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많은 분들이 기다릴 지 모르겠지만, 한 분이라도 기다려주실까봐 화요일 오전 업데이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디아블로 3 헬게이트를 외면하고 지금 새벽시간에 그림스캔과 업데이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부터는 참조자료의 영문을 가능한 한 한글화시켰고 한국어 표기법에 맞춰 표기했습니다.)
백년전쟁 공성전 이야기가 좀 늘어져서 잠시 제 전사/역사 이야기를 유럽에서 일본으로 옮겨봅니다. 제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중에 상당히 많이 분이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를 원하셨는데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로 나가시노 전투를 2편에 나누어 빨리 정리하고 다시 공성전 이야기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저는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로는 나가시노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성 전투를 꼽는데, 특히 나가시노 전투는 유럽에서 기사의 시대가 저물었듯이, 일본에서도 무사가 아닌 일반 보병의 시대로 바뀐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내용은 Osprey 출판사의 Nagashino 1575를 참조했지만, 동양의 역사에 무지한 서양독자들을 위한 도서이기 때문에 부족하거나 잘못된 내용이 있어서 제 개인적인 설명이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중세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오래 전에 정리했던 일본 전국시대에 대한 짧은 설명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 - 나가시노 전투 (1)
일본 전국시대를 잘 아는 사람이면 가와나카지마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 나가시노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것이다. 아마도 국내에 소개된 일본 역사소설의 영향 때문일 텐데, 실제로도 이 전투들이 일본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전투이기도 하다.
그림 설명: 일본 전국시대는 천민출신부터 귀족가문 출신까지, 개성넘치는 인물들이 힘과 지략을 겨룬 시기였기 때문에 많은 전투가 있었습니다.
지방토호 세력이었던 다이묘들의 영지입니다. 그림에 각인된 사이트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크롬에서는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으니까 IE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다섯 전투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설명에서 나가시노 전투가 빠진 것은 이번 이야기 주제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와나카지마 전투(川中島の戦い)는 가이노쿠니(甲斐国)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과 에치고노쿠니(越後国)]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사이에서 북시나노(北信濃)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수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는 지쿠마가와(千曲川)와 사이가와(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평지인 가와나카지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 불리고 있다.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 の戦)는 1560년 6월 12일에 25,000이란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국을 침공한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오다 노부나가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해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죽이고 이마가와군을 패퇴시킨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역전극이라고 일컬어지던 매우 유명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도카이 지방(東海地方)에 세력을 확대하던 이마가와 씨는 몰락하고 거쿠로 승리한 오다 씨는 이후 기나이(畿内) 제패를 향해 급성장하게 되어 전국시대의 중요한 전기가 된다. 이쓰쿠시마 전투, 가와고에 성 전투와 더불어 일본 3대 야전(夜戰) 중 하나라고 불린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도요또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파의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대규모 전투였음에도 단 하루 만에 승패가 결정되어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지만, 전투로 이어지는 과정과 전후 처리 과정과 연관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사실상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또한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의 전국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전투 혹은 오사카의 역(大坂の役)은 1614년~1615년에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도요토미 가문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와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로 나뉘어 벌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오사카의 진(大坂の陣)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다. 오사카의 난(大坂の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 전국시대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면, 중세의 일본은 유명무실한 천황을 대신해 아시카가(足利) 가문이 쇼군(장군)으로 당시 수도였던 쿄토에 있으면서 지방에 관리(수호직)를 파견해 일본을 통치(막부정치)했다.
1467년 장군승계를 둘러싼 분쟁에 지방 다이묘(실질적인 지방 지배세력)가 가담하면서 오닌의 난이라는 내전이 11년 동안 벌어지고, 이를 계기로 야망과 실력있는 지방 다이묘들이 쇼군이 파견한 수호직 관리를 몰아내거나 군소 다이묘들을 흡수하면서 힘과 계략이 판을 치는 전국시대가 열리게 된다.
천황 가문이 따로 있듯이, 쇼군은 미나모토 가문 출신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실력있는 다이묘는 상경전이라는 이름으로 교토까지 진출해 자신의 꼭두각시 쇼군을 세워 정국을 휘어잡고 싶어했고, 일본 동남부의 최대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첫 번째 상경전에 나섰지만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오다 노부나가라는 무명의 시골 다이묘에게 참패를 당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오케하자마 전투로 일본 역사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온갖 위기를 넘기며 인근의 다이묘를 제압하고 결혼과 협상으로 동맹을 맺어 세력을 키운 끝에 1568년 드디어 교토에 진출해 아키가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세우고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교토와 위치가 가까운 덕분에 막부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지방에는 오다 노부나가보다 훨씬 세력이
큰 다이묘가 많았는데. 서쪽에는 모리 가문, 북부에는 우에스기 가문 그리고 동쪽에는 오늘의 주연인 다케다 가문이 상경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림 설명: 나가시노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인 1575년 당시의 일본 중부 상황입니다.
