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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일본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 - 나가시노 전투 (2)

by uesgi2003 2012. 5. 16.

 

다케다 가쓰요리가 배후를 포위당할 위협 속에서,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어가며 나가시노 성에 집착한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이야기에서 설명했습니다. 다케다 가문을 배신한 나가시노 성의 지휘관 사다마사를 잡아 가문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려는 개인적인 욕심과 산악지대의 영지에서 남부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라는 전략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30대 1의 병력 차이로 전멸이 예상되는데도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그렇게 끈질기게 버틴 이유는 무엇일까요? 항복하면 사형을 당하게 때문일까요? 지휘관이 할복하고 농성 중인 병사들은 살려주는 협상이 빈번하게 있었고 당시 무장은 죽음보다 명예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해서 사다마사가 죽음을 두려워했을리 없습니다.
물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어떤 경우에도 성을 내주지 말고 발목을 잡으라는 명령이 어진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다마사에게도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습니다. 사다마사가 다케다 가문을 버리고 이에야스에게 귀순하자 다케다 가문에 인질로 가 있던 가족이 모두 잔인한 처형을 당했었고, 사다마사는 나가시노 성에서 그 원한을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쿠가와 가문은 이마가와 가문의 볼모로 많은 고생을 했었는데(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경전에 나섰다가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면서 볼모에서 풀려납니다), 그 때부터 이어진 가신들의 충성심은 부모 자식 간에도 배반이 잦았던 전국시대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고 대대로 이어집니다. 일종의 한이 가신들 대대로 이어지면서 명령이 떨어지면 외골수 시골무사의 모습으로 명령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다마사의 개인적인 원한과 도쿠가와 무사들 특유의 외골수가 합쳐지면서 30대 1의 나가시노 전투가 가쓰요리에게는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합니다. 도쿠가와 무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로 이번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고 IE에서 보셔야 그림과 설명이 제대로 연결됩니다.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전투 - 나가시노 전투 (2)

 

나가시노는 동양역사 최초의 대규모 화승총 부대와 기마부대의 대결말고도 도쿠가와 무사의 전설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쓰요리가 수비군의 탄약과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자, 성 안의 사정은 급박해졌다. 워낙 작은 성이었기 때문에 이제 식량이 3~4일 후면 완전히 바닥날 판이었다. 미카와 지방 출신이라 지리를 잘 아는 도리이 수네에몬이라는 무사가 구원을 요청하겠다고 나섰다. 구원요청은 포위되기 전에 이미 보냈었지만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야스와 노부나가 연합군이 자신들을 버린 것인지 아니면 구원군을 준비하고 있는 중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림 설명: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영주들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장기간 농성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지면 그림과 같이 시체를 먹는 일도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지략의 대가답게 막대한 돈을 뿌려 목표 영지의 쌀을 미리 거둬드린 다음에 성을 포위해 말려죽이는 전술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6월 20일에 기후를 출발해 21일에 이미 오카자키 성에 들어온 상태였다. 노부나가 영지에서는 일향교도가 계속 민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주변의 다이묘들과의 전투도 마무리되지 않아 여유롭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구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이에야스와의 동맹이 흔들리는데다가 이번 기회에 다케다 가문에게 타격을 입혀 등 뒤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자신이 가진 병력 중 30% 그리고 화승총은 모두 동원했다. 그러나 다케다 군이 어느 정도의 전력으로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해 첩보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수네에몬이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림 설명: 도리이 수네에몬이 강을 헤엄쳐 탈출하고 있는 두 그림입니다. 왼쪽이 현실성이 있는데 그림풍으로 봐서는 현대작품이고 오른쪽의 그림은 그 당시의 그림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과장된 모습입니다.

 

 

6월 23일 저녁, 도리이 수네에몬은 절벽을 타고 내려가 강으로 뛰어들었다. 다케다 군이 쳐놓은 그물을 뚫고 도요 강 바닥을 헤엄쳐, 6월 24일 새벽에 나가시노 성 반대편에 봉화를 올려 자신이 무사히 빠져나왔다는 것을 알렸다. 그는 오카자키에 도착하자 마자 쉬지도 않고 성 안에 이제 겨우 3일치의 식량이 남았다는 것과 구원군이 없으면 오쿠다이라 사다마사가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할복하는 수 밖에 없다는 보고를 했다.

