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서부전선의 대반전 - 팔레즈 포위망

by uesgi2003 2020. 8. 12.

 

이 이야기를 처음 읽으시는 분은 이전 이야기부터 읽으셔야 연결이 됩니다. 물론 공부하듯이 엄격한 순서가 있지 않으니까 자유롭게 즐기셔도 됩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블루코트와 코브라작전 공세에 대응하려고 캉 남부의 기갑전력을 이동시켜야 했다. 7월 말, 21전차사단을 시작으로 1과 9SS전차사단을 이동시켰다. 몽고메리는 캐나다군에게 팔레즈방향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독일군이 팔레즈로 이어지는 방어선을 단단히 구축했기 때문에 캐나다 2군단의 진격이 쉽지 않았다. 라호그La Hogue, 틸리Tilly, 라캄파뉴La Campagne를 놓고 격전이 벌어졌지만 독일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독일군은 8km 뒤에 두번째 방어선을 이미 만들어 두었다. 
방어선의 핵심은 3대공포군단의 88mm였다. 캉 남쪽의 평야는 몸을 숨길 곳이 없어서 88mm에게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더구나 캐나다군은 기만기동을 할 수도 없었고 독일군은 그 움직임을 이미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병만으로 최전방을 방어하면서 후방에 피신한 기갑부대로 응급대응했다.  

 

88mm라면 대공포를 생각합니다만 PAK 43/41과 같은 88mm 대전차포도 있었습니다. 2km 거리에서 연합군의 모든 전차 정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실전에서는 움직이는 전차를 맞추기 힘들었기 때문에 수십발을 쏘아야 한대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75mm 대전차포가 24,000문 정도 생산된 반면에 88mm 대전차포는 2,400문 정도가 고작이어서 75mm 대전차포가 주역이었습니다. 

 

 


캐나다 2군단장 시몬즈Simmonds는 고민이 많았다. 독일군이 캉-팔레즈 고속도로를 잘 방어하고 있었고 대전차포 세례를 뚫고 돌파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1SS전차군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101중전차대대의 타이거 21대는 큰 부담이었다. 

 


작전명 토털라이즈Totalise에서는 밤에 보병과 기갑부대가 동시에 진격하기로 했다. 보병은 미군 장갑차로 이동해 속도를 맞추기로 했다. 일부는 105mm를 떼어내고 보병수송차로 개조한 프라이스트Priest 자주포전차를 탔다. 기계화부대가 독일군 전선을 돌파하면 후속 보병이 고립된 독일군을 상대하기로 했다. 
독일군을 기습하기 위해 사전포격을 하지 않고 랭카스터Langcaster와 헬리팩스Helifax 폭격기가 작전 개시 30분 전에 독일군 방어선을 두들겼다. 그 다음 날에는 미군 플라잉포트리스Flying Fortress와 리버레이터Liberator가 캐나다군의 속도에 맞춰 두번째 방어선을 두들겼다. 저공비행 전폭기와 포병은 독일군의 저항이 심할 때마다 지원을 했다. 

 