오와리 촌놈이라고 무시당했던 오다 노부나가가 천재성을 발휘해 오와리에서 당시 수도였던 교토를 포함한 중부를 장악하고 전국 최대의 세력을 자랑했습니다.
특히 중부는 경제, 문화 중심지였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막대한 수입을 통해 상비군을 갖추고 화승총을 대거 구입해 지휘관의 자질과 상관없이 고른 전투력을 갖추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를 잘 모르시는 분은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오다 노부나가 한 방에 정리하기 편을 참조하시면 상당히 재미있을 것입니다.
다케다 신겐으로 대표되는 다케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블로그에서 따로 소개했을 정도로 무력과 지략을 모두 갖춘 일본 최고의 무사가문이었다. 다케다 신겐은 1572년에야 상경전에 나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비해 상당히 늦었는데, 다케다 가문이 가졌던 세 가지 불운때문이었다.
먼저 다케다 가문이 지배했던 지역은 산악지대로 중앙과 고립된 지역이었고, 두 번째로 교토로 진출하려면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영지를 관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수 십 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 숙명의 라이벌 우에스기 겐신이 등 뒤를 놓아주지 않았고 동쪽에서는 다께다 신겐에게 수모를 당했던 호조 가문이 복수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에스기 겐신이 눈에 덮여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겨울을 노려 그의 영지에 반란까지 일으켜 등 뒤를 안전하게 만든 157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를 관통하는 지름길을 선택해 상경전에 나선다.
(우에스기 왈: 다케다 신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성(본성) 앞을 보란 듯이 유유히 통과하면서 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유인했습니다. 패배를 몰랐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맹 오다 노부나가가 파견한 참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을 뛰쳐나가 다케다 신겐의 등 뒤를 노렸다가 미카타가하라에서 참패를 당합니다. 참패 정도가 아니라 전멸위기에서 홀홀단신으로 도망쳐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얼마나 놀랐던지 말 위에서 똥을 지렸을 정도였고 그 모습을 그림-옆 그림-으로 그리게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날의 교훈을 잊지 않고 99번 생각하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늙은 너구리가 되었습니다. 당시 다케다 가문의 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일화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력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섬멸한 다케다 신겐은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로 들어가기 직전에 사망을 하고 오늘의 주연 다케다 가쓰요리(다케다 신겐의 아들)에게 가문을 책임지게 한다.
(우에스기 왈: 다케다 신겐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3년 동안이나 그의 사망을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사망 원인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함락직전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성에서 마지막 주연을 벌이던 음악소리에 끌려 근처에 접근했다
가 저격을 당했다고 하는데, 그것보다는 평소의 지병이 악화되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쨌든 30세에 일본 최고의 가문을 잇게 된 다케다 가쓰요리도 보통이 아닌 명장이었지만 아버지에게서 상속한 엄청난 유산이 그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가문의 역사를 함께 한 역전의 24무장 덕분에 다케다 가문이 무너지지 않았지만 젊은 가쓰요리는 노장의 조언을 참견으로 받아들이며 갈등을 빚게 됩니다.
하루 빨리 전공을 세워 아버지 이름을 지우고 싶어했던 그는 필요이상으로 명예와 전공에 집착하게 되었고 무리한 전투를 계속 벌여 전력을 낭비하고 중신들 사이에 반목이 일어나게 합니다.
그가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로 삼았던 전투가 바로 나가시노 전투입니다.)
그림 설명: 다케다 신겐이 저격을 당했다는 설을 그린 것으로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며칠 동안 투병하다가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3년 동안 그의 사망을 비밀에 붙이고 내정을 다졌던 다케다 가쓰요리는 157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에 들어서며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나가시노 전투가 시작된다.
나가시노 전투의 전력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케다 가쓰요리 두 나라가 운명을 걸고, 오다 노부나가도 이번 기회에 다케다 가문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나가시노 전투에는 세 나라에서 자랑하는 유명한 무장이 거의 모두 참전했고 한 번의 전투에 53,000명이라는 당시 최대의 병사가 투입되었다.
전력에 대한 정확한 당시 기록이 없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병력이 동원되었다.