 

그림 설명: 도리이 수네에몬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요청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른쪽의 무장은 상당한 리액션을 보이고 있는데 토크쇼 연예인 수준의 리액션입니다.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15,000명 정도의 다케다 군이 나가시노 성에 발목을 잡혔다는 것이 파악된 연합군은 바로 다음 날 나가시노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수네에몬은 성으로 돌아가 구원군이 온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성 반대편에 도착한 그는 봉화를 다시 올려 구원군이 오니 조금만 더 버티라는 반가운 소식을 알리고 성에 들어가기 위해 강으로 뛰어들려고 했지만 이전의 봉화를 보고 경계를 강화시킨 다케다 군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림 설명: 도리이 수네에몬이 위험을 무릅쓰고 성 안의 동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려고 했던 전설적인 장면입니다. 역시 왼쪽은 현실성있는 현대 그림이고 오른쪽은 당시의 과장된 그림입니다.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안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부터 빨리 정리하고 싶은 생각에 수네에몬에게 구원군은 오지 않으며 연합군은 성을 이미 포기했으니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하라고 회유했다. 십자가에 묶였다는 기록도 있고 자유로운 몸이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성 앞에 선 수네에몬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몇 만 명의 구원군이 도착하니 조금만 버티라고 소리를 쳤고, 옆에 있던 병사가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으로 찔러 죽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기와 명예는 높이 사는 법이다. 수네에몬에게 허를 찔린 다케다 군이었지만 그의 충성에 감동했고 오치아이 미치히사라는 무장은 아예 수네에몬이 처형당하던 모습을 군기로 만들어 사용했다. 미치히사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수네에몬 군기(왼쪽 그림)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구원군이 온다는 소식과 수네에몬의 용기는 수비군의 의지를 더욱 굳게 만들어줬다.

 

나가시노 전투
연합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은 다케다 군을 긴장시켰고 가쓰요리는 중신들과 회의를 열어 의견을 모았다.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 오야마다 노부시게와 같은 선대부터의 백전노장은 영지로 퇴각해도 불명예가 아니라는 설득을 했지만 아토베 카쓰스케와 같은 젊은 무장들은 노장들의 의견을 비웃으며 무패를 자랑하는 다케다 군이 등을 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이미 나가시노 성을 결전의 장으로 선택한 가쓰요리는 젊은 무장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다케다

가문의 전력 중 절반을 거느리고 영지를 떠나 오카자키 성에도 못 미쳤고 요시다 성 앞에서는 발길을 돌렸다. 이제 30배가 넘는 병력으로 나가시노 성마저 포기한다면 자신의 명예는 심각한 상처를 입을 판이었다. 한 달의 원정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두 개의 작은 성을 불태운 것 뿐이었다. 영지로 돌아가면 중신들은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결전을 벌여 패배한다면 무장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가쓰요리가 승리할 가능성은 많지 않은 전투였다. 아버지가 3년 전에 미카타가하라에서 연합군을 궤멸시켰던 전력과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었다. 그 때에는 다케다 군이 25,000명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11,000명의 연합군을 상대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죽기직전까지 몰렸던 경험으로 이번에는 요시다 성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대신에 연합군이 38,000명의 우세한 병력으로 가쓰요리를 나가시노 공성진영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중신들은 주군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보고 싸움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기기 위한 전술에 치중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바바 노부하루는 싸우더라도 우선 나가시노 성부터 함락시키고 나가시노 성 근처에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전군이 성을 공격하면 1,000명 가량의 희생이 생기겠지만 나가시노 성을 함락시킨 다음 다키 강을 해자삼아 성을 의지하며 전투를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쓰요리는 기마부대를 주축으로 한 야전을 주장하며 바로 다음 날 아침에 결전을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백전노장의 중신들은 대군을 상대로 상대가 선택한 장소에서 야전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중신으로 다케다 가문에 충성을 다하고 무장으로 명예로운 마무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케다 가문의 유명한 24무장 중 네 명인 바바 노부하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 쓰치야 마사쓰구는 마지막 술잔을 나누며 서로 작별을 나누었다.