시몬즈는 2와 3보병사단, 4기갑사단과 2기갑여단, 폴란드 1기갑사단 외에 51하이랜드사단과 33기갑여단을 투입했다. 8월 7일 저녁 11시, 1,000대의 폭격기가 독일군 방어선에 3,462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 일대가 화염과 먼지로 뒤덮여 400대는 그대로 돌아가야 할 정도였다. 독일 89보병사단이 궤멸되어 캐나다군의 전진을 막지 못했다 
30분 후, 지뢰제거전차 뒤로 캐나다군을 태운 수송장갑차가 끝도 없이 늘어섰다. 어둠과 폭격먼지때문에 후방에서 보포스Bofors대공포로 신호탄을 쏘아 방향을 지시했다. 탐조등으로 낮은 구름을 비춰 조명등 역할을 했다. 
캐나다군은 새벽동이 트기 전에 5km를 돌파했고 후속 보병부대가 뒤에 남겨둔 마을을 소탕하며 격전을 벌였다. 캐나다 4기갑사단과 폴란드 1기갑사단이 투입되었다. 두 사단은 노르망디 상륙 후에 도착했기 때문에 이번이 첫번째 전투였다. 두번째 방어선을 돌파한 후에 팔레즈 8km 전방의 고지점령을 맡았다. 그 후에 팔레즈 배후로 돌면 보병부대가 팔레즈를 탈환하는 것으로 작전을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8월 8일 정오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미 8공군의 폭격기 678대가 신호탄 연막으로 표시된 지역을 맹폭격하기 시작했다. 폭격 충격으로 신호탄 연막이 아군쪽으로 날아오면서 3사단장을 포함해 캐나다와 폴란드군 300명이 죽었다. 캐나다군은 미군 폭격기가 대공포에 맞아 격추될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캐나다군을 상대하던 12SS전차사단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 사단장 쿠르트 마이어Kurt Meyer는 캐나다와 폴란드 기갑부대가 집결하는 것을 확인했다. 경험으로 대규모 폭격과 포격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병력 대부분을 두번째 방어선으로 물리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면 반격하기로 했다. 
폭격이 끝나자 캐나다와 폴란드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마이어도 101SS중전차대대의 타이거 등을 불러 들였다. 격전이 벌어지면서 빌레보카쥬Villers Bocage의 영웅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이 전사했다. 비트만은 타이거중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가 대전차포와 셔먼 파이어플라이에 막혔고 그는 승무원과 함께 전사했다.
캐나다군은 점차 기세를 잃어갔고 독일군은 3km 후방의 세번째 방어선으로 퇴각했다. 디트리히는 일주일 전에 미리 방어선 구축작업을 해두었기 때문에 병력을 뒤로 물리고 88mm 대전차포를 집중배치했다. 15군에서 증원된 85사단도 도착해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두려움을 몰랐던 쿠르트 마이어는 의외로 벨기에에서 포로가 되었고 전쟁범죄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다시 감형으로 석방되었습니다. 51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미하엘 비트만은 독일군 3대 전차 에이스 중 한 명이고 빌레보카쥬전투에서는 단독으로 15분 만에 전차 10대와 대전차포 2문 등을 격파했습니다. 전사하기까지 전차와 대전차포 270개를 격파했다고 합니다.

그의 뛰어난 전차용병술이 아니라 타이거전차 덕분이었다는 비난도 만만치 않습니다. 

8월 9일 오전부터 캐나다군이 공격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숲에 은폐된 대전차포와 전차가 접근하는 전차를 사냥했다. 폴란드 기갑부대도 세번째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평야에서는 88mm가 지배자였다. 그리고 히틀러유겐트 사단의 저항도 교묘했다. 
캐나다군은 세번째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가 놓쳤다. 전차부대 일부가 목표인 195 고지로 향했다가 길을 잃었고 이튿날 오전에 195 고지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로는 6km 떨어진 140 고지였고 독일군의 새 방어선을 내려다보는 곳이었다. 마이어는 다급하게 반격에 나섰다. 고립된 캐나다군을 전차로 밀어붙이고 포격을 퍼부었다. 캐나다군은 전차 47대와 250명을 잃고 고지를 내주었다. 
몽고메리는 물량투입에도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자 실망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독일군은 4호전차 15대, 판터 5대와 타이거 15대로 캐나다군 700대를 막아내고 있었고 병력 차이도 3:1로 압도적이었다. 작전개시 후 겨우 10km만 전진했고 팔레즈까지는 20km나 남아 있었다. 
시몬즈는 토털라이즈 작전을 중단하고 병력을 불러들였다. 

8월 8일, 미 3군은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독일 7군은 북쪽에 대부분의 병력을 배치했기 때문에 미 3군을 상대할 병력이 없었다. 아브헝슈Avranches의 병목지점을 지나, 8군단이 생 말로, 브레스트와 로레앙을 포위했고 남쪽의 20군단은 루아르Loire강 부근에, 남동쪽의 15군단은 르망Le Mans까지 진격해 하우저의 사령부가 달아나게 만들었다. 
몽고메리와 아이젠하워는 독일군을 세느Seine강으로 밀어낼 계획을 협의했다. 영국과 캐나다군이 팔레즈에서 동쪽으로 급선회해 독일군을 오를레앙Orleans-파리 포위망으로 몰아넣고 미군이 남쪽 측면으로 돌파해 퇴로를 끊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공수부대 2개 사단을 투하해 독일군의 탈출로를 차단하기로 했다. 
독일군은 모흐땅에서 반격했다가 참담하게 실패했고 병력을 계속 서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패튼의 3군이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독일군은 완전히 포위망에 갇히기 직전이었다. 3군이 알렁쏭Alencon으로 북진하고 캐나다군이 팔레즈를 탈환한 후에 남진하면 독일 7군과 5기갑군은 빠져나갈 퇴로가 막히게 되었다. 

