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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2차대전 독일군의 두 얼굴 - 육군과 무장친위대

by uesgi2003 2020. 8. 18.

월드워 Z 예루살렘 장면이 떠오르는 어제 오늘입니다. 수천년 간 이어진 인간의 무지와 광기는 21세기에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주정착을 할 때에도 여전할겁니다. 

 

 

1941, 독일은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를 침공했고 2개의 군조직이 벨그라드Belgrade를 향해 경주했다. 한쪽은 전통적인 정규군인 국방군Heer이었고 다른 한쪽은 나치당의 무장단체인 무장친위대Waffen-SS였다.

무장친위대가 한발 먼저 벨그라드에 들어섰다. 겨우 6명의 정찰대가 도시에 진입했고 2SS전차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가 그 뒤를 따랐다. 며칠 전에 루프트바페Luftwaffe가 벨그라드를 무차별 폭격해 2,000명 이상의 시민을 죽였고 시장은 더 많은 피해가 두려워 항복했다.

국방군은 장기간의 공성전을 예상했기 때문에 경악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이 전투를 시작으로 두 군대가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히틀러는 다윈Darwin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을 굳게 믿었고 정부조직과 당조직 사이의 경쟁을 부추겼다.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의 게슈타포Gestapo(비밀경찰)과 빌헬름 카나리스Wilheim Canaris의 아프베어Abwehr(군정보부)를 이중으로 두었는데 카나리스는 나중에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지상군도 독특한 명령체계, 계급, 군복과 훈련방식을 갖추고 전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경쟁했다. 독일육군은 1871년에 통합되어 보수적인 프로이센Prussian장교집단을 중심으로 독일의 사회정치를 지탱했다.

1차대전 후, 베르사유Versailees조약에 따라 독일육군이 해체되고 1921~1935년 라이히스베어Reichswehr(국가방위군, 사진참조)으로 이름을 바꾸고 100,000명의 병력으로 전차, 대구경포와 항공기를 가질 수 없었다.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상급대장Genraloberst이 군재편을 이끌었다. 그는 굴욕적인 조약에 분노하며 반드시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젝트는 수준급 장교를 중심으로 군대를 재편하려고 했다.

2차대전에서 이런 장교집단이 명예와 악명을 떨쳤는데 특히 에르빈 롬멜Erwin Rommel과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이 대표적이다. 구데리안은 기동력 높은 연합작전인 전격작전Blitzkrieg 개념을 완성시켜 2차대전의 판도를 바꾸었다.

혁신가인 젝트는 속도와 과감한 공격이 승리의 결정요인이라고 믿고 최신 전술과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채택했다. 그는 당시 세력을 크게 넓히던 히틀러에게서 군사재질을 발견했다. 히틀러는 1차대전 참호전을 겪으면서 장교계급과 구태의연한 군사전통을 혐오했다.

 

 

참전장군이자 독일대통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사진참조)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히틀러는 보헤미아Bohemia인 상등병이라고 비난했다. 1934년에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권력을 잡고 구데리안과 젝트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독일군의 대대적인 무장과 현대화를 서둘렀다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노골적으로 위반하며 매년 수 만명의 육군을 비밀리에 모병했다. 1938에는 600,000명을 넘어서며 보병사단 36개를 편성했다.

육군이 천천히 부활하는 동안 나치당도 독자적인 군사조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히믈러의 개인적인 탐욕과 영향력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당간부의 경호원으로 출발한 친위대Schutzstaffel(사진참조)을 이끌다가 독립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지상군으로 확대하고 싶었다.

1934, SS특무부대Verfugunstruppe(SS-VT)를 창설했는데 나치당의 명령으로 시민시위 등을 진압하는 특수조직이었다. 1936, 히믈러는 존경받는 육군장성출신의 파울 하우저Paul Hausser를 영입해 SS특무부대의 모병과 훈련을 맡겼다.