 

그림 설명: 가쓰요리가 중신들과 전투에 대한 협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결정에 노장들이 몹시 슬퍼하고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리이 수네에몬에게 약속한대로 6월 25일에 오카자키 성문을 나섰고 6월 27일 저녁에 나가시노에서 5~6km 떨어진 니다라하라 평야에 도착했다. 노부나가는 평야가 끝나 산이 시작되는 지점을 결전의 장으로 골랐다.

 

그림 설명: 시다라하라에 먼저 도착한 이에야스의 부대 모습입니다.

나무에 앉아있는 무장이 이에야스의 4천왕 중 하나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스이고, 왼쪽의 눈 위에 손을 올린 무장이 역시 4천왕 사카이 다다쓰구입니다. 참고로 4천왕 중 다른 두 사람은 혼다 다다카쓰와 이이 나오마사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이에야스와 노부나가는 이미 다케다 군에게 참패를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케다 군의 기마부대에만 초점이 맞춰졌다. 먼저 백병전으로는 다케다 군의 전투력을 당해낼 수 없다고 보고 자신이 보유한 3,000자루의 화승총을 모두 배치시켰다. 그리고 기마부대의 돌격을 막아낼 방책을 세울 생각으로 영지에서 떠날 때부터 모든 병사가 말뚝을 가지고 이동하게 만들었다. 노부나가 진영을 따라 2.1km의 폭 그리고 개울에서 언덕 중턱까지 3중으로 방책을 쳤는데 다케다 군의 기마부대가 돌격해온다면 개울에서 한 번 그 기세가 죽었다가 언덕과 방책에 가로막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전장의 긴장이나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보병이 방책을 넘어가거나 화승총을 미리 발사하는 것과 화승총의 연사속도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먼저 각 부대에는 가신들이 투입되어 어떠한 경우에도 적을 쫓아 방책을 넘어가거나 개울 너머로 총을 발사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화승총 부대는 3열로 나누어 총격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발사될 수 있게 했다. 3열 사격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다.
노부나가는 미카타가하라 전투부터 다케다 군의 기마부대에 대해 대책을 마련해왔던 것이다.

 

6월 27일 저녁, 가쓰요리는 다음 날 있을 결전에 누가 참가하고 누가 남아 있을 것인지 결정하고 있었다. 진영은 전통적인 좌익, 중앙, 우익 그리고 본대 4개 부대로 나누고 성 포위에는 3,000명을 남겨두기로 했다. 그 중에 2,000명은 전면에, 1,000명은 도비가스 산에 그대로 두기로 했다.
가쓰요리가 회의를 하는 같은 시간에 노부나가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에야스의 맹장 사카이 다다쓰구가 갑자기 나서 나가시노 성의 다케다 군 배후로 크게 돌아 기습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노부나가에게 창피만 당하고 물러났다. 노부나가는 나중에 다다쓰구를 조용히 불러 '훌륭한 계획이요. 밖으로 새 나갈까 봐 일부러 핀잔을 주었소. 3,000명의 병력과 500자루의 화승총을 지원하겠소'라며 사카이 다다쓰구에게 지휘를 맡겼다.
다다쓰구는 때마침 내린 폭우를 틈타 남쪽으로 8km를 크게 우회하여 다케다 군의 진영을 돌아 도비가스 산에 있는 다케다 노부자네의 등 뒤에서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림 설명: 위의 그림과 함께 한글번역한 저의 역작(?)입니다. 클릭하면 전투상황을 자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케다 군의 전위부대가 시다라하라 동쪽의 숲에서 나오면서 양군이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양 진영이 가장 가까운 곳은 200m밖에 안되었고 가장 멀리 있던 이치조 노부타쓰의 위치도 400m 거리 밖에 안되었다. 가쓰요리도 노부나가가 얼마나 많은 화승총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전날에 내린 폭우를 내심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경험으로는 습기에 젖은 화승총은 효과가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첫 번째 일제사격만 견뎌낸다면 다음 사격까지 200m 정도의 거리를 기마병이 단숨에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사격에서 상당한 타격이 예상되지만 그래도 기마부대가 적의 진영에 뛰어들어 화승총 부대를 교란시키는 동안 보병들이 따라가 백병전을 벌이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백병전이라면 노부나가의 부대는 상대가 안되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에 있었던 일향교도와의 나가시마 전투에서 화승총을 습기에서 잘 보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연사속도를 높이는 훈련도 충분히 한 상태였다.