 


브래들리는 아이젠하워에게 패튼의 군단 하나를 북쪽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아이젠하워는 이 요청에 동의하며 만약 독일군이 군단의 후방을 차단한다면 매일 군수품 2,000톤을 공중보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몽고메리도 캐나다군이 하루 빨리 팔레즈를 장악하고 아흐정떵Argentan으로 진격하라고 재촉했다. 
클루게는 히틀러에게 더 이상 아브헝슈로 반격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연합군 공군이 부대 이동을 계속 괴롭히고 있고 미군의 방어선이 너무 두텁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병력을 서쪽 끝에 집결시키면 영국군의 돌파를 돕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히틀러는 그의 간청을 거부하며 새 명령을 내렸다. 에버바흐는 디트리히에게 5전차군을 넘기고, 7군 휘하에 에버바흐전차군을 새로 편성해서 남서방향으로 반격했다가 바다로 향하라는 명령이었다. 일선 지휘관은 반격은 고사하고 포위망을 탈출하기도 힘겹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에게 감히 대들 수 없었다. 이렇게 7군과 5전차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8월 10일, 3군의 15군단이 북진하기 시작했다. 패튼은 15군단에게 별도의 기갑사단을 증원해 독일군의 반격에 대비했다. 바로 자크 필립 르클레르jacques philippe Leclerc 2기갑사단으로 프랑스영토에서 처음으로 국토회복전을 펼친 프랑스부대였다. 당연히 2기갑사단이 가는 곳마다 프랑스인이 몰려나와 감격스러워했다. 
8월 12일, 15군단은 전차 36대를 잃고 독일군 708과 352사단을 밀어내며 알렁쏭을 탈환했다. 독일군의 저항보다 4개 사단의 교통혼잡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미군은 아흐정떵 남쪽 20km까지 접근했고 캐나다군은 북쪽 55km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다. 아직 55km가 열려 있어서 독일군에게는 마지막 기회였다. 

 


에버바흐는 새 전차군을 점검하고 경악했다. 기갑병력은 공습으로 산산조각났고 보병은 탈진해 있었고 보급은 바닥난 상태였다. 그는 클루거에게 아무리 빨라도 20일 이후에나 반격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8월 11일 반격을 고집부렸다. 서부전선참모부와 7군 사령관 하우저는 미군의 북진때문에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최고사령부에 작전취소와 15군단에 대한 공격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히틀러를 설득하느라 귀중한 하루를 소비했다. 
히틀러는 마지못해 부분 퇴각을 허락하는 대신에 15군단을 밀어내면 다시 서쪽으로 반격에 나서라고 명령했다. 


너무 늦은 상태였다. 8월 12일, 미 5와 29군단이 다시 공세로 나서며 독일 7군의 좌익을 강하게 압박했다. 더 남쪽의 7군단도 북동진해서 15군단과 포위망을 연결하려고 했다. 
북쪽에서는 영 2군이 남동진했다. 독일군은 3면에서 압박을 받으며 점차 포위망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8월 13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동쪽 끝에 남은 50km의 간격은 시간이 갈수록 좁아졌다. 
독일군은 한꺼번에 이 간격으로 달려가야 했지만 최고사령부에게 전면후퇴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재미있게도 연합군은 이 포위망 안에 갇힌 사냥감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아직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는 엉뚱한 결정을 내렸다. 

 