히틀러도 자신만의 정규군이 필요했기 때문에 SS특무부대를 독일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OKW)의 관할로 편입시켰다. 최고사령부는 친위대 조직의 확대를 염려하며 모병과 장비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최대한 육군을 지원했다.

 

 

육군은 전형적인 유럽군대답게 철저히 계층구조였다. 최소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고 사병과 장교는 따로 생활하며 군사예절을 강요했다.

육군이 주로 도시와 마을에서 병력을 모집했다면, SS특무부대는 농촌에 의존했다. 그 당시 농촌은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체력과 의지가 강한 병사가 대거 모여들었고 1941년 소련침공의 주역이 되었다.

전쟁에서 피해가 늘어가면서 기준이 완화되었지만 무장친위대의 초기 모병조건은 육군보다 훨씬 엄격했다. 선조가 아리안Aryan혈통에 키는 175cm 이상이어야 했고 치아를 하나라도 교정하면 안되었다. 총통의 경호대 출신인 1SS전차사단은 키가 더 커야 했다.

 

 

무장친위대는 공격전술 등의 전통적인 군사훈련 외에 체력단련을 특히 강조했고 개인이나 팀 스포츠가 필수였다. 권투, 체조, 실내구기, 수영으로 체력을 단련했다.

정치참여도 필수였다. 모든 무장친위대원은 나치당원이어야 했고 국가사회주의 사상교육을 받았다. 모든 계급이 신 나치질서의 십자군이 되어 열등인종을 전투로 몰아내야 한다는 국가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열등인종의 출산률이 워낙 높아서 열등인종이 대세가 된다는 조작 포스터입니다. 

 

우월한 아리아인종으로 선택받았다는 자기 확신을 가진 광신도가 되었다.

 

 

무장친위대 훈련학교를 졸업한 모든 장교는 일선 부대에서 최소한 1년 이상 복무하며 전우애를 학습했다. 상급자에게 헤아Herr(존칭)를 붙이지 않고 계급으로 불렀고 팔을 드는 히틀러식 경례를 붙였다.

국가사회주의 맹신과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 복종이 전통교육과 사회규범보다 중요했다. 전투에서는 언제나 최전방에 나서 장교의 사상률이 매우 높았다. 육군은 무장친위대의 전문성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1939년 독일군이 유럽으로 확장할 때에 최고사령부는 점령지에서 모병할 권한이 없었지만 무장친위대는 독일혈통의 현지인을 모병했다. 전쟁이 길어지자 네덜란드, 노르웨이, 프랑스와 러시아 등으로 모병지역을 크게 확대했다.

 

 

최고사령부가 아무리 무장친위대의 무장과 보급을 제한했더라도 두 군대의 무장은 비슷할 수 밖에 없었다. 두 군대 모두 MP40 기관단총, 판터와 타이거 전차를 보유했다.

대신에 유니폼은 완전히 달랐다. 무장친위대는 왼쪽 팔에 만자문Swastika 위에 독수리가 앉아 있는 국장을 착용했다. 상의 오른쪽 깃에는 SS 룬문자를 왼쪽 깃에는 계급을 달았다. 육군은 국장을 오른쪽 가슴에, 깃에는 전통적인 색상표식의 프로이센 상징을 달아 계급과 소속을 구분했다.

집단수용소를 관리했던 SS 해골부대Totenkopfverbande는 오른쪽 깃의 SS 문자를 해골과 뼈의 죽음의 패치로 바꿔 달았다. 그리고 무장친위대는 왼쪽 팔 아래에 혈액형 문신을 새겨 전장에서 보다 쉽게 수혈받을 수 있게 했다. 종전 후, 무장친위대를 색출해서 체포하는데 더 없이 좋은 증거가 되었다.

 

 

나치 독일은 2차대전 발발과 함께 기적과 같은 성공을 거뒀다. 1939년 폴란드 침공에 이어 노르웨이, 프랑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때만 해도 대부분의 전투는 육군이 수행했고 SS특무부대는 아직 최고사령부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해 지원역할을 했다.