 

최전위부대가 총격을 받는 동안 다른 부대들이 하나씩 싸움에 말려들었고 기마부대가 총탄에 쓰러졌고 노부나가의 보병이 달려나가 마무리를 지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영화 가게무샤가 그런 기록의 대표적인 예인데, 실제로는 나가시노 전투는 가쓰요리의 명령이 떨어지고 8시간이나 계속되었고 화승총 부대가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끝낸 것이 아니다.

6월 28일 오전 6시에 가쓰요리가 전투 시작을 알리는 전진 명령을 내렸다. 아시가루(일반 보병) 등에 매달린 북이 울리자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바바 노부하루 휘하의 최전위 기마부대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나갔다. 노부나가가 사격엄금 명령을 내려두었기 때문에 총성은 한 방도 울리지 않았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던 기마부대는 개울을 건너면서 속도가 완전히 죽었다. 말과 무사들이 물가로 나오자 마자 다시 속도를 높였다. 방책까지 50m를 남겨두었을 때에 첫 번째 일제사격이 터졌고 많은 무사가 말에서 떨어졌지만 가쓰요리는 예상하고 있던 바라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쓰요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바로 일어났다. 첫 번째 일제사격 이후 바로 두 번째 사격 그리고 세 번째 사격이 계속 이어졌다. 최전위 기마부대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르던 보병들이 마구 쓰러졌다.

 

나가시노 전투 당시의 화승총은 최대 500m까지 총탄을 발사할 수 있었지만 유효사거리는 200m로 크게 줄어든다. 유효사거리라고 해도 중장갑을 입은 기마부대에게는 아주 가벼운 상처만 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화승총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노부나가는 50m 이내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50m 거리부터는 치명상을 입힐 수 있어도 정확도가 크게 떨어졌다. 30m 거리에서는 거의 모두 표적을 맞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0.8mm 두께의 갑옷을 뚫을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화승총부대를 3열로 나누어, 첫 탄은 50m 거리에서 발사하고 두 번째 탄은 30m 거리에서 그리고 세 번째 탄은 영거리 사격으로 적을 모두 쓰러뜨리게 했다. 일향교도 민란 때부터 큰 피해를 입으며 공들여 키운 화승총부대는 노부나가의 명령대로 방책 뒤에서 대열을 바꿔가며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총탄을 맞아가며 방책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 무사는 5.6m 창으로 무장한 장창병이 나서 말에서 떨어뜨렸다. 흥분을 못 이기고 부상당한 적을 죽이려고 방책너머로 나서는 부대는 곧바로 다시 불려 들어왔다.

 

다케다 군의 기마부대가 돌격을 하던 바로 그 시간, 미리 우회해서 도비가스 산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사카이 다다쓰구는 별동대 3,000을 3개 부대로 나누었다. 첫 번째 부대는 나카 산에 있는 다케다 군을 공격했는데 완전기습을 당한 다케다 군은 바로 진영을 버리고 도비가스 산으로 도망쳤고 다다쓰구의 다른 두 부대가 패잔병 뒤를 따라 도비가스 산을 공격했다. 500자루의 화승총과 불화살에 다케다 노부자네의 진영에 불이 났고 기습을 당한 노부자네는 바로 전사했다.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고 있던 나머지 2,000명의 다케다 군은 강 건너 도비가스 산의 아군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적의 규모도 모르고 응원을 갔다가는 강에 막혀 포위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저 지켜만 볼 뿐이었다. 구원군이 노부자네 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광경은 성 안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와 수비군에게도 보였다. 성문 앞에 있던 다케다 군이 거의 모두 시다라하라 들판의 전투에 동원된 것을 알고 있던 그들은 성문을 열고 과감하게 반격에 나서 200명을 죽이며 다케다 군을 밀어내며 나가시노 성을 지켜냈다.