8월 12일, 15군단은 아흐정떵을 장악해 임무를 완수했으니 더 진격해서 캐나다군과 전선을 연결하는 것이 어떠냐고 패튼에게 물었다. 패튼은 영국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에 브래들리에게 ‘영국군을 바다로 몰아붙여 덩케르크Dunkirk 신세로 만들면 어떨까요?’라고 물었고 그냥 아흐정떵만 고수하라는 답변을 받았다. 
브래들리는 영국군과의 합의를 깨트리기 싫었고 패튼이 거듭 요청하자 아이젠하워의 명령을 받아냈다. 브래들리와 아이젠하워는 몽고메리에게 연결지점을 더 북쪽으로 이동시키자고 묻지도 않았다. 
패튼은 몹시 화를 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래도 15군단은 패튼의 묵인 하에 아흐정떵을 지나 천천히 북진했고 되돌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더 이상 갈 수도 없었다. 8월 13일, 독일군 116전차사단, 에버바흐전차군의 1과 2SS전차사단 중 일부가 15군단의 진격을 막았다. 독일군은 탈출이 아니라 반격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15군단이 마구 전진했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몽고메리는 캐나다군의 성과에 실망하면서도 추가로 병력을 투입해 탈출로를 막으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캐나다군은 캉-팔레즈-아흐정떵 도로의 동쪽을 노렸지만 8월 12일과 13일에 서쪽으로 기만기동하며 디트리히의 왼쪽을 노리는 것처럼 독일군을 속였다. 독일군은 캐나다군 장교의 사체에서 작전문서를 발견했기 때문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12SS전차사단은 캐나다군의 공격을 받아낼 준비를 마쳤다. 
이번에도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부대가 선봉에 섰다. 기갑여단의 엄호를 받으며 보병여단 2개가 도로를 향해 진격했다. 강을 건넌 후에 남쪽으로 선회해 팔레즈 북쪽의 고지 159를 장악하려고 했다. 사전포격없이 기갑부대와 보병만으로 독일군을 기습하려고 했다. 대신에 공중폭격이 있었다. 
경폭격기가 독일군 방어선을 폭격하고 중폭격기가 캐나다군의 우측을 융단폭격하면, 보병이 팔레즈를 장악하고 기갑부대는 그대로 달려서 미군과 포위망을 연결하려고 했다. 작전명 트랙터블Tractable이었다. 

8월 14일, 오전 11시 45분에 연막탄이 대규모로 터지면서 작전이 시작되었다. 보병부대가 강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지만 숲이 우거진 고지에서 독일군이 거칠게 저항했고 큰 피해가 발생했다. 
오후 2시에 예정된 중폭격기의 폭격은 이번에도 불상사가 일어났다. 800대 중 77대가 아군을 오폭해 65명이 죽고 335명이 부상당했다. 군단장은 보병을 추가로 투입하며 팔레즈를 탈환하라고 재촉했지만 독일군의 방어를 무너트리지 못했다. 
8월 16일, 2사단이 팔레즈외곽까지 진격했고 폐허 속의 독일군을 밀어내는데 2일이 더 걸렸다. 8월 15일, 폴란드 1사단과 캐나다 4사단이 팔레즈-아흐정떵 도로의 오른쪽에 진출했다. 미군과의 연결점은 아흐정떵에서 약간 뒤인 셩부와Chambois로 변경되었다. 

패튼은 세느강 방향으로 진격해 더 넓은 포위망을 만들기로 했다. 아흐정떵에는 프랑스 2기갑사단, 미 90과 80사단을 남겨두었다. 5기갑사단과 79보병사단은 세느강으로 보냈다. 
8월 17일, 세느강에 도착했고 이틀 후에는 1개 대대가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다. 곧이어 나머지 병력이 강을 건넜고 패튼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12, 19, 20군단이 오를레앙과 파리를 해방시켜 공수사단 투입계획이 취소되었다. 노르망디의 독일군은 완전히 갇혔다. 
캐나다군가 미군의 진격속도가 맞지 않아 몽고레미르는 셩부와에서 포위망을 연결한다고 합의했다. 미 5군단이 북동진해 캐나다군과 연결하기로 했다. 

 


클루게의 2개 군은 포위망에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에버바흐전차군은 8월 13일에 남쪽으로 내려가 아흐정떵에서 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 외에는 히틀러의 명령대로 서쪽과 북쪽에서 조여 드는 전선을 유지할 뿐이고 탈출로 확보에는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방어선은 계속 줄어들었고 곳곳에서 끊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이 프랑스남부에 상륙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독일군은 위아래에서 압박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남부에 상륙한 드라군작전Operation Dragoon입니다. 