히믈러는 SS특무부대가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육군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육군은 반대로 SS특무부대가 전문성이 떨어져 전과가 거의 없다며 시민테러에나 맞는 조직이라고 비난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독일은 점차 무장친위대에 의존하게 되었고 더 좋은 장비와 인력을 보급했다. 무장친위대는 육군의 어떤 부대보다 뛰어난 전투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무장친위대는 동부전선에서 광신적 전투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1943, 하르코프Kharkov 3차전(지도참조)에서 SS-연대장Standartenfuhrer 요하임 파이퍼Joachim Peiper2SS기갑척탄병연대 3대대를 이끌고 러시아 포위망을 50km나 돌파해 육군 320보병사단을 구원하고 부상병까지 안전하게 후방으로 데려왔다.

당시 2SS전차군단장이었던 하우저Hausser는 히틀러의 명령과 정반대로 포위망에서 병력을 빼내고 재정비한 후에 반격에 나서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소련의 공격을 막아냈다. 덕분에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의 남부집단군Army Group South는 전멸할 위기에서 벗어났다.

 

 

연합군까지 모두 포함해서, 2차대전 최고의 명장 만슈타인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일본의 영향으로 롬멜이 많이 알려졌지만 동부전선의 만슈타인에게는 비교하기 힘듭니다. 그는 히틀러에게 맞선 몇 안되는 지휘관으로 당연히(?) 경질되었습니다.  

 

육군과 무장친위대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는 두 군대 중 누가 더 심각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는가이다. 연합군은 1945~46년 뉘렘베르크Nuremberg 군사재판을 진행했다. 일부 관계자는 무장친위대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반면에 육군은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고 느꼈다.

군사재판에 기소된 육군 고급장교는 소수였고 무장친위대가 대부분이었다. 무장친위대는 민간인과 연합군포로에 대한 잔혹행위를 기록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열등인종과의 전쟁에서 무자비하게 승리를 거둬야 한다고 세뇌교육을 받았고 그만큼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

동부와 서부전선에서 세뇌된 그대로 행동했다. 서부전선에서는 1944 610일에 있었던 오라두르쉬르글란Oradour-sur-Glane학살이 최악의 범죄였다. 2SS전차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 4SS기갑척탄병연대 일부가 엉터리 정보를 믿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642명을 죽인 후에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겨우 몇 명이 살아남아 범죄를 알렸다.

1217일에는 파이퍼의 무장친위대가 벨기에 마을 말메디Malmedy 부근에서 미군포로 84명을 죽였다.

 

 

그렇다고 무장친위대만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영국 플리머스대학 교수인 해리 베넷Harry Bennett은 육군도 폴란드 침공 중에 민간인 수천명을 학살했고 유고슬라비아와 러시아에서 파티잔 토벌작전을 벌이며 광범위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발터 폰 라이헤나우Reichenau 1941년 말에 러시아에서 유대인을 파티잔과 동급으로취급하라는 명령을 내려 유대인학대에 직접 관여했다. 현장에서 사살하거나 SS보안대에 넘기라는 명령이었다. 발터는 나치당원이자 반 유대주의자로 고위 나치당원과 장교집단을 연결하는 사람이었다.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과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사진참조)과 같이 많은 육군 고급장교가 전범기소되어 사형되었지만 독일국방군은 무장친위대처럼 전범조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모든 범죄는 무장친위대와 나치 책임이며 육군과 같은 정규군은 모든 범죄에서 자유롭다는 오해가 퍼졌다.

미국,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독을 동맹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런 오해는 사실처럼 왜곡되었다. 그리고 육군 출신이 전후 독일연방군Bundeswehr의 주축이 되었다. 독일연방군에 입대하려면 이전 행위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고 해도 상당히 많은 2차대전 참전군인이 합류했다.

무장친위대원도 심사를 통과해 합류했지만 거의 절대 다수는 독일육군 출신이었다. 현대 독일연방군의 배경은 독일육군이기 때문에 결국 두 군대의 경쟁은 육군의 승리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