 

 

그림 설명: 구원군이 온 것을 알고 과감하게 반격에 나서고 있는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입니다.

그런데 나가시노 성은 본성에 해자가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당시의 그림이라 고증이 많이 부족합니다.

 

다시 시다라하라 들판으로 돌아가, 다케다 군의 공격은 3시간째 계속되었고 곳곳에서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중앙에서는 다케다 노부카도와 나이토 마사토요의 부대가 방책을 전혀 뚫지 못하고 있었고 (다케다 진영에서 봤을 때에) 우익의 바바 노부하루의 부대가 접근조차 못하다가 쓰치야 마사쓰구 등의 부대와 교체되었다. 교체투입된 쓰치야 마사쓰구가 전사하고 사나다 노부쓰나의 기마부대 200명이 전사했지만 결국 방책을 뚫고 들어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부대와 마주치는데 성공했다.
방책이 뚫리는 것을 본 바바 노부하루가 말을 돌려 돌격해왔지만 사쿠마 노부모리의 부대를 두 번째 방책으로 밀어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사나다 노부쓰나와 노부테루는 모두 전사했고, 두 번째 방책 앞에 길이 막힌 노부하루의 부대를 히데요시의 부대가 양 옆에서 포위해 방책 밖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바바 노부하루가 가지고 있던 700명 중 이제 겨우 80명 만이 살아 있었다.
오쿠보 다다요가 있던 연합군의 우익(다케다 군의 좌익) 끝은 방책이 상당히 허술했고 여기는 다케다 가신 중 최고의 명장인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맡았다. 마사카게는 6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랬듯이 가장 앞에서 말을 달려 연합군 대열에 뛰어들었다.

 

그림 설명: 바바 노부하루가 뚫었던 지역이나, 방책이 허술했던 오쿠보 다다요 지역에 전력을 집중했어야 했다는 사후약방문이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처음부터 연합군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서 전투를 벌여서는 안되었고, 그 지역에 전력을 쏟았다 하더라도 판세를 뒤집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상당히 커집니다.

 

전장의 가장 끝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기마부대가 이미 대열을 무너뜨렸기 때문에 화승총은 아무런 도움이 안되었고 혼란의 백병전이 벌어졌다. 이름있는 무사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적수를 찾아 다녔고, 친위무사는 칼을 뽑아 들고 주군의 곁에 오는 모든 사람을 베어 넘겼고, 보병들은 땅을 구르며 서로의 몸 위에 올라서려고 힘을 썼다.
야마가타 마사카게는 부대를 몰아 혼다 다다카쓰의 부대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난전 속에서 말이 쓰러지면서 전사했고 그의 목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장이 베어 전리품으로 이에야스에게 가져갔다.

마사카게가 전사하는 순간, 다케다 가쓰요리는 예비대와 친위부대에게 마지막 공격명령을 내렸다. 가쓰요리도 직접 말을 타고 대열 중간에 함께 했지만 전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림 설명:  가쓰요리가 친위대를 이끌고 직접 전투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연합군의 중앙과 좌익에서의 전투는 마무리 되었지만 우익의 백병전은 오후 1시까지 계속 되었다. 노부나가는 조개나팔을 불어 방책 밖으로 나가있던 부대를 모두 불러 들였고,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된 다케다 군은 호라이 사(절) 방향으로 급히 퇴각했다. 적이 퇴각하는 모습을 본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즉시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큰 피해가 없는 연합군의 기마부대가 추격에 나섰다.

 

(우에스기 왈: 모든 일에 과감하고 파격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가 얼마나 다케다 군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나가시노 전투를 위해 전 병력의 30%를 뽑아 온 것도 그렇고 자신이 가진 화승총을 모두 가져온 것도 그렇고 승기를 잡았는데도 방책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계속 방어태세를 유지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미 주력이 궤멸된 다케다 군이었는데도 방책 안으로 불러들인 것은 노부나가의 실수라기 보다는 당시 전장의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먼저 노부나가가 진영을 차린 곳이 언덕이 시작되는 곳이라 높은 곳에서도 전황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3,000자루의 화승총이 계속 발사되다보니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연기로 뒤덮여 노부나가의 눈에는 안개낀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가쓰요리의 친위대까지 나선 것을 확인하지 못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지략을 갖춘 무장이 많은 다케다 군이다 보니, 방책 밖으로 끌어내려는 유인책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대망과 같은 일본 역사소설에서는 다케다 가문의 몰락이 가슴아프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인지 다케다 가문의 몰락을 생각하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일본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우에스기 가문과 함께 다케다 가문은 막강한 전투력, 너무나도 풍부한 인재들을 갖춰 가장 쉽게 일본을 통일할 수 있는 가문입니다.)