클루게가 실종되었다는 소식까지 들어왔다. 공습을 받아 도랑에서 하루를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히틀러는 그가 연합군과 항복협상을 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다시 나타난 클루게는 전면퇴각을 간청했고 히틀러는 마지못해 새로운 방어선으로 퇴각하라고 승인했다. 대신에 클루게를 해임하고 베를린으로 불러들였다. 클루게는 히틀러의 암살시도 배후로 의심받았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했다. 
히틀러가 신뢰하는 발터 모델Walter Model이 후임으로 서부전선을 맡았지만 무너지는 방어선을 막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살려내는데 집중했다. 우선 2SS전차군단을 후방으로 빼낸 후에 탈출로 확보에 투입하기로 했다. 에버바흐가 이 명령을 받았다. 

 

방어전의 명수 발터 모델입니다. 히틀러가 가장 신뢰했지만 종전 직전에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명예로운 패전을 선택했습니다.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했습니다.

8월 16일, 캐나다 2군단이 독일 5전차군의 방어선을 뚫고 팔레즈에 접근했고 영국 2군도 팔레즈 서쪽에 접근했다. 독일 7군은 디브Dives강으로 천천히 후퇴하기 시작했고 에버바흐 전차군은 남쪽 측면을 결사적으로 막아냈다. 
독일군은 완전히 포위되는 위기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독일 특유의 효율적인 방식으로 후퇴계획을 만들었다. 확실한 시간표와 목표, 특정 부대의 이동로, 도강지점과 그 이후의 목표지점이 배포되었다. 성공적으로 후퇴하면 2개 군이 디브강 방어선에 다시 집결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연합군공군이 그대로 지켜볼 리가 없었다. 연합군 전폭기와 경폭격기가 하늘을 비우지 않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격했다.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 독일군은 처음으로 한낮에도 이동했고 영국과 미군전폭기에는 더없이 좋은 사냥감이었다. 

 


몽고메리는 캐나다군에게 서둘러 탈출로를 봉쇄하라고 재촉했다. 캐나다 4와 폴란드 1기갑사단이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을 밀어내며 셩부와 북서쪽 몇 km 지점까지 진격했다. 캐나다군은 뜨헝Trun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지만 폴란드군은 2SS전차군단(2와 9SS전차사단)과 만나 예정보다 훨씬 동쪽인 쿠드아르Coudehard 고지로 밀려났다. 
사단장 마체크Maczek은 우연히 도착한 이 고지가 디브강을 내려다보는 전략요충지라는 것을 알아채고 방어태세를 굳혔다. 포위망에서 빠져나가려고 이곳을 지나는 독일군에게 포격을 퍼붓고 디브계곡으로 병력을 보내 셩부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제 독일군에게는 3개의 좁은 다리와 오솔길이 탈출구 전부였다. 
독일군의 규율도 마침내 완전히 무너졌다. 사단은 연합군의 공격으로 몇 조각이 났다가 다시 끊임없는 공습으로 분해되었다. 대부분의 차량이 파괴되거나 버려졌고 통신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원부대부터 탈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본대를 잃은 병력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군전체가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독일군의 탈출로를 마지막까지 막아내 결정적인 활약을 한 폴란드 1기갑사단과 사단장 마체크입니다. 그렇지만 소련치하의 조국 폴란드로 돌아가지 못하고 해외에서 어렵게 살다 죽었습니다.

8월 17일, 팔레즈 동쪽의 캐나다군과 남쪽의 미군이 잠시 주춤거리면서 독일군은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하우저와 에버바흐는 2~3일동안 어둠을 틈타 총탈출하기로 했다. 
7군은 일단 오른Orne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엄청난 폭격과 포격 속에서 기적적으로 가파른 강변을 올라섰다. 다리를 건너는 순서를 엄격하게 지키고 모든 부대가 필사적으로 연합군의 공격을 막은 덕분이었다. 그리고 길을 가로 막은 차량은 무자비하게 밀어냈다. 
모델은 하우저와 에버바흐를 포위망 밖의 사령부로 와서 상황을 보고하라고 명령했지만 하우저는 부관을 대신 보냈다. 모델은 두 사람에게 디브강을 건너 새로운 방어선에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필사적으로 탈출로를 뚫어야 했다. 대부분의 부대는 하급장교나 하사관이 지휘하는 혼성부대 수준으로 변했다. 팔레즈 포위망 안은 연합군의 포격사거리였고 7군 사령부도 포격을 못이기고 이동했다가 다시 포격을 맞을 정도였다. 