오다 노부나가 - 30,000명
도쿠가와 이에야스 - 8,500명 (나가시노 성의 500명 포함)
다케다 가쓰요리 - 15,000명
(우에스기 왈: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 당시에 동원할 수 있는 총 전력은 100,000명이었지만 노부나가의 영지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 쌓여 있었고 일향교도의 반란으로 나가시노에는 30,000명만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영지에서 벌어진 전투이기 때문에 상비군 12,500명 외에도 1~2만 명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다케다 가쓰요리가 자신의 거성인 오카자키를 바로 노렸기 때문에 그의 목표로 예상되는 지역에 병력을 분산시키느라 8,500명만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3~40,000명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미 우에스기 겐신과의 전투에 10,000명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가시노 전투에는 15,000명만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라는 최고의 무장이 40,000명을 동원했기 때문에 3대1의 전력으로 다케다 가쓰요리가 해서는 안될 전투를 벌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다케다 가문의 산악출신 병사는 노부나가와 이에
야스의 평야 농민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보였고 다케다 가문 전통의 막강한 기마부대가 4,500명 가량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숫자에서는 상당히 부족하지만 막강한 전투력과 역전의 24무장이 각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투 시기와 위치만 잘 선택한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일본 전사를 잘 알고 있는 분은 이미 결과를 알고 있겠지만, 스포일러가 될테니까 결론은 나머지 이야기를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림 설명: 일본 그림의 표준이 되는 기마무사 모습입니다. 일본 무장은 서양 기사와 달리 활쏘기가 기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거창한 무장을 갖추고 있기 마련입니다.
일본의 말은 서양의 말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실 조랑말보다 약간 큰 정도였기 때문에, 그림과 같은 체격좋은 말은 과장입니다.
전국시대 당시 영양상태가 안좋았기 때문에 일설에 의하면 무장들의 체격이 150cm가 안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들을 왜국(작은 사람들의 나라)이라고 불렀던 것을 보면 체격이 상당히 작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특이한 점은 노부나가가 보유한 3,500자루의 화승총 모두가 이 전투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중 500자루는 나가시노 성 구원에 보내고 나머지 3,000자루가 전투에 쓰여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화승총 부대가 주력으로 사용된다.
반면에 다케다 가쓰요리는 총 병력의 27% 정도로 기마부대에 의존했으며 화승총 부대는 겨우 4% (655명) 밖에 되지 않았다.
다케다 가쓰요리의 작전
워낙 아버지가 지략으로 뛰어난 영웅이고 가쓰요리가 중신들의 조언을 귀담아 듣지 않아 용기와 무력만 뛰어난 무장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전장에서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상당한 지략도 가지고 있었다.
내정에 치중하고 우에스기 겐신과의 전투부터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중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전선을 양면으로 확대한 것은 나름대로 치밀한 작전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곽에서 이에야스를 압박하며 전진하던 아버지와 달리 바로 이에야스의 거성인 오카자키로 향했는데,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가 야시로가 오카자키의 성문을 열어주겠다는 약속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설명: 다케다 가쓰요리의 원정로입니다. 얼핏보기에는 무인지경으로 이에야스의 두 영지를 누비고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되어 본국으로 귀환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체면이 걸린 가쓰요리가 집착하는 발걸음입니다.
(우에스기 왈: 오카자키 성 반란에 대한 설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에야스와 사이가 안 좋았던 정실이 간통을 하고 그것이 들통날까 두려워 다케다 가문과 내통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의 허락 없이는 해가 뜰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이에야스의 내정을 담당했던 오가 야시로가 횡령한 것이 들통이 나 내통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어쨌든 다케다의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의 내통이 발각되었고, 오가 야시로는 목만 내놓은 채로 땅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대나무 톱으로 목을 써는 사형을 당합니다. 무려 7일 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가쓰요리가 아스케 부근에 도착했을 때에 오가 야시로의 처형소식이 전해졌고 이미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 오카자키 성은 포기하고 쓰쿠데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성을 부수고 약탈하기로 결정한다.
6월 13일 다케다 군은 니렝지와 우시쿠보 성을 불태우고 사카이 다다쓰구가 지키는 요시다 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요시다 성문 앞에 도착하자 예상과 달리 이에야스 자신이 직접 6,000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쓰요리의 침공을 들은 이에야스는 그의 진로를 2주 동안 추적한 끝에, 첫 번째 목표인 오카자키 성은 아들 노부야스와 7,000명의 병력을 남겨두고, 두 번째 목표로 예상되는 요시다 성에 급히 들어온 것이었다.
이제 60세가 된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선봉대가 싸움을 걸어왔고 이에야스의 유명한 무장 34명이 나서 격전을 벌였다. 이에야스 진영의 미즈노 타다시게가 저격을 받아 오른 팔꿈치가 박살이 났지만 물러서지 않았고 무장들 간의 기마전은 무승부로 끝났다.
1572년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성을 나서 응전했다가 참패를 당했던 이에야스는 성 밖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고 가쓰요리도 강력한 수비대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이게 되면 막대한 병력손실은 물론이고 등 뒤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구원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진영을 거두고 북쪽으로 다시 방향을 바꿨다.