 

추격전에서는 나이토 마사토요가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1,000명의 병력 중 이제 겨우 100명만 남은 나이토 마사토요는 혼다 다다카쓰와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추격을 받았고 여러 차례 화살에 맞은 그는 말에서 떨어지고서도 일어나며 창을 들려고 하자 아사히나 야스카쓰가 그의 목을 베었다. 24무장 중 이름이 높았던 마사토요는 52세였다.
바바 노부하루는 주군 가쓰요리가 무사히 퇴각할 수 있도록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추격군에게 맞서 이름있는 무장이 상대하라고 외친 후에 달려든 2명의 무장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그림 설명: 오다 노부나가가 전리품으로 가져온 수급(무장의 머리)을 직접 점검하고 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서는 전투에서 이긴 후에 이름있는 적장의 목을 직접 확인하며 공적을 치하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다케다 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고사카 마사노부가 우에스기 가문과의 전투 중에 급히 말을 돌려 연합군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세웠고, 그 덕분에 가신 두 명만이 곁을 지켰던 가쓰요리는 영지에 들어 설 수 있었다.

시다라하라 들판에서 사라진 다케다 군은 10,000명이 넘어 원정을 떠났을 때의 67%를 잃었다. 무엇보다도 선대 때부터 가문의 보물로 여긴 24무장을 포함한 백전노장의 중신들이 거의 모두 전사했고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기마부대가 전멸했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나가시노 전투에 참가했던 97명의 유명한 무장 중에 54명이 전사했고 2명이 중상을 입었다. 24무장 중에는 하라 마사타네, 사나다 노부쓰나, 사이구사 모리토모, 나이토 마사토요, 야마가타 마사카게, 쓰치야 마사쓰구, 바바 노부하루가 목숨을 잃었다.
그 동안의 잘못 알려진 기록과 달리 연합군의 피해도 가볍지 않았다. 38,000명 중 6,000명이 전사했고 백병전이 주로 일어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피해가 특히 컸다.

 

다케다 가문의 멸망

 

그림 설명: 1582년 당시의 중부 상황입니다. 노부나가의 세력이 중부를 완전히 장악했고 다케다 영지를 빼고는 위협이 될만한 다이묘는 사실상 없었습니다.

우에스기 가문에 대한 설명은 따로 설명해두었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다케다 가쓰요리가 그 다음에도 7년 동안이나 연합군을 상대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텐데, 먼저 그의 영지인 카이와 시나노는 산악지대로 이에야스의 미카와와 토토미같은 해안평야에 비해 방어하기 쉽고, 무엇보다도 다케다 가문의 평생 숙적이던 우에스기 겐신이 1578년에 세상을 떠난 덕분이었다.

 

(우에스기 왈: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래서 제 닉네임이 우에스기인, 일본 전국시대의 최고영웅 우에스기 겐신은 평생을 불교의 가르침대로 살았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계략을 싫어하고 정면승부를 좋아했던 그는 지략가인 다케다 신겐을 가장 혐오했지만, 다케다 가문이 가뭄으로 큰 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국민은 고통을 받으면 안된다고 귀중한 전략물자인 소금을 보급해줄 만큼 곧은 성격이었죠.

 

다케다의 위협을 봉쇄한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최고 맹장 시바타 가쓰이에에게 18,000명을 줘서 선봉대에 세우고 자신도 30,000명을 이끌고 우에스기 겐신의 영지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우에스기 겐신은 데토리 강(가와)에서 오다의 선봉대를 공격해 궤멸시켜 노부나가가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다음 해 3월에 영지 총동원령을 내려 오다 노부나가와의 일전을 벌이기 직전에 돌연사하고 맙니다.