 


8월 19일, 7군 참모부가 탈출계획을 세웠다. 9SS전차사단이 뜨헝방면으로 공격하고 2SS전차사단이 폴란드기갑사단을 밀어내기로 했다. 두 전차사단의 기만공격으로 연합군의 시선을 돌린 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이 탈출한다는 계획이었다. 
75군단사령부가 좁혀지는 서쪽 방어선을 최대한 막는 동안, 탈출병력을 둘로 나누어 북쪽은 85군단사령부가 지휘하고 남쪽은 2공수군단사령부가 지휘하기로 했다. 두 군단이 탈출하면 75군단은 연합군의 추격을 막고 뒤처진 병력을 흡수해 마지막으로 포위망을 탈출하기로 했다. 
탈출에 나서기도 전에 희망이 사라졌다. 연합군이 뜨헝과 셩부와를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에 생렁베흐St Lambert 양쪽을 뚫고 나가야 했다. 차량이 없는 병력은 알아서 디브강을 건너야 했다. 

밤이 되자 온갖 상황이 벌어졌다. 폭발섬광과 나침반에 의존해 조금씩 디브강으로 발길을 옮겼다. 7군사령관 하우저도 직접 기관단총을 매고 걸었다. 참모부 절반은 부상을 입어 에버바흐 전차군의 차량을 타고 다른 쪽으로 도강했다. 
하우저는 폴란드기갑사단이 막고 있는 쿠드아르에 도착해 날이 밝을 때까지 과수원에 몸을 숨겼다. 12SS전차사단장 쿠르트 마이어는 생렁베흐 아래로 도강했다. 8월 20일, 고급장교들은 병력과 차량이 모일 때마다 폴란드기갑사단의 차단선에 달려들었다. 하우저도 전차 2대와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탈출하다가 포탄파편을 맞고 턱이 부서졌다. 
탈출과 동시에 진행되기로 했던 2SS전차군단의 공격은 8월 20일 새벽 4시에 뒤늦게 시작되었다. 9SS전차사단이 캐나다군을 밀어내는 동안 2SS전차사단이 폴란드기갑사단의 배후를 공격했다. 폴란드기갑사단은 모든 화력을 전방의 탈출로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양쪽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다. 

8월 20일 내내 몽 오르멜Mont Ormel(225고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SS부대는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탈출로를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했지만 폴란드군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포위망이 뚫릴 때마다 반격에 나서 전선을 다시 복구했다. 연합군은 고립된 폴란드군에게 공중보급했다. 
독일군은 판터와 장갑척탄병으로 주변을 장악할 수 있는 맨션을 공격했고 폴란드군은 전차와 대전차포로 대응했다. 폴란드군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맨션을 내주지 않았다. 
늦은 오후가 되자 2SS전차사단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몽 오르멜에서 폴란드군을 밀어내지 못했어도 모든 화력을 자신에게 돌렸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병력이 탈출할 수 있었다. 8월 21일, 캐나다군과 미군이 폴란드군에 합류하면서 팔레즈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연합군의 대승이었다. 무사히 빠져나간 차량은 세느강으로 다시 퇴각하면서 파괴되고 버려졌다. 그리고 병력도 세느강으로 진격한 미군의 공격을 받아 독일국경까지 계속 달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독일 7군과 5전차군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그런 피해를 집계할 여유가 없었고 연합군은 얼마나 많은 병력이 빠져나갔는 지를 알 방법이 없었다. 약 15,000명이 전사하고 훨씬 많은 숫자가 부상당했고 50,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차량과 중화기는 모두 파괴되거나 버려졌다. 
8월 25일, 연합군은 파리에 무혈입성했다. 8월 31일, 패튼은 뫼즈Meuse강을 건너 메츠Metz를 해방시켰고 브뤼셀Brussels은 9월 3일, 안트워프Antwerp는 4일에 해방되었다. 
브리트니Brittany의 주요 항구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저항하다가 8월 14일에 생 말로St Malo가, 브레스트Brest는 9월 19일에 항복했다. 로레앙Lorient 등은 종전까지 버텼다. 저항이 거센 탓도 있지만 피해를 무릅쓰고 무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노르망디상륙 이후 팔레즈 포위망 탈출까지 200,000명이 사상당하고 그 이상이 포로가 되어 서부전선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지만 연합군은 보급로 정비를 위해 잠시 진격을 멈췄고 그 덕분에 독일군은 지그프리드Siegfried방어선을 보강하고 재정비해 이후 9개월간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