이대로 귀국하기에는 체면이 안 서고 그렇다고 전략요충지를 공략하기에는 이미 이에야스의 주력이 따라다니고 있어서 어려움이 있던 차에 마지막 목표로 선택된 것이 바로 나가시노 성이었다. 나가시노 성은 다케다 군이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몇 개의 통로 중 하나였으며 겨우 500 명의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다케다 가문을 배반하고 이에야스에게 붙은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가쓰요리 자신의 체면에도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나가시노 공성전
나가시노 성은 원래 이마가와 가문의 중신이 1508년에 건축했고 미카와 지방으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였기 때문에 다케다 신겐이 1571년에 함락시켰다가 1573년에 이에야스가 다시 빼앗았다. 1575년 4월에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에게 성의 수비를 맡겼고 500명의 수비대가 200자루의 화승총과 한 문의 대포로 수비하고 있었다.
두 강이 만나는 Y 자 지대에 지어진 나가시노 성은 천혜의 방어지로 강 쪽의 양 옆은 50m 높이의 절벽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북쪽 방향에서만 공격할 수 있는데 그나마도 습지가 상당히 많아 대규모 병력이 한꺼번에 공격하기 쉽지 않았고 3중 방책과 돌담이 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림 설명: 나가시노 성을 공격하고 있는 다케다 군의 아나야마 노부키미, 사나다 노부쓰나, 야마가타 마사카게입니다. 이렇게 세 명의 지휘관이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리 없지만... 노부키미는 승려출신이라 승복에 갑옷을 입은 모습이고 마사카게는 고령인 나이로 최전선에 뛰어든 모습입니다.
일본 무장 중에는 승려 출신이 상당히 많은데, 당시 일본 승려는 결혼과 육식에 자유로운 대처승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승려였다가 무장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그나마 글과 전략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사찰이었기 때문에 유력가문은 어릴 때부터 사찰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세히 감상할 수 있도록 원본으로 올렸습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14일에 요시다 성 공격을 포위한 가쓰요리는 16일에 나가시노 성으로 전군을 집합시켰다 (배치와 규모는 그림 참조) 바로 다음 날인 17일에는 북서쪽에서 나가시노 성의 전력을 시험하는 공격을 한 다음 18일부터 전력을 다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30배가 넘는 병력의 공격을 받았지만 수비군은 북쪽 방향 수비에만 전념하면 되었고 화승총도 200자루나 있어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800명의 적을 죽였다.
전면 공격이 여의치 않자 가쓰요리는 뗏목을 동원해 강쪽의 무방비로 방치된 성벽을 공격하려고 했지만 이것을 발견한 수비군이 절벽을 오르는 적에게 총탄을 퍼붓고 바위를 던져 뗏목을 모두 부쉈다.
6월 20일, 가쓰요리는 북쪽과 북서쪽에서 야습을 가했다. 때마침 구름이 끼어 달빛조차 없었던 밤이어서 수비군의 총탄과 화살이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제일 외곽의 제3 방책이 밧줄에 걸려 무너지자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두 번째 방책으로 병사들을 후퇴시켰다.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운 다케다 군이 계속 압박하자 결국 수비군은 나가시노 성벽인 최후 저지선인 제 일 방책으로 후퇴한다.
사다마사와 수비군은 궁지에 몰렸지만 결사항전의 의지는 아직 그대로였다. 21일 다케다 군이 공성탑을 세우자 마자 수비군은 대포를 쏴서 다케다 군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심지어 토다 토고로라는 무장은 절벽을 타고 내려가 강가에서 목욕을 하며 전쟁의 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는데 다케다 무장이 공격해오자 목을 베고 성으로 귀환해 사기를 크게 높이는 일까지 있었다.
5일 동안 공격을 했는데도 한 줌도 안 되는 수비군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고, 공성탑, 땅굴, 뗏목 작전까지 무산된데다가 예상하지 못한 손실이 계속되자 가쓰요리는 성을 따라 방책을 세우고 성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강 바닥에는 그물을 설치해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가쓰요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고 사다마사에게 필요한 것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의 구원이었다.
그림 설명: 전면 공격이 여의치 않자, 강쪽에서 기어오르고 있는 다케다 군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성벽이 아니라 절벽을 오르고 있는 모습이어야 했는데, 당시 그림이라고 모두 옳은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 전해진 부정확한 내용을 과장해서 그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림 설명: 나가시노 공성전 진행상황입니다. 제가 상당히 친절해졌습니다. 전에는 이런 자료를 영문 그대로 올렸었는데 나름 필요한 부분을 번역했습니다. Osprey 출판사의 도서는 시각자료가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많은 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관에 따라 편견이나 왜곡이 심한 단점도 있지만 한 눈에 당시의 전황을 볼 수 있다는 분명한 장점이 있습니다. 원본 그대로 올려서 클릭하면 엄청 커집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군에 맞서 다케다 가쓰요리가 자랑하는 불패신화의 기마부대가 어떻게 전투를 벌였는지는 2편에서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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