그리고 평생을 여성을 멀리하고 살았기 때문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두 명의 양자를 들였는데, 그의 사후에 우에스기 가게가쓰와 우에스기 가게토라가 내전을 벌여 우에스기 가문은 급격하게 몰락하고 맙니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호조 가문이 지지하던 우에스기 가게토라를 지지해 호조 가문과 동맹으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맞서야했지만, 우에스기 가게가쓰를 배후 조종할 수 있다는 이유로 가게가쓰를 지지하면서 호조 가문과 동맹이 깨지게 됩니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나노 전투 직후부터 다케다 가문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고 결국 가쓰요리가 최고의 자랑으로 생각하던 다카텐진 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시나노 전투부터 흔들렸던 지방 영주들의 충성심은 다카텐진 성 함락을 계기로 가파르게 무너져내렸고, 가쓰요리가 심푸에 거성을 짓고 거처를 옮기면서 배반이 이어졌다.

 

(우에스기 왈: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사람이 곧 성'이며, 영지 내에서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겐의 거성은 한 층짜리 작은 성이었고 항상 영지 밖에서 전투를 벌여 국내 경제에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흔들리던 지방 영주들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전향제의를 받고 있던 차에, 성에 의존하려는 가쓰요리의 자세는 그들이 마음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나가시노 전투 후에 7년 동안이나 버티던 그가, 한 때 일본 최고의 무사집단으로 공포에 떨게 했던 다케다 가문이 연합군의 단 한차례 공격으로 1582년에 눈처럼 녹아버린 것은 가신과 지방 영주들의 배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1582년부터 이에야스의 사주를 받은 이름있는 지방 영주들이 배반을 하기 시작했다. 먼저 다케다 영지의 국경을 방어하던 키소 요시마사가 반란을 일으켰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바로 다케다 영지를 공격했다. 심지어 24무장 중 한 명이며 시나노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던 아나야마 노부키미도 연합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가쓰요리의 동원령에도 달려오는 가신이 거의 없자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지었던 거성 심푸를 스스로 불태우고 북쪽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다. 사나다 가문이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해 가쓰요리에게 자신의 영지로 올 것을 권하지만, 24무장 중 한 명인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와도노 성으로 갔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오야마다 노부시게까지 배반한 것이다. 

 

그림 설명: 시나노 공성전을 지휘하던 아나야마 노부키미의 모습입니다.

선대부터 충성을 다했던 24무장이 배반했다는 것은 이미 다케다 가문은 이름만 남았다는 것을 잘 알려줍니다.

 

가쓰요리의 곁에는 쓰치야 마사쓰구의 세 아들과 겨우 300명의 병사만이 지키고 있었고 템모쿠잔까지 추격한 적과 마지막 전투를 벌여 30명만이 살아남는다. 마사쓰구의 아들들이 적을 막아내는 동안, 사쓰요리의 아내(19세)가 자결했고 가쓰요리와 아들 노부카쓰가 자결을 했다. 그의 목은 노부나가에게 보내졌는데, 오른쪽 눈은 굳게 닫고 있었지만 왼쪽 눈은 비꼬는 듯이 치켜뜨고 있었다고 한다.

 

 

나가시노 전투 후에 일본 전국시대의 전술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다이묘가 화승총을 도입하는데 엄청난 돈을 썼고 전투에서는 화승총이 대거 등장했다. 그리고 기마무사의 역할이 크게 줄어들었는데, 1615년에 있었던 오사카 성 공방전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모든 무사가 말에서 내려 창을 들고 전투를 할 것을 명령했을 정도였다.

 

그림 설명: 가쓰요리의 가족이 자결하는 동안 적을 막아내고 있는 쓰치야 마사쓰구의 아들 들입니다. 가장 뒤의 투구를 쓴 인물이 가쓰요리입니다.

 

나가시노 성에서 다케다 군의 발목을 잡아 큰 공을 세운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오다 노부나가의 이름 한 자를 받는 명예를 얻어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로 이름을 바꿨고 많은 영지를 받았고 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