전차대대 503 전체가 베를린으로 후퇴했다. 

수리를 위해 자신의 전차를 갈아탄 쾨르네르는 다시 격전을 벌였다. 하급분대지도자 파이거Feige 전차와 함께 소련군의 파상공세를 시가전으로 막아내며 15대를 더 격파했다. 파이거의 전차는 포탑에 총류탄을 맞아 파괴되었고 파이거는 목이 잘려 전사했다.

 

 

 

 

 

소련군이 사용한 총류탄입니다. 이런 것으로 설마 전차가? 할텐데, 미군이 사용한 M9 총류탄은 100mm를 관통했고 시가전에서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독일전차부대는 밤에나 움직일 수 있었다. 낮에 모습을 드러내면 연합군의 전폭기에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했다. 독일이 고안해 1939~1941년에 대성공을 거뒀던 연합전술이 이제는 거꾸로 돌아왔다. 

연합군 목표가 된 지역은 엄청난 포격과 공중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었고 반격에 나서는 독일군은 연합군을 제대로 만나기도 전에 다시 포격과 폭격세례를 받았다. 

아르덴느Ardennes기습에서는 험준한 지형이 오히려 킹타이거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부드럽고 좁은 도로는 킹타이거와 같은 초중량전차를 버티지 못했다. 반격의 핵이 되어야 할 중전차대대는 벌지Bulge전투에서 유명무실했다. 중전차대대는 고장, 보급한계, 거친 지형 때문에 겨우 20대 정도의 연합군전차를 격파하는데 그쳤다.

 

 

 

그렇지 않아도 궤멸상태인 동부전선에서 귀중한 전차와 항공전력을 긁어모아 시작한 벌지 반격전투의 한 장면입니다. 히틀러는 연합군을 기습해 항공전력을 궤멸시키고 안트워프에서 제2의 덩케르크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내년 농사지을 종자까지 털어 잔치를 벌인 꼴이 되었습니다. 

 

 

 

미군이 방기된 킹타이거를 검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폭격기나 전함에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당연히 10대의 셔먼전차도 부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연합군은 11번째, 12번째 전차를 투입합니다. 우리 공군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밤에만 움직여야 합니다. 그들은 탄약을 무한정으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적을 신중하게 골라서 공격해야 합니다. 매번 탄약을 세야 합니다.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인데 보급도 없습니다.”

중전차대대 503 헤르만 베흐네만Hermann Wehnemann

 

타이거와 킹타이거는 대구경 포를 여러 발 맞고도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우수한 전차였다. 직격탄에 맞아 파괴된 타이거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산비, 생산소요시간과 유지보수비용이 막대하게 들어서 늘 숫자가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의 본국폭격으로 독일 특유의 정밀한 엔지니어링과 장인기술은 점차 무너져갔고 원자재부족은 불량부품으로 이어졌다. 과도하게 복잡한 구조의 타이거의 성능과 안정성은 더욱 악화되었다. 

타이거와 킹타이거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전차로 손꼽히지만 1942~1945년 기간 동안 겨우 2,000대만 생산되었다. 반면에 미국은 M4 셔먼Sherman을 50,000대, 소련은 T-34를 60,000대나 생산했다. 타이거가 전장을 지배했지만 이미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승부가 결정되었다. 

 

 

 

 

 

 

 

 

 

 

 

 

 

 

 

타이거는 강력한 88mm 주포, 정확한 광학장치, 두터운 장갑, 파워 스티어링과 반자동 트랜스미션  등으로 중전차의 새지평을 열었지만 심장은 타이거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했다. 마이바흐Maybach 엔진은 야지에서 시속 20~25km에 불과한 출력이었고 그나마도 고장이 잦았다. 그리고 열악한 연비때문에 장거리 기동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이바흐 V-12 HL 230 P30 가솔린엔진은 690마력의 출력에 불과해 킹타이거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습니다. 판터도 같은 엔진을 사용했습니다. 

 

킹타이거 한대의 생산시간은 300,000인시Man-Hour가 들었고 타이거 한대의 생산비용은 약 251,000 마르크로 4호전차의 2배 이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전사가는 타이거의 손익에 대해 부정적이며 전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막판 수세에 몰려 한곳에 고정될 경우에도 제대로만 운용하면 적의 기갑부대에 대재앙을 안겨주었고 그 당시의 공포는 지금의 전설이 되었다. 

 

 

 

 

 

무장친위대 중전차대대 501

SS 전차사단 라이브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의 핵심전력으로 1943년에 편성되어 이탈리아와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히틀러 유겐트사단으로 전속된 후에는 노르망디 부근에서 연합군을 상대했다. 

1944년 9월, 킹타이거로 재편성되어 벌지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소멸되었다. 전설적인 전차 에이스 미하일 비트만 Michael Wittmann이 있던 대대였다. 

500대 격파. 107대 손실. 교환비 4.67

 

무장친위대 중전차대대 502

1943년 10월에 편성되어 1944년 6월부터 노르망디에 참전했고 1945년 3월 이후에는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600대 격파. 76대 손실. 교환비 7.89

 

무장친위대 중전차대대 503

1943년 11월에 편성되었지만 부대원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병으로 참전했다. 1944년 1월부터 네덜란드에 주둔하다가 1945년 1월에 동부전선으로 투입되었다.

500대 격파. 39대 손실. 교환비 12.82

 

국방군 중전차대대 501

북아프리카 지원을 위해 편성되어 1942년 11월에 투입되었다. 1943년 5월,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1943년 11월에 재편성되어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450대 격파. 120대 손실. 교환비 3.75

 

국방군 중전차대대 502

1942년 8월에 편성되어 8월 29일에 레닌그라드Leningrad 부근에 소수만 먼저 투입되었고 1943년 2월에 증편되어 다시 투입되었다. 동부전선에서만 활약했고 최고의 전과를 기록했다.

1,200대 격파. 107대 손실. 교환비 13.00

 

국방군 중전차대대 502

러시아 남부에 처음 투입되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후퇴작전에 참전했다. 쿠르스크Kursk, 체르카시Cherkassy에도 참전했고 1944년 4월에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1,700대 격파. 252대 손실. 교환비 6.75

 

 

 

참고로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의 타이거, 세계 한대뿐인 실가동 전차가 9월에 굴러갑니다. 저 혼자라면 이미 다녀왔을 곳인데... 아쉽지만 참아야죠.

 

http://tankmuseum.org/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